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약 빤 막내아들-8화 (8/234)

8화 없으면 만들면 되지 (2)

성수(聖水).

성스러운 물이라는 단어 그대로 신성력이 담겨 있는 물을 뜻한다.

신실한 신앙심을 가진 성직자가 보통 물에 기도와 축성을 통해 신성력을 담아낸다.

…라고 일반인들에게는 알려져 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성직자가 그 정도의 신성력을 보유한 경우는 흔치 않았다.

그럼 신성력이 모자라거나 부족한 성직자들은 어떻게 했을까?

당연히 몰래 만들어 썼고, 그 제작법은 각 교구의 지도자에게만 비밀리에 전수됐다.

놀랍게도 카엘의 스승은 그 제작법을 알고 있었는데, 카엘에게도 가르쳐 줬다.

‘안다고 해서 쉽게 할 수 있는 건 또 아니지만.’

“…카엘 님?”

옥스의 부름에 카엘은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그래. 이 친구 문제부터 해결해 줘야지.’

“도와주시면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옥스가 간절한 얼굴로 재차 부탁했다.

잠깐 딴생각했을 뿐인데, 약을 나눠 주는 게 싫어 망설이는 것처럼 보인 모양이었다.

애원할 정도로 대단한 약이 아닌데.

‘하브로스가 쉽게 만드는 약이라고 말을 안 해 줬나 보네.’

어쨌거나 어차피 줄 생각이었는데 굳이 보은하겠다고 하니 오히려 잘됐다.

카엘은 약 주머니를 통째로 옥스에게 줬다.

“자, 이거 가져가서 써.”

“헉! 이렇게나 많이 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보다 은혜는 잊지 않겠다고 했지?”

“…아, 네.”

옥스가 얼굴을 찌푸렸다.

“왜 그런 얼굴을 해? 자기가 먼저 은혜 갚는다고 해 놓고는.”

“또 약재나 찾아 오라고 하실 거 같아서요.”

“어. 맞아.”

“휴. 그럴 줄 알았습니다. 보통은 은혜 갚는다고 하면 정말 중요한 일을 맡겨야 하는 거잖습니까!”

“중요한 일인데?”

“…휴.”

한숨을 내쉰 옥스는 난처하단 얼굴을 했다.

“성벽 너머에서 약초 찾아 오라고 하시는 거면 지금은 무리입니다. 현재 비상이라 장벽 경계를 강화한 데다가 외부 정찰도 최소화하고 있거든요.”

몬스터 역병이 돈다는 건 몬스터가 제법 근처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의미.

언제 몬스터가 공격해 올지 모르는 상황이라 준비 중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옥스를 시켜 성수를 만드는 재료를 확보하는 게 더 중요했다.

“그래도 넌 나갈 수 있잖아? 설마? 레인저 조장인데 그것도 못 해?”

“마음먹으면 못 나갈 건 없긴 하죠. 개구멍으로 가면 되니까.”

카엘의 도발에 걸려든 옥스가 발끈했다.

사실 옥스가 말하는 개구멍의 존재는 이미 알고 있었다. 과거 이곳을 탈출할 때 이용했었으니까.

“그럼 문제없네. 이번에는 멀리 안 들어가도 돼. 비스쿰을 구하려고 하는 거니까.”

비스쿰은 나무에 기생해 수액을 먹고 꽃을 피우는 식물, 드물어서 그렇지 찾기 어렵지 않았다.

“어? 그거라면 봐 둔 게 있습니다.”

“잘됐네.”

“그래도 혼자 다니기는 위험한데.”

“네먼 불러서 같이 가면 되지 않아? 둘이 친하잖아.”

“그 고지식한 녀석이 가려고 할지… 오히려 상부에 보고나 안 하면 다행이겠죠.”

“안 가면 내가 직접 나갈 거라고 해.”

“카엘 님이요?”

“어.”

카엘의 단호한 모습에 옥스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렇게 한번 말해 보겠습니다.”

‘다음으로 필요한 건.’

옥스를 보낸 카엘은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소피아, 들어간다.”

침대에 누워 있던 소피아는 바로 몸을 일으켰다.

증상이 완화된 덕분에 거동에 불편한 건 없어 보였다.

그래도 쉬라고 해 놓고 바로 부탁하려니 미안했다.

“카엘 님? 무슨 일이신가요?”

“아, 지금 꼭 필요한 게 있는데 소피아만 가져다줄 수 있거든.”

“……?”

약환까지 만들어서 소피아를 회복시킨 건 상태가 심각했다는 이유도 있지만, 성수를 만들 때 필요한 걸 가져다줄 사람이 소피아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뭐든지 말씀만 하세요!”

