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래서 나는 탈옥했다-234화 (234/237)

# 234

시계공

주먹과 발이 공기를 터뜨리는 소리, 칼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 퍼퍽, 하는 소리와 함께 나와 녀석이 뒤로 쭉 밀려난다. 나는 몸에 난 생채기를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손으로 흐르는 피를 훔치며 중얼거렸다.

"뭐, 그럭저럭 싸워 볼 만 하네."

내가 지금 이 정도 급이랑 세 번째 싸워보던가. 결국, 각자 더럽게 사기적인 뭔가를 하나씩 들고 있기는 한데. 그것만 어떻게든 무효화 시키고 나면 서로 싸움을 이어갈 수 있는 수준은 되는 것 같다. 그렇게 쫄 필요 없어. 이 녀석들도 결국 불 맞으면 아프고, 칼 맞으면 죽는 녀석들이야.

- 네 녀석들 따위 때문에 제르멩이 왜 이 힘을 포기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 말에 히죽 웃었다.

"야, 제르멩이 설마 우리만 좋으라고 이랬겠냐."

지금 한 쪽 구석에 누워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제르멩이 무슨 예수 비슷한 인격자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자기가 저런 결정을 내렸다면 분명히 거기에 상응하는 이유가 있겠지. 예술에 미친 놈이니까 그 이유도 당연히 예술이 관련되어 있을거라 생각하는데.

검과 녀석의 손에 들린 조각이 서로 격돌하고 불똥이 팍 하고 튀어오른다.

"지 주인 생각도 잘 모른다는게 참 자랑인가 싶다. 뭐, 그러니까 주인 결정에 반발하며 기어 오르는 거겠지?"

내 말에 꽤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녀석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도형들이 격하게 일렁거리기 시작한다.

- 판단이 잘못되었다면 거기에 따를 필요는 없지!

아하, 니가 그 스카이넷인지 지랄인지 하는 거냐.

확 하고 검에 걸리는 힘이 늘어나고, 나는 거기에 맞춰 힘을 더 밀어넣어주다가, 그대로 다리에 마찰력을 줄이며 옆으로 쫙 미끄러졌다. 녀석이 그 바람에 살짝 몸을 휘청거린다. 마침내 녀석의 목 비슷한 장소로 수확자의 칼날이 떨어진다.

막아내기 위해서 만들어낸 방어벽은 이전처럼 기이한 형상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만큼 급했다는 거겠지. 잔설이 발동하며 만들어진 방어벽을 갈아버리기 시작하고, 그 틈에 유사 제르멩은 급하게 몸을 뒤로 뺐다. 방어벽을 잘라낸 수확자가 허공을 가른다.

"자식이."

녀석이 재빠르게 내 배를 향해 조각을 휘두른다. 이 정도 깊이면 맞아주면 내장까지 닿을 깊이다. 순간적으로 녀석의 코 앞에 폭발이 터지며 녀석의 몸이 크게 휘청거린다.

- 저 년이!

"뭐, 어쩔건데."

서지현은 그 외침에 가운데 손가락을 한 번 올려준 다음 다시 다포체들이 쏟아내는 기기괴괴한 공격들을 막아내기 시작한다. 서지현에게 신경 쓸 여유가 있나봐? 배 쪽으로 수확자를 내지르자 녀석이 뒤늦게 막아낸다.

"날 좀 보소."

녀석이 휘두른 조각의 끄트머리가 내 이마를 살짝 스치고 지나간다. 그대로 허리를 뒤로 젖히면서 발로 올려차자 타격감이 느껴지고 하늘 위로 조각이 떠오른다. 저거에는 하여튼, 무조건 닿지 않는게 좋다.

뒤로 확 물러난 녀석이 땅에 손을 짚자 주변에서 또다시 얼음 얼어붙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린다. 점프 스케어로 느려진 시간 속에서 바닥에서 솟구치는 우주의 풍경을 담은 수정들. 재빠르게 수확자를 휘둘러 도망칠 구멍을 만든 나는 거기로 몸을 던져 빠져나온 다음, 다시 미끄러져서 녀석에게 달라붙었다.

- 망할 자식이.

너는 임마, 뒤질때까지 나랑 이렇게 딱 달라 붙어 있을 팔자야. 놓치지 않을 테니까. 나는 다시 녀석에게 바짝 붙었고, 그런 우리의 뜨거운 관계를 축복하는 것처럼 서지현이 만들어낸 불꽃이 우리를 휩싼다. 녀석의 몸에서 검은 김이 살짝 올라온다.

계속해서, 천천히 깎아내야 한다. 어차피 이 녀석도 짐승의 시간을 염두해 두고 싸우는 중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돌려 깎다보면 언젠가는 큰 틈을 한 번 보이겠지.

파파팍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이 손을 들어올리자 솟구쳤던 수정들이 부서지며 녀석의 몸 주변에서 폭풍처럼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아, 접근을 막아보시겠다?

"모두 계획은 근사하기 마련이지."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휘몰아치는 조각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피할 수 없는 건 막아내고, 막아낼 수 없는 건 피한다. 충분히 해낼 수 있어.

