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약 빤 막내아들-7화 (7/234)

7화 없으면 만들면 되지 (1)

몬스터 역병.

주로 몬스터가 내뿜는 마기에 오염된 동식물을 섭취해 감염됐다.

장벽 너머로 몬스터와 인접해 있는 이곳 클리페우스성에는 연례행사처럼 도는 전염병이었다.

‘대침공 이후에는 대륙 곳곳으로 퍼졌지만…….’

처음 옥스로부터 몬스터 역병이 돌기 시작한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는 대수롭지 않아 했다.

성인들은 하루 이틀 앓고 나면 일어났고, 노약자들도 앓느라 고생해도 목숨까지 잃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으니까.

회귀 전의 기억을 되새겨 봐도 그렇게 큰일이 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며칠 뒤.

소피아가 종일 안 보이길래 찾았더니 몬스터 역병에 걸렸다는 게 아닌가?

‘아니, 소피아는 왜?’

놀란 카엘은 듣자마자 소피아의 방으로 향했다.

‘어떻게 된 거지?’

분명 소피아가 몬스터 역병에 걸린 기억은 없었다.

걸리려고 해도 걸릴 틈이 없었다.

몬스터 대침공 이전까지 매일 자신을 돌보느라 바빴으니까.

‘아. 그래서인가?’

곰곰이 생각하던 카엘은 과거와의 차이점을 깨달았다.

회귀 전 소피아는 자신과 종일 같이 있으며 자신을 돌봤다.

한눈파는 사이에 상태가 나빠질까 봐 걱정된다는 게 그 이유였다. 개인적인 일이 있어도 어지간하면 자신이 잘 때 처리한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달랐다.

자신이 건강을 회복한 뒤, 약재 창고며 훈련장이며 여기저기 돌아다니니 소피아도 전처럼 늘 붙어 있지만은 않았다.

카엘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가 외부 활동 한 탓에 한가해서 역병에 노출되다니. 뭐, 소피아도 건강한 편이니 괜찮겠지만.’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가볍게 병문안을 갈 작정이었다.

그런데 가는 길에 심상치 않은 소식이 계속해서 들리는 게 아닌가?

훈련병 중 한 명이 중태에 빠지고, 노인이 숨을 거뒀다고 했다.

‘평소보다 조금 마기가 강한 편인가?’

“…윽! 으음!”

소피아의 방 앞에 도착했더니 심하게 앓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 들어갈게.”

카엘은 그렇게 말하며 조용히 문을 열었다.

소피아는 침대 위에서 몸을 웅크린 채 끙끙대고 있었다.

앓느라 정신이 없어 자신이 들어왔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가까이 가니 드러난 얼굴과 피부가 보랏빛이었다.

몬스터 전염병의 전형적인 증상.

몬스터의 마기가 체내로 침습한 탓이었다.

‘예상보다 상태가 심각하다!’

얼굴의 보랏빛이 어찌나 진해졌는지 검은색으로 보일 정도였다.

‘이 정도로 독한 마기라니. 이러니 다들 난리지.’

어쩐지 연례행사나 다름없는 역병치고는 사망자까지 나왔다 했다.

“어, 카엘 님. 왜 여기에…….”

소피아가 약간 정신을 차렸는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누워 있어. 아프다고 해서 보러 온 거니까.”

“괘, 괜한 짓을. 저한테 옮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괜찮아. 그보다 잠깐 볼게.”

“카, 카엘 님?”

카엘이 가까이 가자 소피아의 검보랏빛 얼굴색이 순간적으로 확 붉어졌다.

‘이건 무슨 현상이지? 아.’

쿵쾅! 쿵쾅!

요동치는 심장 소리를 듣고 소피아가 매우 긴장해서 저런 거라는 걸 깨달았다.

‘아, 내가 갑자기 방에 들어와서 놀랐나 보군.’

“으음.”

당황해하던 것도 잠시, 소피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다시 고통이 밀려오는 듯했다. 그 와중에도 신음을 억지로 삼키는 모습을 보니 안쓰러웠다.

“쉬고 있어. 증상을 완화하는 방법이라도 찾아볼 테니까.”

체내의 마기를 치료하려면 신성력이 담긴 성수나 고위 성직자의 기도가 필요했다.

‘그런데 이곳에는 주교도 없고 사제도 겨우 한 명뿐이니…….’

그나마도 아직 부재중이었다.

듣기로는 교회의 소집으로 백작 간의 전쟁에 동원되었다고 했다.

전투에 참여하는 건 아니고 전사자의 시신을 수습하는 일을 했다.

시체를 그대로 방치하면 언데드 몬스터가 되어 버리는 일이 생겨서였다.

“저기… 카엘 님. 이제 조금 괜찮아진 거 같아요.”

“음? 아직 한창 아플 텐데. 괜히 나 신경 쓸 필요 없어.”

