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체질이 바뀌었다 (3)
팅!
퍼억!
튕겨 나가는 소리에 이어 묵직하게 후려치는 소리가 사방에 울렸다.
막시마의 검을 튕겨 낸 카엘의 검이 지면에 처박혀 있었다.
그것도 막시마의 바로 앞에.
막시마를 노릴 수도 있었지만, 다치지 않게 배려한 거였다.
‘시비 걸고 다툰 것 정도로 형제를 해칠 수는 없으니까.’
몬스터 대침공 때 막시마는 카엘을 구하기 위해 피투성이가 되어 죽을 때까지 싸웠다.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
지금은 당장 귀찮게 하니 잠깐 놀라게 한 것뿐이었다.
“으…….”
털썩.
다리에 힘이 풀린 건지 막시마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뒤늦게 훈련병들도 웅성거렸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막시마 님의 검이 튕겨 나간 건 봤는데.”
“공격도 안 닿았잖아. 그럼 방어에 성공한 건데.”
“근데 막시마 님은 왜 저래?”
“글쎄, 자세가 흐트러지셨나?”
훈련병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들 조용! 괜찮습니까?”
“어, 어…….”
네먼 교관이 훈련병들을 조용히 시키며 막시마를 일으켰다.
“근데, 카엘 님은 왜 저래?”
“비틀거리시는 거 아니야?”
“좀 상태가 나빠 보이시는데…….”
‘응? 상태가 나빠?’
훈련병들의 말을 들은 카엘이 아래를 내려다봤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눈앞이 핑핑 도는 게 어지러웠다.
카엘은 왜 이러는지 깨달았다.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약효가 떨어지다니…….’
체력 증강제는 어디까지나 일시적으로 근력과 지구력을 강화하는 약.
약효가 떨어지면서 반동이 온 거였다.
혹시나 해서 약환을 준비해 오긴 했지만, 지금처럼 주목받는 상황에서 먹기도 싫었다.
뒤늦게 네먼 교관이 상태가 이상한 걸 봤는지 다가왔다.
“괜찮습니까?”
“음, 조금 안 괜찮네요.”
카엘은 그 말을 끝으로 정신을 잃었다.
* * *
“흐음.”
카엘은 머리 위가 서늘함을 느끼며 눈을 떴다.
‘물수건인가?’
손을 대니 축축했다. 카엘은 그걸 옆으로 내려놓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소피아가 간호하고 있었는지 바로 옆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으음, 앗. 깨어나셨어요?”
소피아는 잠결에 몸을 움츠렸다가 카엘이 눈을 뜨고 일어난 걸 보고 벌떡 일어났다.
“괜찮아. 조금 기절했었나 보네.”
밖은 어느새 어두워져 있었다.
그 말에 소피아가 버럭 화냈다.
“조금이라니요! 하루 꼬박 기절해 계셨는데요! 얼마나 난리가 났는지 몰라요!”
‘그렇게 오래 기절했다니.’
어지간해서는 화를 안 내는 소피아가 왜 화내나 했는데 그럴 만도 했다.
‘원래 부작용 신경 쓸 약은 아닌데, 한번 연구해 봐야겠어.’
살짝 탈력감이 느껴질 수는 있지만,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다.
‘약효가 센 만큼 반동이 심하게 온 건가? 아니야. 힘을 발휘할 때 순간적으로 약효가 떨어진 것 때문이겠지.’
‘그렇다면 약효가 떨어지기 전에 중복 복용하면? 아니면 다른 효능이 있는 약과 중복 복용해도 되나?’
이것저것 실험해 볼 생각을 하니 왠지 미소가 나왔다.
“…그래서 난리가 났었다니까요! 듣고 계세요?”
“어, 어.”
난리가 난 건 당연했다.
10년 넘게 앓았던 공작가의 막내아들이 겨우 쾌유했는데 다시 쓰러졌으니.
“게다가 브란 님이 왜 벌써 카엘 님을 훈련시켰냐고 매우 화내셨다네요.”
“큰형님이?”
“네. 막시마 님께 근신 처분까지 내렸어요.”
‘잘됐다. 당분간은 귀찮게 굴지 않겠네.’
“카엘 님도 당분간 훈련 금지라고 하셨어요. 사제님이 돌아오시면 그때 병세를 확인한 뒤 논의할 거라네요.”
“뭐야, 그럼 나도 근신이나 마찬가지잖아.”
“당연하죠! 당분간 무리하시면 절대 안 돼요!”
