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6
되감기는 시간
내 말에 제르멩이 잠깐 고민하는 듯 하다가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서지현 빚을 갚고, 어머니와 누나가 머무르시는 곳만 좀 더 나은 곳으로 몲기는 정도만 부탁 좀 하자."
당장, 빚이 있어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서지현도 생활고에 시달리는 중이었으니까. 최소한 그건 털어내고 싶다.
"더 부탁해도 괜찮은데."
제르멩의 말에 나는 하, 하는 소리를 냈다. 사람을 뭘로 보고, 기생충이라고 생각하는건가.
"청담동에 10층짜리 건물 한 채 정도는 간단하게 넘겨 줄 수 있는데. 부동산 등기 갑구에 네 이름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깔끔한 물건으로다가 말이야."
너 그런 단어는 어디에서 주워담은거냐? 갑구랑 을구라니. 쌓아놓은 교양 봐라.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서지현이 대답했다.
"당신, 저런 건 군말 없이 달게 받아요. 자본주의 한국에서는 부동산 가진 사람이 최고에요. 게다가, 우리가 지금까지 한 일에 대한 보상으로 받게 되는게 청담동에 건물 한 채라면 우리, 거의 무료 봉사를 한 수준인데."
말이야 틀린 말은 아니지. 까놓고 말해서 결과적으로 쪽박을 차게 된 지구 전체를 싹 다 구하는데 성공하게 생겼는데. 그 대가로 받게 되는게 건물 한 채라고 한다면야.
"그럼 그렇게 알도록 하겠네."
그 사이 페넬로페는 조타륜에 트리거 기어를 밀어넣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마침내 거대한 공간의 벽을 타고 돌아다니던 빛무리가 조타륜의 기둥을 타고 오르기 시작한다.
"별 달리 해야 할 일은 없고?"
내 말에 제르멩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건 현재를 기준으로 되감기는 시간 속에서 보존할 것들을 설정하고, 과거의 인과 관계를 조정하는 것 정도인데. 그 정도는 페넬로페 양이 할 수 있을 거야."
페넬로페가 제르멩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가능해. 제르멩은 그 최현우라는 녀석 대신 밀어넣고, 오현석은 교도소 신세를 벗어나게 하면 되는거지?"
나는 페넬로페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질문을 던졌다.
"그럼, 내가 죽인 사람들은?"
내 말에 페넬로페가 대답했다.
"글쎄, 어차피 되감기는 시점은 지구에 이 일이 발생하기 바로 전 시점이니까. 네가 죽였던 사람들의 사인을 바꿀 예정이야."
페넬로페의 말에 따르면 내가 죽였던 여덟명의 사인 정도는 직접 통제해 놓는 편이 좋다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내 말에 페넬로페가 허공에서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말했다.
"최현우는 제르멩이 자리를 대체할 테고... 여덟명은 모여서 마약파티를 한 적이 있으니까... 아마 거기에서 과다 복용으로 죽었다는 식으로 정돈을 하면 될 것 같은데."
나쁜 이야기는 아니네. 거기에서 싹 다 죽어버렸다면 당연히 내가 그 녀석들 몸에 칼을 밀어넣을 이유도 없고. 당연히 녀석들을 죽였다는 이유로 감방을 갈 일도 없다. 다시 이리저리 손을 움직이며 뭔가를 조종하고 있던 페넬로페가 잠깐 멈칫하고 나를 바라본다.
"이건 네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아."
"듣고 있어, 말해."
페넬로페는 내 쪽을 응시한다.
"네 어머니와 누나의 사인."
나는 그 말에 잠깐 침묵했다.
"무슨 뜻이야?"
내 말에 페넬로페가 음, 하는 소리를 냈다.
"내가 되돌리는 시점은 정해져 있지만, 최현우는 참령에 당한 거잖아? 아예 원래부터 없던 사람이야. 거기에 제르멩이 들어간다는 뜻은..."
최현우의 유년시절 제르멩으로 대체되었다. 뭐 그런 뜻인 모양이다.
"내 가족에 관련된 일이 아니라서 네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아. 네 어머니와 누나가 죽기 전까지 당해야 했던 일들, 네가 괜찮다면 바꿔 줄 수도 있어. 물론, 네가 원한다면 이지만."
