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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탈옥했다-237화 (237/237)

# 237

Epilogue - 1년

저 멀리, 해가 저물어가는 중이다. 차에서 내린 나는 멍하니 석양이 지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핸드폰 화면을 켰다. 날짜를 확인한 나는 음, 하는 소리를 냈다.

"벌써 1년이네."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화면을 바라봤다. 나와 서지현이 함께 웃고 있는 사진이 대기 화면으로 되어있다. 우웅, 하고 핸드폰이 진동하더니 카톡이 하나 날아온다.

[빨리 와요!]

내용을 확인한 나는 픽 웃은 다음 답장을 보냈다.

[집 앞이야.]

무슨 내 몸에서 냄새 같은 게 나는 건가. 어떻게 저렇게 기가 막히게 타이밍을 맞춰서 메시지를 보내는 건지 모르겠다니까. 요 1년 간 대충 적중률이 80%는 상회하는 것 같은데. 열쇠로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곧바로 부앜에서 서지현의 머리가 쑥 하고 튀어나온다.

"다녀왔어요?"

"다녀왔어."

내 말에 하하, 하는 웃음 소리를 남기고 다시 서지현의 머리가 부엌으로 쑥 들어간다. 구두를 벗고, 옷걸이에 옷을 걸고 있으면 벽에 걸려있는 커다란 결혼 사진이 눈부시다. 나는 식탁 위에 사온 케이크와 샴페인을 내려놓고 물끄러미 그 사진을 바라봤다.

결혼식은 크게 올리지 않았다. 애초에 시간이 되감기고 나서부터 바로 준비하기 시작한 일이다. 게다가 나와 서지현은 별로 부를 만한 사람도 없었으니까. 페넬로페랑 제르멩 정도가 왔었던 것 같다. 지켜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화려하게 올리지도 않은 결혼식이었지만 그래도 만족한다.

"케이크?"

서지현이 그걸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아, 하는 소리를 낸 다음에 말했다.

"그러네요, 벌써 1년이 지났네요."

서지현과 만난 날을 계산하면 오늘로 1년째가 되는 날이다. 나는 커다란 창문 밖에 자리잡은 커다란 훈연통을 가리켰다. 안에서 뭔가 익고 있는 중인지, 아래에 장작이 타며 불티가 흘러나오는게 보인다.

"알고 있었던 거 아니었어?"

저거 사용하는 날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내 말에 서지현이 뒤편에서 나를 확 끌어안고는 속삭였다.

"사실, 까먹었으면 조금 실망했을 걸요."

말을 마친 서지현이 방금 전까지 내가 바라보고 있던 결혼 사진을 살펴본다.

"저 때는, 그럭저럭 괜찮았던 것 같은데."

"겸손하기는. 당신은 지금이 더 아름다워."

내 말에 서지현이 픽 웃고 내 뺨을 한 번 꼬집었다.

"당신 말하는 거였는데요?"

"무슨 그런 심한 말을. 지금은 별로야?"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저은 다음에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어?"

내 말에 서지현이 내 어깨 위에 올린 손으로 어깨를 꾹꾹 누르며 대답했다.

"항상 하는 일이죠. 밥 짓고, 반찬 만들고, 배식하고. 설거지 하고."

자금적으로 여유가 없는 상황은 아니다. 제르멩은 약속한 것들을 우리에게 주었고, 그것만으로도 사는 데에는 별 다른 부족함이 없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오십도 지나지 않은 나이에 그냥 돈 있다고 놀고 먹는 것도 웃기잖아. 그래서 나도 그렇고 서지현도 그렇고 나름대로 이런 저런 일들을 찾아서 하는 중이었다.

서지현은 주 3회 정도 봉사활동을 나간다. 소위 말하는 사랑의 밥차 같은 거다. 배를 곯아본 기억이라면 서러울 정도로 많은 여자니까.

"아, 돌아와보니 소포가 와 있었어요. 제르멩이 보낸 것 같던데."

"그래? 뭐였어?"

내 말에 서지현이 픽 웃고는 내 어깨를 한 번 힘껏 눌렀다.

"아직 안 열여 봤지요. 잠시만요, 가지고 올 게."

잠시 뒤, 서지현이 소포 하나를 가져와서 포장을 뜯었다. 열린 박스 안에 들어있는 건 돌아가는 물레방아 형태를 하고 있는 오르골이다. 섬세하게 만들어진 오르골의 한 켠에는 제르멩의 이름이 금으로 새겨져 있었다.

"저 이름이 박혀 있으면 가격이 미친듯이 뛰는 것 같던데."

"예술의 전당에서 전시회 한 번 열어달라고 사정 할 정도라잖아요. 이미 월드 클래스던데요. 미국 NBC에 초청 받을 정도니까."

아마 이 오르골을 경매로 넘기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집 2-3채 정도는 거뜬히 살 수 있을 정도겠지. 오르골을 돌려보자. 음악이 나오기 시작한다. 음악을 듣고 있던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하여튼 그 개 또라이 새끼."