서지현이 자신에게 쏟아지는 검푸른 광선을 막아내며 그 꼴을 보고 있다가 손을 내 쪽으로 뻗었다. 혹시와 만약을 대비해주기 위해서인지, 내 주변에 반투명한 붉은 장벽이 만들어진다. 나는 조각들을 튕겨내고 피하면서 녀석이 자리잡고 있는 폭풍의 눈 안에 도착했다.

"하이고."

더럽게 힘드네. 완전히 피하는 건 불가능해서 온 몸에 잔 상처들이 한 가득 생겼다. 하지만 이 정도는 괜찮아. 그냥 잠깐 기다리면 어떻게든 나을 상처다.

"안녕, 또 왔어."

이 새끼야. 왜 자꾸 나랑 멀어지려고 하는 거야. 이게 그 말로만 듣던 한 발 다가가면 두 발 물러나는 사이라는 건가.

- ...

잘은 모르지만, 녀석의 형체 위에 달라붙어 있는 붉은 눈동자가 성가셔서 미치겠다는 듯이 흔들린다. 꽤 빡친 모양인...

"켁."

퍼억, 하는 느낌과 함께 내 몸이 그대로 튕겨져 나가 슝, 하는 소리와 함께 어지간한 건물 한 채 크기는 될 것 같은 돌덩이에 처박혔다. 등에 아릿한 느낌이 달리고 벽에 파묻혀 있던 나는 내 코 앞까지 날아온 녀석이 주먹을 마구 휘두르는 걸 보고 황급하게 자리를 피했다. 퍼퍼퍼펑 하는 소리와 함께 내가 박혀 있던 돌덩이가 산산 조각나 부서진다.

내가 그 자리에 없다는 걸 확인한 녀석이 연격을 멈추고 몸을 확 돌리며 나를 노리고 손을 뻗는다. 쏟아져 나오는 검청색의 광선이 대지를 갈아 엎으며 내 쪽으로 밀려온다.

"무슨 드래곤볼도 아니고."

지금 이게 뭐 하자는 상황이야. 어지간히 화가 난 모양인데. 그리고 아예 이번 기회에 서지현까지 조지기로 결정을 한 모양인지 다른 손으로는 서지현을 조준하고 마찬가지로 광선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서지현이 피하다가 결국 광선과 정면으로 대치하기 시작한다.

가까히 붙어야 한다.

나는 충실하게 쏟아지는 광선을 피하면서 녀석 쪽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멀리 떨어지면 손을 조금만 움직여도 각도가 크게 바뀌기 때문에 광선을 피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가깝게 붙으려고 하니 쏟아져 나오니 멀었을 때보다 훨씬 더 광선이 격렬하긴하다. 거기에 더해서 여전히 녀석 주변에서 몰아치는 조각의 회오리. 그 잠깐 사이에 더 격렬해졌네.

"여유 있어?"

내 말에 서지현이 잠깐 비틀거리다가 외쳤다.

"그래 보여요? 참 다행이네! 뭐 시킬 게 있나보죠?"

나는 서지현의 말에 외쳤다.

"저 회오리!"

내 말을 들은 서지현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알았어요, 해볼게!"

서지현이 말을 마치자 마자 그녀에게 쏟아지던 광선이 서서히 서지현에게로 접근하기 시작한다. 한 손을 들어올린채로 무릎을 꿇은 서지현이 다소 떨리는 눈으로 자신에게 쏟아지는 광선과 그 광선을 쏟아내는 짝퉁 제르멩을 노려본다.

코피만 나는게 아니라. 저 정도면 얼굴에 있는 구멍이라는 구멍에서는 죄다 피를 흘리는 중이라고 봐야 할 것 같은데. 녀석의 몸 주변에서 회오리치던 조각들에 붉은 기운이 휘감기며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 틈을 노려, 목걸이를 접은 나는 제르멩에게 쏘아져나갔다.

[짐승의 시간 발동]

공기 저항이 방해된다. 몸에 마찰력까지 제로로 만든 나는 총알처럼 제르멩에게 쏘아져 나갔고, 녀석의 눈이 나에게로 향했다.

- 그래. 이럴 거라고 생각했지.

그리고 짝퉁 제르멩의 몸에서 파직거리는 스파크가 튀기 시작하고, 몸을 구성하고 있던 온갖 도형들의 빛이 서서히 바래기 시작한다.

"아그아아아아아악!"

그리고 뒤편에서 들리는 페넬로페의 비명소리.

서서히, 제르멩과 나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한다. 페넬로페가 처리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정도로 힘을 쏟아내 나와의 거리를 필사적으로 벌리는 중이다.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로 전력을 다해 제르멩에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거리가 멀어지는 속도보다, 내가 녀석에게 가까워지는 속도가 더 빠르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녀석의 면상이 보인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했다. 페넬로페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힘을 쏟아내는 중이라 그런지, 녀석의 얼굴이 붙어있는 붉은 안광도 상당히 빛을 잃은 상황이다.

광선을 뿜어내던 손을 멈추고, 녀석이 나에게 손을 뻗었다.