‘그 말 후회할 텐데…….’

작은 주먹을 꽉 쥐며 당차게 말하는 소피아를 보며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어머니 방에 있는 은촛대를 가져다줘.”

카엘은 현재 반쯤 근신인 상황.

부재중인 어머니가 기거하던 곳까지 가려면 경비병에게 제지당하거나 하인들이 수상쩍게 여길 게 분명했다.

반면에 어머니의 심복으로 알려진 소피아라면 크게 시선을 끌지 않고 가져오고도 남았다.

“하지만 그건…….”

소피아는 망설였다.

카엘이 말한 은촛대는 소피아도 뭔지 잘 알았다.

어머니가 이곳으로 시집올 때 가져온 외가의 가보.

무척 소중히 여기는 보물이었다.

그걸 멋대로 가지고 나온다는 건 소피아로서는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정말 필요해서 그래. 다 쓰면 다시 돌려놓을 거야. 안 되겠어?”

“…….”

소피아는 무척 고심했다.

이해는 됐다.

멋대로 가보를 꺼내 오는 건 어머니를 배신하는 게 아닐까 걱정될 테니까.

‘정 안 되면 대체할 만한 걸 찾아보는 수밖에. 잘하면 교회에서 하나 찾을 수 있을지도…….’

“…가지고 오겠습니다.”

응?

잘못 들었나 싶어 소피아를 보니 정말인 듯 결연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괜찮겠어?”

“네. 꼭 필요하시니까 제게 말씀하셨겠지요. 카엘 님이 구해 주신 목숨. 만약 문제가 생겨 마님께서 꾸짖으시면 죽음으로 사죄하겠습니다.”

죽음으로 사죄하다니. 왜 이렇게 극단적이야.

“그럼.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소피아는 결연한 표정으로 방을 나섰다.

‘이럴 게 아니라 나도 어서 준비해야지.’

“이 정도면 되려나.”

카엘은 조리실에서 얻어 온 숯 더미를 바구니째로 대야에 쏟아부었다.

뭐라 해도 성수는 물.

만들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깨끗한 물이 필요했다.

원통에 솜, 숯, 모래, 자갈 순으로 쌓는 식으로 간단한 정수기를 만들어 깨끗한 물을 얻을 생각이었다.

한창 숯을 씻고 있으려니 옥스와 네먼이 나타났다.

“어? 뭐 하시는 건가요?”

관심을 보이는 옥스에게 냅다 일감을 맡겼다.

“마침 잘 왔네. 이것 좀 같이 씻자.”

“어? 네. 네.”

“다 씻은 건 여기에 놔둬. 말리게.”

“이러면 됩니까?”

“어. 잘했어.”

‘…뭔가 이상한데? 아!’

옥스는 그제야 자신도 모르게 일을 도와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지금 이거 하러 온 게 아닙니다.”

“온 김에 도와주는 거지. 원래 지금쯤 심부름하러 갔어야 하는 거 아니야?”

“아, 그러려고 했는데, 이 녀석이 할 말이 있다고 해서…….”

옥스의 말에 네먼을 쳐다봤다.

“…….”

“그래? 어디 말해 봐.”

그제야 계속 굳은 얼굴로 있던 네먼이 입을 열었다.

“옥스한테 찾아오라고 부탁하신 거 말입니다. 정말 중요한 겁니까?”

“어, 그래.”

“알겠습니다. 가자.”

네먼은 카엘의 대답 한마디에 고개를 끄덕이곤 바로 몸을 돌렸다.

옥스는 그 모습에 혼란스러워했다.

“응? 뭐야? 뭐야?”

“가자고.”

“이럴 거면 왜 굳이 물어본다 그랬어? 내가 못 미더워?”

“못 미더워서 이런 거 아니라는 거 알잖아. 내가 널 못 믿으면 누굴 믿어? 어서 가자.”

“그렇지? 잇힝.”

투덜거리던 옥스가 곧바로 웃으며 네먼의 뒤를 따라갔다.

그 말대로 네먼은 카엘에게서 직접 대답을 듣고 싶어서 온 거였다.

‘그 정도는 해야, 자기 신념을 접어 둘 수 있단 말인가.’

문득 몬스터 대침공 때 하나둘 쓰러지면서도 절대 물러서지 않고 몬스터와 맞서 싸웠던 병사들이 떠올랐다.

하나같이 고지식하단 말이지.

그 점이 멋지지만.

* * *

“크흠…….”