“아뇨. 정말 좀 괜찮아진 거 같아요.”

“그래? 어?”

정말 검보랏빛이었던 얼굴색이 조금 옅어져 있었다.

상태가 조금이나마 호전된 거였다.

“아, 그렇군.”

소피아를 살펴본 카엘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 있었다.

혈액 순환이 빨라져 체내에 스며든 마기를 순간적으로 억누른 거였다.

다만, 치료가 된 건 아니고 어디까지나 일시적으로 증세를 약화한 것뿐.

‘그래도 이걸 잘 이용하면 병이 급속도로 악화하는 건 막을 수 있겠어.’

“…카엘 님?”

“아.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카엘은 바로 소피아의 방을 나와 약재 창고로 향했다.

* * *

“카엘 님, 어서 오십시오.”

약재 창고로 들어가니 하브로스가 웃으며 맞아 줬다.

“뭐가 필요하십니까? 말씀만 하시면 제가 꺼내 드리겠습니다.”

은근한 말을 하면서도 눈빛이 반짝이는 게 이번에야말로 카엘에게서 조제법을 알아낼 기세였다.

어차피 대단한 조제법도 아닌데.

“시디움과 에보디아는 많이 비축하고 있지? 최대한 가지고 와 줘.”

“아, 네!”

하브로스는 얼른 대답하고는 바구니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왔다.

시디움은 톱니 모양의 잎에 속이 빈 가지 식물로 두통과 빈혈에 가장 흔히 쓰이는 약재.

에보디아는 에보디아 열매가 붉게 되기 전의 미숙과를 채취해 말린 약재를 말하는데 주로 해독과 이뇨제로 쓰인다.

“이게 전부야?”

“이것 말고도 두 바구니씩 더 있습니다.”

“좋아.”

둘 다 흔히 쓰이는 약재라서 그런지 비축분이 많은 듯했다.

카엘은 바구니에서 약재를 한 움큼씩 쥐어 그릇에 옮겨 담았다.

“이거 두 개를 당장 대량으로 끓여서 몬스터 역병에 걸린 사람들한테 나눠 주도록.”

“몬스터 역병이요?”

“그래, 증상이 악화하는 걸 막아 줄 거야. 그것만으로도 시간을 좀 벌 수 있겠지.”

“아, 알겠습니다.”

“과용하면 안 되니까 아침, 저녁으로 한 잔씩만 마시라고 하고. 많이 힘든 환자한테는 이렇게 약환을 만들어서 먹여.”

카엘은 주의 사항을 읊으며 약재를 빻기 시작했다.

응급 환자용 약환을 만드는 거였다.

급한 대로 소피아에게 먼저 먹일 용도였다.

다른 응급 환자 몫까지 생각해서 넉넉하게 만들었다.

“근데 카엘 님…….”

“음?”

“이건 증상을 약화하는 용도라 하셨는데, 혹시 치료 약은 없습니까?”

“없어. 성수가 아니면 치료가 안 되잖아.”

“혹시나 해서 여쭤본 겁니다.”

몬스터 역병은 이름대로 몬스터가 내뿜는 마기가 체내에 침입하는 병.

건강한 자라면 가벼운 감기 정도로 마기를 이겨 내고 떨쳐 일어난다.

증상이 심각할 때에도 사제가 기도와 함께 성수를 부어 주면 금방 나았다.

덕분에 이곳에서는 사제님을 존경하고 대우도 좋았다.

과거 이 외딴곳으로 부임하게 되어 낙심한 사제가 예상 밖의 환대에 어리둥절했다는 이야기도 우스갯소리로 내려올 정도였다.

문제는 한 명뿐이라 부재중일 때 비상 상황이 발생하면 곤란하다는 거였다.

‘지금이 꼭 그 비상 상황이고.’

카엘은 답답한 마음에 하브로스에게 물었다.

“혹시 사제님이 언제쯤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었어?”

“브란 님이 오늘 사제님을 모셔 오기 위해 기병을 보냈다고만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빨라도 일주일은 걸리겠군.”

그러면 늦는데.

자신이 내놓은 처방은 역병이 걸린 사람들의 증상을 조금 완화하는 것뿐. 오래 지체했다가는 또 다른 사망자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성수는?”

“교회에는 한 병 정도 있다는데, 성주님이나 성주 대리님의 지시에 따라 사용하는 거니까요.”

한마디로 높으신 분들을 위한 비상용이라는 의미였다.

게다가 한 병이라고 해 봐야 작은 유리병에 불과했다.

그걸로는 기껏해야 한 명.

나눠 써도 겨우 두 명을 치료할 정도밖에 안 됐다.

‘하는 수 없나.’

대화하는 사이 조제를 마친 카엘은 먹기 좋게 작은 약환으로 나눴다.

만든 약환 중 절반은 그릇에 옮겨 놓고 나머지는 작은 주머니에 넣어 챙겼다.