“…알았어.”
카엘은 순순히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말로는 화내며 소리치는 소피아가 실제로는 잔뜩 겁을 집어먹은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 마음 약해지게…….’
어차피 할 건 많았다.
* * *
“이쯤이면 약효가 떨어졌겠지?”
카엘은 두꺼운 나무토막을 집어 들었다.
“흠!”
힘을 줬지만, 나무토막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체력 증강제 약효가 돌 때는 종이처럼 쉽게 찢어 버린 건데, 지금은 돌처럼 단단했다.
“확실히 약효가 떨어졌네.”
그간의 실험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약효는 일주일 정도.
약효가 떨어질 때도 약간의 탈력감만 생길 뿐이었다.
예상대로 약효가 떨어질 때 힘을 쓰지만 않으면 저번처럼 혼절하지 않았다.
게다가 약효가 끝나기 전에 추가 투약하면 그 시점부터 약효가 일주일 더 늘어났다.
실제로 효력이 무한히 지속될 수 있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아쉬운 건 약효가 중첩이 안 된다는 것 정도.
‘중첩하려면 약효가 영구적인 걸 먹으면 되겠지.’
이번에 먹은 아모뭄의 열매처럼 체질을 바꿔 버리는 약재를 먹으면 됐다.
전설 속에 등장하는 희귀한 약재 중에서는 쓸 만한 게 있었는데, 그중의 몇 가지는 위치를 아니 찾아 먹으면 됐다.
‘당장에는 힘들겠지만.’
대륙 곳곳에 퍼져 있는 탓에 찾으려면 이곳을 떠나 모험에 나서야 했다.
이곳에도 약재가 하나 있지만, 그걸 찾으려면 성벽 너머 몬스터가 들끓는 곳까지 가야 했다.
그러려면 준비할 게 많았다.
몸을 지킬 검술은 물론, 위험한 산속을 탐색하고 다닐 수 있는 기술이 필요했다.
레인저처럼.
툭.
“응?”
뭔가가 창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툭.
“뭐지?”
카엘은 재차 들리는 소리에 창문을 열었다.
아래를 보니 낯익은 얼굴이 작은 돌멩이를 던지고 있었다.
레인저 옥스였다.
‘웬일이지? 부탁할 거리라도 생겼나?’
다른 병이라도 생겼나 해서 봤더니 안색은 나쁘지 않았다.
“카엘 님!”
“어, 오랜만이야.”
“헤헷, 그동안 좀 바빴습니다. 잠깐 이야기 좀 괜찮으십니까?”
‘근데 왜 올라오지 않고 밖에서 부르는 거지?’
카엘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방 안을 슬쩍 봤다.
방 안은 널브러진 나무토막들과 돌멩이로 엉망이었다.
‘여기로 안 찾아와서 다행이네.’
카엘은 아래를 보며 말했다.
“기다려. 바로 내려갈 테니까.”
* * *
“무슨 일이야?”
아래로 내려가니 옥스가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카엘 님, 혹시 레인저 훈련을 받아 보고 싶은 생각은 없으십니까?”
매우 조심스러운 권유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귀족이 레인저가 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이곳에서 레인저가 몬스터를 막아 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해도 귀족의 자식들은 대부분 기사를 꿈꿨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도 사제가 되거나 수도에서 관직을 얻고 싶어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카엘은 달랐다.
“좋지. 안 그래도 배워 볼까 했었거든.”
“어, 정말입니까?”
“구하고 싶은 약초도 많은데, 그걸 직접 찾아보려면 레인저 기술이 필요할 거 같더라고.”
“아, 그건 그렇죠. 레인저가 아니면 어려울 겁니다.”
약초에 관심이 많아서 배운다는 말에도 옥스는 실망하기는커녕 자랑스러워했다.
그럴 만도 한 게, 산을 타기 힘든 레인저가 은퇴하면 약제사가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약재 창고를 지키고 있는 하브로스만 해도 레인저 출신이었다.
“그럼, 안 바쁘시면 바로 훈련 시작할까요?”
“어이, 옥스! 여기서 뭐 해?”
그때 저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네먼 교관이었다.
네먼을 본 옥스가 인상을 와락 썼다.
“너야말로 여긴 왜 왔어?”
“카엘 님과 함께 검술 훈련하려고 왔다.”
“뭐, 뭐라고? 검술 훈련?!”
“체력도 기르게 할 겸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개인 훈련을 시키고 싶다고 했더니 브란 님이 허락하셨거든. 너는 무슨 일로 온 거냐?”