페넬로페의 말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하던 나는 이내 아, 하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기억하고 있게 되는거지?"
내 말에 페넬로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두 사람 모두... 사고사 같은 걸로 처리해 줄 수 있어."
이야기를 들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줘."
내가 기억하고 있으면 된다.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게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어머니와 누나가 살아왔던 과거를 바꿔주고 싶다. 죽기 전까지 그렇게 고통받던 삶이 아닐 수 있도록.
"다만, 물건 하나를 남겨 줄 수 있을까? 일기장인데."
내 말에 페넬로페가 으음, 하는 소리를 내고 허공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슬아슬하게 가능할 것 같은데. 다만, 그 이상은 불가능해."
"괜찮아. 그거면 충분해."
내 말에 페넬로페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손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녀의 주변에서 빛무리가 번쩍거리기 시작한다.
"거의 다 끝났어. 이제..."
조타륜의 기둥을 타고 올라가던 빛무리들이 그 끝에 모였다가 페넬로페 쪽으로 내려온다. 빛무리 속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무수한 로마자와 시침, 분침, 초침같은 것들이다.
"되감을게."
제르멩이 잠깐 나와 서지현, 그리고 페넬로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나중에, 여유 되면 한 번 찾아가볼테니 밥이나 한 끼 먹여달라고."
그 대화로 끝이었다. 페넬로페의 손 위에 모여있던 하얀 빛이 점점 퍼지기 시작하고, 시야가 하얗게 점멸하기 시작한다. 몸이 확 뒤틀리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서서히 다시 떴다.
약간 어지러운 느낌과 함께, 내가 서 있는 곳을 확인한 나는 작게 신음소리를 냈다.
"집."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잠깐 얼굴을 감쌌다. 내가 살던 집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전세집이지만. 잠깐 멍하니 주변을 살펴보고 있던 나는 사진을 살펴보다가 후우, 하고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바닥에 뭔가가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겉표지만 봐도 알 수 있다. 내가 부탁했던 누나의 일기장이다. 나는 잠깐 그걸 바라봤다.
"짐 싸야지."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바로 배낭을 꺼내서 짐을 싸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청송군 진보면 보건지소의 전화번호. 확인을 마친 나는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
잠깐 핸드폰 너머로 신호가 가는 소리가 들린다. 이어폰을 낀 나는 계속해서 짐을 싸기 시작했다.
- 여보세요.
이어폰을 통해 전달된 목소리는 지금 전화를 받은 사람이 누구인지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명확했다. 나는 잠깐 할 말을 잃었다. 만약에, 일이 잘못되었으면 어떡하지. 나만 기억이 남아있는 거면 어떡하지. 그런 고민과 걱정을 이겨내고 입을 열었다.
"저기..."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 당신, 짐은 싸면서 전화 한 거죠?
약간 목이 메인 것 같은 서지현의 목소리. 나는 그 말을 듣고 나서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
- 빨리 와요. 고속버스터미널에 오후 5시에 출발하는 안동행 버스가 있어요.
그리고 전화기 넘어에서 누가 뭐라고 하는 이야기가 들리고, 서지현이 거기에 대답하는 소리가 들린다. 다시 수화기를 통해 서지현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 저기, 이걸로 전화를 계속하기는 조금 힘들 것 같은데. 정말 미안해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직장 전화로 몇 시간이고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을테니까. 서지현은 핸드폰 번호를 알려준 다음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통화를 하기는 힘들 것이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는 마음에 편의점에 가서 카드의 남은 잔액을 확인해봤다.
"지금 씨발 돈이 문제가 아니지."
그런 생각을 하고 안동까지 가는 콜택시를 찾아내려고 핸드폰을 들어올리자 문자가 하나 와 있었다.
[오후 5시 버스 타고 안동에 도착하면 제가 일 끝나고 안동에 도착하는 시간도 얼추 일치 할 거에요. 당신, 쓸데없이 택시 같은 거에 수십만원 뿌리기만 해봐요.]
이야, 기가 막히네. 귀신이야 귀신.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시키는 데로 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어차피 안동역까지 가는 건 기차보다는 버스가 훨씬 더 빠르니까.
"사람, 진짜 엄청나게 많네."