1주년 기념으로 보낸 선물이 우리가 카피라나 마르골리스의 압박감을 이겨내기 위해 듣던 멜로디라니. 무슨 생각을 하면 이런 걸 선물로 보내는 거지. 멜로디가 멈추고 서지현이 뺨에 입을 맞춘다.

"씻고 올게."

내 말에 서지현이 나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더 들어간다.

"있다가, 식사 끝나고 나서 밤 아홉시 쯤 씻는 건 어때요? 대신, 깨끗하게."

"사람 깨끗하게 씻겨놓고 뭐 하려고."

내 말에 서지현이 음, 하는 소리를 내고 잠깐 고민하는 듯 하다 대답했다.

"글쎄요. 뭐 하려고 그러는 걸까. 난 몰라요. 아, 딱 시간이 되었네. 고기 꺼내서 식혀 둬야지."

말을 마친 서지현이 휘파람을 불면서 마당으로 나간다. 나도 그 뒤를 따라 나갔다. 훈연통을 열자 화악 하고 연기와 함께 고기 냄새가 올라온다. 고기를 호일에 싼 서지현은 그대로 녀석을 아이스 박스 안에 던져넣었다.

"좀 기다려야 해요."

나는 그 사이에 서지현이 사용한 훈연통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해는 금방 저물기 시작한다.

"김용천과 이시은, 결국 이어진게 신기하네요."

서지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에, 용인의 놀이동산에 놀러갔을 때 이시은과 함께 돌아다니는 걸 확인했었다. 뭐, 수원과 용인 사이의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고 젊은 나이에 에버랜드 놀러 가는 건 흔히 있는 일이니까. 아마 거기에서 서로 만나 눈이 맞았던게 아닐까.

"뭐, 만날 운명이기라도 했던 모양이지."

물론, 정작 두 사람은 서로가 이미 꽤 오랜 시간 함께 했었다는 사실 같은 건 전부 까먹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우리를 보고 뭐라고 한 마디라도 해야 하잖아.

하지만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결국 만나서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다.

"정말로 그래요."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식혀놓은 고기를 꺼내 칼로 자르기 시작했다.

"우리도 그랬을까?"

내 말에 서지현이 음, 하는 소리를 내고 접시에 고기를 담아 건네주며 눈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당신 아니었다면 저는 평생 혼자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했으니까. 아마 당신이 교도소에서 출소한 난 다음에 서로 만나지 않았을까요?"

그러네, 그럴 확률도 무시 할 수 없다. 만약 일이 그렇게 진행되었다면 나는 50이 넘었을테고, 서지현도 서른이 넘은 다음에야 서로를 만날 수 있었을거다.

"황혼의 중년 부부가 될 뻔했네."

내 말에 서지현이 키들거리다가 얼굴을 앞으로 내밀어 짧게 키스를 했다.

"물론, 저는 그래도 당신을 정말 사랑했을 거에요. 지금처럼."

그랬겠지. 그랬을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어때요?"

말을 해서 뭐하겠어.

"내가 이래서 요리를 할 엄두가 안 난다니까."

마음 같아서는 교대로 하고 싶었는데. 내가 만든 요리와 서지현이 만든 요리에 격의 차이가 너무 심각하다보니 결국은 포기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뒷정리는 내가 하고 요리는 서지현이 하는 식으로 그림이 그려졌다.

"왜요, 당신 요리도 맛있어요."

나는 그 말에 하, 하는 소리를 냈다. 어림도 없는 소리다. 과장 조금 보태서 우유에 시리얼 말아 먹는 것과 그렇게 다를 것도 없는 식사였으니까. 그래도 맛있게 먹어주는 서지현에게 미안할 지경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빈 그릇들을 싱크대로 옮긴 나는 케이크와 샴페인을 챙겨 와서 테이블 위에 놓았다. 서지현은 가만히 앉아서 샴페인 병과 케이크를 바라본다. 케이크 위에 올려진 초가 흔들거린다. 내 옆에 앉은 서지현이 초를 바라보다가 내 손을 잡았다.

"사실, 보고 있는데도 믿기가 힘들어요. 그런 일들을 모두 겪고 결국 여기까지 와서. 당신과 함께 한지 1년이 지난 날을 기념하고 있다니."

나도 마찬가지다.

"1년. 잘 보냈으니 앞으로 10년도 그렇겠지?"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10년만 그렇겠어요? 앞으로 쭉 우리는 행복할 거에요. 정확히 말하면, 지금 같은 나날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생각이에요. 사실,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우리가 보내왔던 시간 같지는 않을 거라 생각해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초가 거의 다 녹아버렸다.

"아, 케이크!"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우리는 뒤늦게 케이크 위에 세워져 있던 초의 불을 끄고, 케이크에 쏟아진 촛농을 털어냈다.

샴페인과 케이크를 먹던 와중에, 나는 문득 입을 열었다.