내가 아무리 빨리 달린다고 해도, 나와 제르멩의 사이가 벌어지고 있는 만큼, 그렇게까지 빠른 속도는 아니었다. 결국, 제르멩은 내 머리통을 붙잡는데 성공했다.

- 부서져라!

그리고, 눈 앞이 아득해지기 시작한다. 무수한 숫자와 색깔, 도형이 머리 속에 회오리치기 시작한다. 이해 할 수 없는 개념과 기호들이 머리 속으로 억지로 밀려들기 시작한다.

"어... 윽..."

서서히, 몸 안에서부터 무언가가 쓸려나가기 시작한다. 내가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던 상식과 법칙들 위로 기이하고 괴이한 것들이 해일처럼 쏟아져 들어온다. 내 이성이 버티기에는 너무 버거운 것들. 흐려진 눈으로 몸을 떨던 나는 이를 꽉 악물었다.

거의 다 왔잖아.

으득, 하는 소리와 함께 입술이 이빨로 짓씹히며 비린내와 함께 뜨거운 피가 확 하고 입 안에 퍼진다. 얼굴을 붙잡은 짝퉁 제르멩의 손과 같은 무언가의 틈새로 녀석과 눈이 마주친다. 이 자식도 맛이 가기 일보 직전이다.

서지현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광선으로 억누르고, 페넬로페가 시도하는 시간의 조절을 이겨내며 억지로 거리를 벌리고, 이제는 거기에 더해서 내 머리 속으로 온갖 이해할 수 없는 지식들까지 구겨넣고 있눈 중이다.

지금이라면, 아주 약하기 짝이 없는 공격이라도 먹힐 것이다. 나는 그것 하나만을 생각하기 위해 노력한다.

저 새끼 몸에 수확자를 박아넣으면 되는거야.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아. 그것만 기억하고 있자. 지금은 그것만. 덜덜 떨리는 손이 들어올려진다. 유사 제르멩이 그 모습을 보고 붉은 안광을 한 번 크게 떤다.

- 쓸데없는 행동이다. 해낼 수 있을 것 같냐.

직면하지 않는다. 내 머리 속으로 밀어넣어지는 모든 것들을 무시한다. 떨리는 손에 잡힌 수확자가 서서히 제르멩의 목줄기를 향해 이동한다.

"아.. 그륵."

피가 섞인 게거품이 입에서 왈칵 쏟아진다. 히죽 웃으며 나는 천천히 녀석의 목줄기를 노리고 검을 밀어넣기 시작했다. 녀석의 몸이 크게 한 번 떨렸다. 그리고, 서지현에게로 쏟아내던 광선을 취소하고 자신을 노리고 천천히 움직이는 수확자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렇게 안 둬!"

서지현이 집어던진 에노테르가 연신 폭음을 뿜어내며 고속으로 제르멩의 팔을 노리고 쏘아진다. 시선을 돌려보니, 제르멩을 향해 날아가던 낫이 확 쭈그러드는게 보인다. 또 거리를 벌린 모양이다. 그 순간, 갑자기 제르멩이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압착기 안에 들어간 것처럼 꽉 짓눌려 있던 에노테르가 갑자기 원래의 모습을 되찾더니, 고속으로 쏘아져 나가 수확자를 막으려 들던 짝퉁 제르멩의 팔을 잘라버렸다.

"페넬로페."

슬쩍 보니, 한쪽 눈의 흰자가 완전히 시뻘겋게 변해버린 페넬로페가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수확자가 그 잠깐 사이에 녀석의 목줄기를 파고 든다.

- 안됀다. 이 자식들이! 이렇게 끝날 수는 없어. 나는, 나는!

동시에, 녀석이 나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자신의 머리를 가린채 울부짖기 시작하다가 고개를 돌려 쓰러져 있는 제르멩을 바라본다.

- 왜 이런 짓을 하는 거냐. 나는 영원 할 수 있었잖아. 나는 나를 위해 뭐든지 해왔단 말이다. 그런데, 이걸 이렇게 갚아? 내가 나를 버린다는게 무슨 뜻인지 아냐!

"나에게도 죽음이 찾아 올 수 있게 된다는 거지. 배도 고플테고, 잠도 자야 할 테고. 그래... 또 숨도 쉬어야 할 거야."

말을 마친 제르멩은 그대로 드러누웠다.

- 그걸 알고 있으면서, 애초에 다른 녀석도 아니고 내가 그걸 모를 리가 없는데. 왜?!

그 외침에 제르멩이 대답했다.

"너는 내가 아니다. 마치 나를 너 자신처럼 취급하는 행동은 멈춰."

수확자에 찔린 짝퉁 제르멩의 몸에서 서서히 빛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 영원 속에 갇혀서, 나는 끝까지 너를 조롱하고 비웃을 것이다. 불멸을 버리고 스스로 그런 길을 택하다니. 이 세상에서 격리되었다고 해도 나는 나를 비웃는 것을 멈추지 않을거야. 이 병신 머저리 같은...

빠지지직 하는 소리가 반복되던 와중에, 마침내 짝퉁 제르멩은 자신의 말을 다 잇지 못하고 그대로 존재가 흩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