버스 터미널에 도착한 나는 몰려 있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작게 감탄했다. 여기에 모여있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몇초 전까지는 죽어 있었겠지. 그리고 여기도 무너져 있었을테고. 더 이상 걸어다니면서 뭐가 튀어나오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고, 도시에서 도시로 움직이기 위해서 미션 같은 걸 깨야 할 필요도 없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나는 줄을 서서 기다리고, 버스 티켓을 끊는다.
버스가 움직인다. 도시에서 도시로 움직이는게 이렇게 쉽다. 누구는 안동에서 서울 언저리까지 도착하기 위해서 별 고생을 다 했는데. 어떻게 보면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는 지폐 쪼가리 몇 장 건네주면 몇 시간 뒤에 서울에서 안동으로 싹 하고 이동 할 수 있다니.
"무인도에서 10년 뒤 구조된 사람이 슈퍼마켓에 오면 이런 기분일까."
지나쳐가는 풍경 하나 하나가 너무나도 평화롭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닌 모양이네."
버스가 달리는 도로 옆에 난 풀들이 빠르게 지나가는 와중에도 선명하게 인식된다. 보통 사람이라는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전반적으로 내 감각이나 육체도 어지간한 사람들보다는 여전히 뛰어난 모양이다.
마침내 버스가 안동역에 도착했다. 안동 버스 터미널에 내려 입구로 나오자마자 눈에 누군가가 확 띈다. 서지현이다.
"..."
다가가자 서지현은 별 다른 말 없이 가만히 서서 시계를 연신 쳐다보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오현석입니다."
내 말에 서지현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마주 웃으면서 인사를 한다.
"서지현이에요."
서로 어색한 척 하면서 인사를 나누고 나자 나는 곧바로 서지현을 향해 말을 건냈다.
"좋아하는 음식이 뭐에요?"
내 말을 들은 서지현이 이내 희미하게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물론 이것도 재미있지만요. 저 하고 싶은거 꽤 많아요. 굳이 이런 장난 치면서 시간 보내기 아까울 정도로."
말을 마친 서지현은 내 앞으로 다가와 손을 끌었다.
"안동역 근처는 어렴풋하게나마 기억하고 있어요. 물론 시간이 꽤 지나서 약간 길을 헤맬지도 모르지만."
"뭐 어때."
지금 우리가 어디 가서 뭘 하느냐는 어차피 별로 중요한게 아니잖아. 우리는 잠깐 의자에 앉아서 멍하니 안동역을 바라봤다.
"내 기억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내 말에 서지현이 나에게 기댄 채 키들거리며 말했다.
"어디, 여기만 그렇겠어요. 전 보건지소에서 전화벨 소리 듣고 기겁을 다 했어요."
놀랄 만 하지. 나는 잠깐 있다가 서지현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었다.
"손에서 불 나와?"
내 말에 서지현은 눈을 감은채로 희미하게 웃었다.
"많이는 아니고, 가스 토치 정도로는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차피 그런거 필요 없는 세상이잖아요?"
그래. 손에서 불 나오고, 날아오는 화살이나 총알 같은 걸 쉽게 피할 수 있는 능력은 필요하지 않은 세상이다.
"잠깐 이렇게 있죠."
말을 마치고 서지현이 눈을 감았다. 나도 눈을 감고 있는 서지현을 바라봤다.
"배고프지 않아? 치킨 먹을까."
불과 몇 시간 전까지는 저녁 메뉴로 치킨이 올라오는 일은 상상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태연하게 오늘 저녁 식탁 위에 밑간하고 튀김옷을 입혀 기름에 튀긴 닭을 올릴 수 있다. 다시 문명화된 세상으로 돌아온 기념일을 빛내기에 잘 튀겨낸 황금빛 치킨만큼 완벽한 음식도 드물거다.
"두 마리?"
오늘 같은 좋은 날 한 명 당 닭 한 마리 정도는 작살 내야지. 내 제안에 서지현이 음,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면 남지 않을까요."
뭐, 먹어보면 알겠지.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잡고 걸어가다가 입을 열었다.
"전부 끝났네."
내 말에 서지현이 맞잡은 손을 잠깐 꼼지락거리다가 대답했다.
"또는, 이제 시작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어쨌든, 우리가 그렇게 개고생하면서 살아왔던 세상은 끝을 고했다는 점 만큼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