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5
되감기는 시간
머리가 무겁고, 눈도 제대로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 흐릿한 시야를 통해서도 더 이상 내 앞에 서 있는 녀석이 없다는 건 알 수 있었고, 맛탱이가 쫙 가버린 와중에도 내 머리통을 붙잡고 있는 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짐승의 시간 중지]
허어, 하는 소리가 입에서 절로 나온다. 누가 삭신을 붙들어 놓고 사방천지로 갈아버리는 그대로 쓰러져서 멍하니 있으려니 서지현이 내 입에 포션을 하나 물려놓는다.
"너는?"
내 말에 서지현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뭔가를 꺼내 흔들었다.
"주사는 효과가 더 빠르더라고요."
중은 자기 머리를 못 깎지만 간호사는 자기 팔에 주사를 놓을 수 있구나. 그렇다고 세상 편한 표정은 아니다. 대충 봐도 얼굴색이 장염이라도 걸린 것처럼 좋지 않아 보인다. 서지현은 포션으로 몸은 멀쩡해졌도, 나도 조만간 멀쩡해질 예정이고. 그렇다면...
"멕시코는?"
"한 병 물려놨어요."
그래, 그럼 차차 나아지겠지. 잠깐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제르멩이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에게 다가온다.
"목적이 뭐였던 거야, 너는. 이렇게 해서 네가 얻을 게 뭐가 있다고."
내 말에 제르멩이 대답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거지. 불멸을 잃은게 아니라 필멸을 얻었다는 식으로."
나는 그 말에 어이없어서 한숨이 다 나왔다.
"얻고 싶다고? 도대체 뭘."
제르멩이 불멸을 잃어버린게 아니라 필멸을 얻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해버리니 내 입장에서는 뭐라고 반응해야 할 지 잘 모르겠다. 내 말에 제르멩이 대답했다.
"불국사는 가봤나?"
제르멩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르멩이 그래, 라고 짤막하게 한 마디 하고 나서 나를 바라봤다. 이제, 아무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던 녀석의 눈과 머리카락이 확연히 자리잡기 시작한다. 아마, 저게 뭐 불멸에서 필멸로 내려왔다는 증거라도 되는 모양이지. 모 게임에 나오는 정의의 대천사도 그랬잖아.
"문화유산. 자네도 유산의 뜻이 뭔지는 알겠지. 죽고 나서 넘겨 줬다는 거야."
나는 제르멩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불국사로 시작했지만 다른 걸로 한 번 넘어가보지. 고흐는 아나?"
"이런 망할 놈아. 내가 지구인이고 니가 외계인인데 지금 뭐하자는거야. 니가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이상하지."
이 무슨, 외국 유명인이 비행기에서 내리면서 한국 기자들에게 김치 아냐고 물어보는 상황이냐. 내 말에 녀석이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나서 나를 바라봤다.
"고흐 그림 한 점의 가격이 얼마나 나가는지, 또 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그림을 가지고 싶어하는지. 내가 직접 말할 필요는 없겠지."
그는 말을 마치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몇 번 털었다.
"온갖 조각과 건축물. 그림과 음악. 처음에는 단순한 감탄이었지. 그래, 단순한 감정이었어."
녀석이 말을 마치고 나에게 시선을 던졌다.
"미켈란젤로와 고흐. 모차르트와 베토벤도 마찬가지야. 그 모든 감탄이 나오는 건물과 그림, 음악과 같은 것들을 남긴 당사자는 더 이상 세상에 없어. 그 사람들은 이 세상에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고 하는 안타까움."
말을 마친 제르멩이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했다.
"그래, 그 점을 떠올리고 다시 보니 그제서야... 뭔가 다르게 보이더군. 단순한 감탄의 대상이었던 그 사람들이 남겼던 결과물이, 마침내 완전해지는 기분이었어. 단순한 감탄을 넘어서 내 안에서 피어오르는 무수한 감정들. 결국 세상에 빚어놓은 모든 예술품들은 만든 사람의 죽음과 함께 완성되는거야."
말을 마친 녀석이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기가 막히게 재미있는 이야기지? 자신이 빚어낸 모든 작품들이, 마침내 완성되어 진정으로 빛나기 위해서는 정작 그 당사자가 죽어야 한다니. 자신이 빚어낸 작품들이 최고로 빛나기 시작하는 순간을... 당사자는 절대로 볼 수 없다니."
스스로 말하고도 꽤나 감정이 북받치는 모양이다. 목소리까지 떨리는 저게 감동인지 슬픔인지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다.