“…그게.”
옥스는 눈치만 보며 아무 말도 못 했다.
아무래도 네먼과 달리 딱히 허락을 받거나 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너무 풀이 죽은 거 같아 카엘이 나서서 한마디 거들었다.
“레인저 훈련을 받아 볼 생각 없냐길래, 내가 관심 있다고 했어.”
“맞아. 이거 아쉬워서 어쩌나. 카엘 님은 레인저 훈련 받기로 하셨거든.”
“뭐?!”
바로 득의양양해진 옥스에게 네먼이 눈을 부라렸다.
“이 자식이! 내가 먼저 카엘 님께 재능이 있으니 기사로 키워야겠다고 말했잖아!”
“무슨 소리! 카엘 님이 전부터 약초에 관심이 많으신 데다가 손재주도 좋으셔서 레인저 훈련을 권한 거거든!”
‘내게 이런 날이 오다니.’
경비대 백인 대장이자 교관인 자와 레인저 조장이 서로 자신을 가르치겠다고 찾아온 거였다.
난감한 상황이지만, 기분은 좋았다.
‘인정과 기대를 받는다는 게 이런 느낌인가?’
다만, 이해가 안 가는 점이 하나 있었다.
“잠깐. 조용히 좀 해 봐.”
카엘의 말에 두 사람이 말다툼을 멈췄다.
“왜 서로 다투는 거지?”
“어, 그게……. 누가 카엘 님을 가르칠지 정해야 하니까요? 당연히 먼저 말한 제가 가르쳐야겠지만 말이죠.”
“그리 따지면 나는 원래 카엘 님을 훈련병으로 두고 있었다!”
“그건 의무 훈련이잖아!”
카엘은 얼굴을 붉힌 채 다시 으르릉대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만 좀 해. 두 가지 다 배울 생각이니까.”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는지 두 사람 모두 얼빠진 표정을 했다.
“어? 정말입니까?”
“…그렇습니까?”
“왜? 안 돼?”
“그거야. 안 되는 건 아닌데…….”
“아무리 체력이 좋으시다고 해도 힘들지 않으실까 해서요.”
“괜찮아. 괜찮아.”
카엘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약효 연구도 어느 정도 끝났겠다.
어지간해서는 위험할 일은 없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과거에는 몸이 불편해서 배우고 싶어도 못 배웠던 것들을 배운다고 생각하니 의욕이 치솟았다.
“그럼 됐지?”
“알겠습니다. 내일 바로 시작하죠.”
“뭐야? 나부터 할 거야.”
카엘의 말에 두 사람은 다시 누가 먼저 훈련시키냐를 두고 다투기 시작했다.
카엘은 둘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 *
다음 날.
카엘의 개인 훈련이 시작됐다.
옥스부터 해서 하루는 레인저 기술을, 다음 날은 네먼이 검술을 가르치기로 했다.
웃기게도 두 사람은 자기가 훈련시키는 날이 아닌데도 매일 나타났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다른 사람이 가르치는 게 조금이라도 틀리면 옳다구나 하며 지적했다.
‘나야 정확하게 배울 수 있어서 좋지만.’
두 사람이 자연스레 교관과 조교 역할을 해 주는 셈이었다.
캉! 캉캉!
“크윽.”
검을 나누다가 밀린 네먼이 뒤로 물러났다.
옆에서 지켜보던 옥스가 감탄했다.
“우와! 대단하십니다. 훈련한 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저 얄미운 녀석을 이기다니.”
체질 때문에 힘이 세진 덕도 있지만, 아무래도 예전에 스승의 검술을 보고 배운 것도 도움이 됐다.
‘스승의 검에 비하면 느려서 상대하기 편하단 말이지.’
정작 네먼은 옥스의 말에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기뻐했다.
“그렇지? 정말 재능이 뛰어나시다니까. 역시 기사가 될 재목이야.”
그제야 아차 싶었는지 옥스가 반박했다.
“무슨 소리야. 레인저 재능도 얼마나 뛰어나신데, 동물의 흔적을 얼마나 잘 찾으신다고.”
그것도 검술처럼 스승과 함께 산속에서 살면서 봐 왔던 게 도움이 된 거였다.
그렇게 훈련받고 책을 쓰며 하루하루 바쁘게 보내는 사이.
클리페우스성 내에 암울한 기운이 드리웠다.
몬스터 역병이 돌기 시작한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