"나중에, 한 번 진보면에서 시작해서 쭉 여행해보는 건 어때."

진보면에서 시작해 인천 바다에서 끝났던 여정. 한 번 정도 되밟아 보는 것도 재미있을 같다. 가면, 아마 이 세상에 우리 둘 말고는 절대로 알 수 없을 기억들을 되새길 수 있을테니까. 남들은 관광지 같은 곳을 주로 돌아다니겠지만 우리는 거기 말고 다른 곳들을 들러 볼 예정이다.

분명히 힘든 시간이었고, 위험했던 적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난 지금은 나름대로 추억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물건으로 변했다. 어쨌든, 그 시간들 덕분에 지금의 우리가 여기에서 함께 서로간의 만남을 기념하며 케이크 위에 초를 밝히고, 서로를 바라보며 웃을 수 있는 거니까.

내 말에 서지현이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나는 언제든지 좋아요. 말이 나온 김에 서둘러봐요."

모아놓은 돈에는 문제가 전혀 없다. 애초에 우리가 사치에 미친 사람들은 아니니까. 가난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확 부자가 되면 인생을 망치기 십상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다 사람 따라서 달라지는 거다. 게다가, 우리의 주 수입원이라고 할 수 있는 건물도 하늘에서 뚝 하고 떨어진게 아니잖아.

제르멩이 넘겨준 서울의 건물은 우리가 함께 개고생을 해서 얻어낸 일종의 기념비 같은 거다. 거기에서 떨어지는 수익을 낭비하려고 들면 그 동안에 우리가 버텨왔던 시간들이 생각나서 차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덕분에 돈은 계속해서 쌓이는 중이었다.

한 달 정도 우리가 지나왔던 곳들을 둘러보면서 시간을 보낸다고 해서 자금난에 부딪칠 일은 없겠지.

"날짜를 맞추자. 여행이 끝나고 나서 집에 돌아올 즈음 해서 어머니랑 누나 기일이 되도록."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샴페인 잔을 들었다. 잔과 잔이 부딪치며 쨍, 하는 소리를 낸다.

여행을 떠나게 된다면, 분명히 즐거울 것이다.

남아있는 기억들이 많으니까. 서지현을 처음 만났던 공원도 그렇고. 함께 처음으로 밤을 보낸 보건지소도 그렇고. 지나가다가 머물렀던 모텔, 처음으로 서로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던 원주시의 병원... 머물렀던 안전지대와 싸움을 이어가야 했던 랜드마크들까지.

그 시간들을 보내고 나서 나에게 남은 것은 결국 눈 앞에서 웃고 있는 서지현이다.

사금은, 사금이 섞여 있는 흙을 걸러내고 정제하기를 수십번 반복해야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낸다. 나에게는 서지현이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다.

1년이 지나도 어제 만난 것처럼, 황금처럼 눈부시도록 반짝이고, 평생을 가도록 그 빛을 잃어버리지 않을 사람. 몇 년이고 지나서 서로 머리가 하얗게 변하고 얼굴에 주름이 생겨도 내가 이 사람을 바라볼 때는 여전히 빛나겠지.

*** 후기 ***

안녕하세요, 아낙필입니다.

그래서 나는 탈옥했다 라는 제목을 달고 이야기의 연재를 시작하고 시간이 많이 흘러, 마침내 완결까지 도착했네요.

아직 날이 더울 때 연재를 시작했는데, 연재를 마치고 나서 밖에 나가보니 추워진 날씨가 시간이 이만큼이나 흘렀다는 사실을 실감나게 합니다.

이전까지 제가 써왔던 이야기들을 생각해보면, 주인공과 다른 사람들 간의 갈등을 중점적으로 다룬 경우가 많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한 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보다는 사람이 처한 환경(괴물, 랜드 마크, 월드 앵커와 같은)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이야기를 중점으로 두고 써보는 건 어떨까? 라는 생각과 함께, 거기에 주 초점을 맞추고 이야기를 전개해 보았습니다.

또한, 주인공인 오현석과 동반자인 서지현의 경우,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에게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는 상황을 줄여보기 위해서 저 나름대로는 굉장히 신경 썼던 것 같습니다. 어느 한 명이 다른 한 명에게 일방적으로 업혀 가는 방식으로 진행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가 쓴 이야기의 대부분이 이러한 점을 어느정도 염두해 두고 전개되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이야기를 쓰는 입장이었던 저는 재미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읽어주신 소중한 독자님들도 약간이나마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면 저로서는 그 이상으로 감사한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잘 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고, 되돌아보면 부족한 점도 많은 이야기였지만, 이걸로 이만 이번 이야기는 끝을 고하려고 합니다.

다음에는 조금이라도 더 나아진 이야기를 들고 여러분을 찾아 뵙겠습니다.

새로 연재를 시작하면 공지를 할 예정입니다. 이번에 쓴 이야기를 나쁘지 않게 봐주셨다면, 다음 이야기에서도 또 함께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이만 말을 줄이겠습니다.

읽어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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