“약환은 여기 둘 테니까, 위급한 환자들한테 나눠 줘. 만드는 법 봤지? 시간 나면 더 만들어 둬.”

카엘은 솥의 물을 끓이기 위해 준비하는 하브로스에게 당부하고는 약재 창고를 나섰다.

* * *

“자, 이것 좀 먹어.”

카엘은 소피아를 일으켰다.

소피아는 그사이 다시 병이 악화해 반쯤 인사불성이라 억지로 삼키게 해야 했다.

다행히 금방 약효가 도는지 전신의 검보랏빛이 빠르게 옅어졌다.

그러다 정신이 돌아온 소피아는 카엘을 보곤 몸을 일으키려 했다.

“진정해. 괜히 무리했다가는 다시 병세가 심해질 거야.”

“…죄송합니다. 카엘 님을 돌봐 드려야 하는 제가 오히려 돌봄을 받다니.”

“그보다 어때? 얼굴색은 괜찮아졌는데, 이제 움직일 수 있겠어?”

“네, 완전히 나은 거 같아요.”

말은 그랬지만, 여전히 안색이 나빴다.

혈액 순환을 빠르게 만들어 일시적으로 활력이 돌아오게 한 것뿐이라 어쩔 수 없었다.

‘역시 제대로 치료하려면 성수가 필요한가.’

“그보다 아직 식사 안 하셨지요? 제가 가져다드리겠습니다.”

“괜찮으니까, 일단은 좀 쉬어.”

그때 문밖에서 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엘 님! 여기 계십니까? 레인저 2중대 3조 조장 옥스가 카엘 님께 용무가 있어 찾아왔습니다.”

‘무슨 일이지? 그나저나 말투가 왜 저래?’

목소리를 깔고 딱딱한 어투로 말하는 게 옥스답지 않았다.

“어. 들어와.”

“네! 들어가겠습니다!”

카엘의 허락에 힘차게 대답한 옥스는 안을 슬쩍 훑어보더니만 소피아에게 시선이 고정됐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어, 그러니까,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카엘이 묻고서야 황급히 고개를 푹 숙이며 횡설수설 대답했다.

옥스가 고개를 숙인 와중에도 귀 뒤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게 눈에 들어왔다.

‘아하.’

카엘은 어떤 영문인지 눈치챘다.

옥스가 평소답지 않게 저러는 건 소피아를 의식해서 저러는 거였다.

‘원래 인기가 많았지.’

소피아는 귀여운 외모에다가 활달한 성격 덕분에 수많은 남자한테 구애를 받았었다.

카엘을 돌보느라고 모조리 거절했지만.

회귀 전에 그걸 뒤늦게 알고는, 미안해서 시녀를 바꿔 달라고 하기도 했었다.

어머니는 그 요청을 듣고 소피아에게 넌지시 물었지만, 소피아는 뜻밖에도 절대로 그만두지 않겠다며 강경한 의사를 표했다.

‘그 뒤로 한동안 쌀쌀맞게 굴어서 조금 당황했었지.’

어쨌거나 이 상황에서는 제대로 이야기하기 힘들어 보였다.

“소피아, 무리하지 말고 쉬고 있어. 그래야 내가 나중에 부탁할 때 움직일 수 있지.”

“…부탁, 알겠습니다.”

카엘의 당부에 소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본 카엘은 옥스에게 말했다.

“우리는 나가서 이야기하지.”

“그럼. 소피아 님, 쉬십시오!”

옥스는 긴장한 얼굴로 소피아에게 큰 목소리로 인사했다.

그것도 잠시뿐, 밖으로 나오자마자 헤실거렸다.

이 친구가 정말.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왔어?”

그제야 정신을 차린 옥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하브로스 할아범한테 들었습다. 카엘 님께 역병 치료 약이 있다고요.”

“치료 약까진 아닌데. 어디까지나 증상을 완화해 주는 거야.”

“어쨌든 효과가 좋다고 해서…….”

“그런데 그렇게 많이 모자라?”

안 그래도 절반은 주고 온 참이었다.

“지금 하브로스 할아범이 열심히 만들고는 있긴 한데. 알아보니 레인저 중에서 상태가 안 좋은 녀석들이 많아서요.”

미련하게 아픈데도 숨기고 있었다는 거였다.

사정은 둘째 치고 큰일이었다.

레인저가 아파서야 몬스터의 동향 파악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레인저들도 그 사명감 때문에 미련하다는 소리까지 들어가면서도 아픈 걸 감추고 임무를 수행하려 한 거겠지만.

옥스의 말에 겨우 결심이 섰다.

“역시 이대로는 안 되겠군.”

“무슨 수가 있습니까? 사제님도 안 계시고, 성수도 없다던데.”

옥스의 넋두리에 카엘은 성직자들이 들었으면 경악할 만한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성수가 없어? 성수가 없으면 만들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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