"그래서, 필멸을 원했다?"
네가 만든 모든 것들이 네가 죽고 나서야 진정으로 빛을 발할 수 있겠다는 사실을 깨달아서? 내 말에 제르멩이 대답했다.
"뭐, 문제 있나?"
아니 뭐, 네가 좋다면 나도 좋아. 제르멩의 깨달음이 나랑 관련있는 이야기는 아니니까. 일단, 제르멩이 하고 싶어하는 말은 대충 전달되었다. 이 녀석이 굳이 자기가 가지고 있던 불멸성을 집어 던진 이유도... 나로서는 도저히 내릴 수 없는 결정이지만 납득하기는 했다.
거기에 더해서, 결론적으로 제르멩의 저 꺠달음이 결국은 우리와 페넬로페에게도 긍정적인 결과로 귀결되었으니까. 내가 이를 아득바득 갈면서 시비를 걸 이유는 없겠지.
"그래서, 바로?"
내 말에 제르멩이 기절하듯 쓰러져있는 페넬로페를 가리켰다.
"내가 이제 막 이런 몸이 된 거라서 잘 모르지만. 저 정도 상태라면 다들 어렵지 않게 움직일 수 있는건가?"
그건 아니지. 지금 당장 일어나려고 버둥거리다 졸도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인데. 아무래도 조금 더 쉬어야 할 것 같다. 옆에서 뭔 냄새가 나서 살펴보니 서지현이 수프를 끓이는 중이다.
"밥은 하지 마라."
내 말에 서지현이 대답했다.
"피곤해서 못해요. 햇반으로 참아요."
참긴 뭘 참아. 햇반도 데우지 마. 스프 끓이면서 도대체 햇반을 왜 덥히는거야.
"식사인가? 그건 뭐지?"
제르멩이 관심을 보이고,
"이거요? 밥 위에 뿌리는 소스에요."
아 진짜. 도대체 뭘 가르쳐 주고 있는거야. 우리네 삶으로 치면 이제 태어난지 한 5분 정도 지난 어린애한테 제대로 된 식사를 줄 생각은 안하고 대뜸 스프밥을 퍼먹이려고 하네. 큰일나려고. 그러고 보니 그릇도 네 개다.
"페넬로페도 먹이려고?"
내 말에 서지현이 대답했다.
"그럼 저렇게 기운이 다 빠져서 쓰러져 있는데 굶겨요?"
그럴 수는 없지만. 서지현이 슬금 슬금 내 눈치를 보다가 햇반 세 개를 꺼낸다.
나는 에라 모르겠다는 느낌으로 입을 열었다.
"네 개 넣어. 나도 먹게."
내 말에 서지현이 기다렸다는 듯이 햇반을 하나 더 꺼내서 끓는 물 속으로 던져넣었다. 그래, 어차피 기운이 쪽 빨려서 뭐라도 입 안에 밀어넣어야 하는데 스프 따위 밀어넣었다가는 입맛만 버린다. 스프밥이라고 해도 하다못해 위장 속으로 고체를 밀어넣어야 좀 든든한 느낌이 들거 아니야.
그렇게 나와 제르멩, 페넬로페는 인생 처음으로 스프밥을 입 안으로 밀어넣게 되었다. 그래 뭐, 어차피 함께 살게 된다면 둘 다 자기 취향을 어느정도 양보하며 살아야 할 텐데. 스프밥 따위가 대수냐.
"... 김치 있어?"
느끼해. 내 말에 서지현이 별 다른 말 없이 배낭에서 김치를 꺼내주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면 바로 시작하자고."
슬프게도, 찐 곡식 낱알을 스프에 비벼놓은 오늘의 메뉴가 버거운 사람은 지금 이 자리에 나 말고는 없어 보인다. 다들 맛있게 먹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내 입맛이 사실 이상한 건 아닐까 싶군.
"아, 잘 먹었다."
그렇다니 다행이네. 식사를 마친 우리는 제르멩의 안내를 받아 드디어 저 멀리에 보이는 거대한 난파선 안에 자리잡고 있을 코어 쪽으로 향했다.
바닥에 새겨진 작은 홈들을 타고 일정한 주기로 쏘아져나가는 섬광들 서지현이 그 광경을 보다가 작게 감탄했다.
"엄청나네요. 이 정도 마력은 처음 봐요. 마르골리스는 왜 여기에서 마력을 끌어다 쓰지 않은 건지 모르겠는데."