네먼이 굳은 얼굴로 뒤를 돌아보며 헛기침했다. 거기에는 방금 지나온 땅굴이 있었다.

먼저 나와 주변을 살피던 옥스가 그 모습을 보곤 물었다.

“왜 그래? 심기가 불편해? 카엘 님이 그리 못 미더워?”

“…….”

“한번만 믿어 봐. 전에 지어 주신 약도 정말 효과가 대단했거든! 하브로스 영감이 그러는데 어린 나이에도 약제술에 여간 조예가 깊은 게 아닌가 보더라. 자기도 뭔가 배울 게 없나 하고 눈에 불을 켜고 보고 있다더라고…….”

“그게 아니라.”

“그럼?”

“이런 곳에 비밀 통로가 있다니, 어떻게 된 거야?!”

“앗!”

옥스는 아차 싶었다.

저 땅굴은 경비대도 모르는 레인저 조장급에만 극비리에 공유되던 비밀 통로.

그걸 이 고지식한 경비대 백인대장에게 들킨 거였다.

‘젠장! 나오는 데 급급하다 보니 깜빡했어.’

옥스는 네먼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보고할 거야?”

“물론이다.”

‘젠장! 나도 참 바보지. 이런 고지식한 자식한테 뭘 물어본 거야.’

옥스가 속으로 투덜대고 있을 때, 네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사태가 끝나면 보고하겠다.”

“엉?”

“…나중에 순찰 중에 발견했다고 말이야.”

최소한 옥스가 책임지지 않도록 해 주겠다는 말이었다.

“네먼…….”

“징그럽게 이름은 왜 불러.”

“그래, 이 자식아! 고맙다!”

“들러붙지 말고. 어서 비스쿰이나 찾자.”

“따라오기만 해. 있을 만한 곳을 아니까. 거기는 몬스터도 없을 거야.”

신난 옥스가 앞장섰다.

* * *

번쩍.

검광이 번뜩이면서 피가 튀었다.

“크에에엑.”

목이 반쯤 베인 놀이 괴로워하며 쓰러졌다. 그 앞에 네먼의 모습이 드러났다.

네먼은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며 쏘아붙였다.

“여긴 몬스터가 없을 거라며.”

“…없어야 맞는데. 애당초 여기는 놀 영역에서 멀거든.”

“그래? 흠.”

옥스의 말에 네먼이 검을 검집에 집어넣으며 생각에 잠겼다.

“어서 돌아가야 할 텐데. 아. 저기 있네.”

투덜거리던 옥스가 나무 위의 비스쿰을 발견하고는 나무를 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내 비스쿰을 채집해 내려왔다.

비스쿰은 얼핏 새 둥지처럼 보였는데, 옥스는 그걸 자루에 넣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채집한 것까지 다 합치니 자루가 가득 찼다.

“이 정도면 되겠지.”

“근데 카엘 님은 이걸 어디다 쓰시려는 걸까?”

“글쎄. 완화제는 이미 만드셨고, 치료는 성수로 해야 한다고 하시긴 했는데, 설마 성수를 만드실 것도 아니겠고…….”

옥스는 웃으며 부정했지만, 왠지 그럴 거 같다는 생각이 가시질 않았다.

“…혹시 성수를 만드시려는 걸까?”

“너도 그렇게 생각해?”

“…….”

네먼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옥스의 마음이 급해졌다.

“어서 돌아가자. 가서 물어봐야지.”

그들의 물음에 카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하지만 사제도 아닌데 성수를 만든다고 하시는 건…….”

네먼이 조심스레 말했다.

그 이유는 옥스도 충분히 짐작했다.

가능한지를 떠나서 성직자도 아닌데, 임의로 가짜 성수를 만드는 걸 시도한다면 신성 모독죄로 처벌받을 수도 있었다.

“사실 그동안 말은 안 했는데… 신님의 음성을 들었거든. 그 말대로 하는 중이야.”

준비해 둔 변명으로 적당히 둘러댄 카엘은 옥스와 네먼의 반응을 살폈다.

통할까?

먼저 입을 연 건 옥스였다.

“어? 그럼. 사제님이 자리를 비우신 와중에 막내 도련님이 성수를 만드시는 건…….”

“신의 안배일지도 모르겠군요.”

네먼이 그 말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납득하는 듯 보이자 카엘은 눈을 내리깔며 쐐기를 박았다.

“안배라, 내가 어떻게 신의 뜻을 가늠하겠나. 그저 뜻을 받들 뿐이지.”

“아!”

“오! 오!”

감탄하는 둘의 표정에는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며 카엘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통했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