"여기에 모여있는 마력은 다른 곳에 쓰일 예정이었으니까. 점령전에서 상대 언덕에 꽂는 깃발 같은 역할을 할 예정이었지."
나는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
"뭐, 지구 정복 기념비라도 하나 세울 생각이었나?"
내 말에 제르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기념비는 아니고, 많은 역할을 할 예정이었지. 여기에 남은 마력을 전부 끌어다 사용해야 할 정도로."
그래, 그 용도가 뭔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이 마력을 사용하면 지구 시간까지도 싹 다 되감을 수 있을 정도인데. 이걸로 세워놓은 기념비가 어떤 역할을 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행복한 엔딩을 가져다 주지는 않았다는 점은 분명히 예상 할 수 있으니까.
"더럽게 크네."
거대한 문이 눈 앞에 떡 하니 놓여있다. 애초에 난파선에 접근했을 때 그 거대한 크기를 보고 내부가 심상치 않게 거대할 것이라고 예상하기는 했지만 막상 안에 들어와서 거대한 문짝을 보고 있으려니 참 심정이 복잡해진다.
"저 너머에서 뭐가 때려부수고 튀어나오는 건 아니지?"
내 말에 제르멩이 하, 하는 소리를 냈다.
"그렇다면 내가 미리 경고했을거야."
제르멩이 문 주변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뭔가를 누르고. 이내 거대한 소리와 함께 그 육중하기 짝이 없던 문짝이 그그긍 하는 소리를 내면서 열린다. 그리고 그 너머에 보이는 거대한 조타륜. 크기를 보니 사람이 쓰라고 만들어 놓은 건 아닌게 확실하다.
"뭘 해야 하는지는 말해주지 않아도 알겠는데."
조타륜을 지탱하는 거대한 기둥 위에는 수십, 아니 수백개의 파인 흔적들이 또렷하게 남아있다. 그 흔적들을 살펴보던 나는 태극 모양의 흔적을 보고 제르멩을 돌아봤다.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 장난하지마."
지금 이 거대한 기둥에 새겨져 있는 수백개의 흔적 중 저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자그마한 손목시계 모양의 흔적을 찾아내라는 거냐. 왜 씨발, 서울 한복판에서 윌리를 찾게 하지 그래. 내가 인상을 쓰고 있자 제르멩이 입을 열었다.
"어디에 끼워야 하는지 알려줄테니 그 얼굴 좀 풀지 그래."
그 말에 나는 바로 표정을 풀고 자동문처럼 옆으로 비켜섰다. 자, 빨리 가서 알려줘봐. 제르멩이 기둥을 살펴보다가 한 곳을 가리켰다. 내 시선이 그 손의 뱡향을 따라간다.
"아하."
저기 있네.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페넬로페를 바라봤다.
"그냥 올라가?"
페넬로페의 말에 나는 허, 하는 소리를 냈다.
"왜, 그럼 뭐 무등이라도 태워줄까?"
곧바로 서지현이 옆에서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한 마디 한다.
"뭐라고요?"
아니 왜 니가 화를 내고 그래.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 그냥 말이 그렇다는 것뿐이지. 서지현이 나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페넬로페를 바라본다. 순간적으로 페넬로페가 움찔하고 별 다른 말 없이 조타륜을 지탱하는 기둥을 오르기 시작한다.
어차피 손으로 잡을 만한 홈은 많으니까. 계속해서 기둥을 오르는 페넬로페.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나는 고개를 돌려 서지현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내가 찾아가야겠지?"
"그래준다면 고마울 것 같아요."
서지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보건지소에서 꼼짝말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그날 중으로 무조건 찾아갈테니."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늦어져도 괜찮아요. 보건지소 안에서 죽치고 있을테니까. 다른 곳 들렀다 올 생각은 하지도 마요."
"어머니랑 누나는?"
내 말에 서지현이 대답했다.
"어머, 설마 혼자 찾아갈 생각이었던 건 아니죠? 서운하게."
그래, 찾아갈 거면 함께 찾아가는게 맞다고 생각한다.
"그럼, 진보면에서 만난 다음에."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나와 서지현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제르멩이 한숨을 쉬고 말했다.
"뭐, 나에게 할 말은 딱히 없나?"
제르멩의 말에 나는 녀석을 바라보고 말했다.
"나 감방에서 나가는 거 맞지?"
내 말에 제르멩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생활비 좀 보태 줄 수 있겠냐."
"음... 부족하지는 않게 제공해주지. 어차피 대신 차리할 자리가 돈 문제는 없는 녀석의 자리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