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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탈옥했다-233화 (233/237)

# 233

시계공

주변 공기를 빨아먹는 살벌한 조각들은 피하는데 성공했지만, 곧바로 다시 페넬로페의 외침이 들렸다.

"그거, 증식해요!"

증식한다고? 왜? 나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중단하고 멀리 떨어졌다. 과연, 마치 대지 위로 곰팡이가 번지는 것처럼 날카로운 조각들이 번져나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내 조각들 주변에 희미하게 붉은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더니, 서서히 분해되기 시작한다.

이런 일을 할 수 잇으려면. 뒤편에서 마력을 운용하는 서지현의 코에서 피가 흐르는 중이다. 어지간히 무리한 모양인데. 살짝 풀린 눈을 하고 있던 서지현이 자기 뺨을 한 번 후려친다.

"서지현의 판단은 어쩔 수 없었어. 안 그러면 저게 우리를 끝장내."

페넬로페의 단호한 한 마디. 그리고 코피를 흘리던 서지현이 손을 살짝 저어서 괜찮다는 신호를 보낸다. 그래, 어차피 피해 없이 이기기는 힘들어 보였지.

까드득, 하는 얼음 얼어붙는 소리와 함께 유사 제르멩의 손 위에 다시 그 우주의 기운을 담고 있는 유리 조각이 만들어진다. 주먹을 쥐자 박살나고, 그 파편이 우리를 향해 날아온다. 물론, 닿는 모든 것들을 먹어치우면서.

"무리하지마."

서지현이 그 유리 조각을 처리하려고 하자, 나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앞으로 나서 수확자를 휘둘러 그 조각들을 튕겨내기 시작했다. 파파팍, 하고 튕겨나간 조각들이 바닥에 박히지만, 이전처럼 공기를 빨아먹지는 못한다. 나는 잠깐 그 꼴을 보고 나서 페넬로페를 바라봤다.

참령으로 막아낼 수 있는데 뭐하러 서지현이 고생한거야?

"방금 전 바닥에 생겼던 조각들에 그 짓 하다가 빨아먹혀서 우주로 가버렸어, 서지현은 미친 여자처럼 울부짖었고."

그럼 할 말 없지. 페넬로페가 살짝 옆으로 자리를 피하자 솟구치는 알록달록한 색깔의 폭발과 함께 그녀가 서 있던 땅이 싹 하고 사라져버린다.

- 어디보자, 이러면 되나.

그 틈을 타서 달리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내 주변이 쭉쭉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동시에 나와 유사 제르멩 사이의 거리가 거의 몇 km 단위로 멀어진다.

이게 뭐야. 당황하고 있으려니 갑자기 내 팔이 기괴할 정도로 쫙 늘어나더니 짝퉁 제르멩의 바로 앞에 자리잡는다. 그리고 녀석이 손에 들고 있는 파편으로 내 팔을 노린다. 지금 일어난 일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보다... 급하게 팔을 옆으로 치우자. 기괴할 정도로 늘어난 팔이 옆으로 이동하며 휘둘러진 파편이 엷은 생채기를 남긴다.

"이런 망할."

회피하자마자 이번에는 내 몸의 가슴 부분이 쫙 늘어나서 다시 휘둘러지는 파편의 궤도 위에 위치한다.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을 하던 나는 수확자를 들고 있는 팔을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손과 수확자까지 쭉 늘어나서 제르멩의 앞에 위치하고, 휘둘러진 파편을 막아내는데 성공한다.

"요술 거울 같은 건가."

다가가려고 하면 공간을 멋대로 잡아늘여 접근하지 못하게 하면서, 자기가 공격 할 때는 멋대로 찌그러뜨려 내 몸의 일부가 자기 앞에 위치하게 만들어 공격한다.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천상 저 녀석이 멋대로 잡아늘이고 줄이는 공간을 순식간에 파악하고, 울며 겨자먹기로 그걸 활용해야 한다.

찡, 하는 소리가 나서 시선을 돌려보니 팔 주변에 뭔가가 일렁거린다. 급하게 손을 빼자마자, 그 일렁거림이 단단하게 굳어버린다. 잘못하면 묶일 뻔했네.

"대충 알겠어."

공간 조종이다 이거잖아.

- 아, 그 발언. 확신 할 수 있나?

쑥 하고 녀석의 머리가 늘어나서 내 앞으로 들이밀어진다. 그 머리통을 향해 수확자를 휘두르자, 수확자가 녀석의 머리통을 쳐올리려는 순간 갑자기 수확자의 칼날이 확 뒤틀리더니 쭉 늘어나 이상한 곳으로 향한다. 본능적으로 이상한 점을 느낀 나는 손을 멈추고 칼날이 향한 방향을 확인했다.

참령의 칼끝은 서지현에게 닿기 일보 직전이었다. 서지현이 눈을 크게 뜨고 자기 턱 아래에 머물러 있는 참령의 칼날을 바라보며 침을 삼킨다.

"하지만."

공간을 멋대로 접고 펴서 사물 사이의 거리를 조종 할 수 있다고 해도 결정적으로 물리력을 가지는게 아니니까. 저 유사 제르멩이 참령과 서지현 사이의 거리를 아무리 좁힌다 해도, 내가 힘을 가지고 찌르기 전까지 서지현이 다칠 일은 없다. 물론, 이렇게 검을 주고 있는 순간에도 내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지만, 서지현은 상처입지 않았다. 나름대로 한계가 있다는 뜻이겠지.

나는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제르멩이 손을 휘두른다. 내 기준에서는 제르멩의 손이 쭉 늘어나 나를 향해 휘둘러지는 것으로 보이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내가 제르멩에게서 전혀 멀어지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거다. 어쩔 수 없이 공격을 막기 위해 수확자를 들어올렸는데...

내 몸에 뒤로 확 빠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

페넬로페가 잠깐 헛구역질을 몇 번 한 다음, 굳은 표정으로 나와 서지현을 보고 말했다.

"대충 알았어. 하지만... 이런 식으로 돕게 되면, 난 이거 말고는 아무것도 못해."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1초에 1m를 가는 물체가 있다면. 1km를 가는데 1000초가 걸리겠지?"

그렇겠지. 나는 페넬로페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지.

"저 제르멩 비슷한 녀석이 물체 사이의 좌표를 뒤틀 수 있다면 나는 트리거 기어를 사용해 시간을 뒤틀 수 있어. 저 개짓거리는 내가 커버할테니, 너희들은 싸움에 집중해."

쉽게 말해서 1초를 1000초로 뒤틀어서, 1초에 1m 가는 물체로 하여금 1초에 1km 이동하도록 만든다는 거다. 반대로, 1초만에 닿을 거리를 1000초가 지나야 닿게 만들 수도 있겠지. 어떻게 보면 거리는 일정 속도로 이동하는 물체가 특정 대상에 도착하는데 걸리는 시간의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으니까.

"진작 사용했으면 나랑 서지현, 둘 다 죽었겠는데."

까놓고 말해서 화살 한 발 날려놓고 방금 전의 비유처럼 1초같은 1000초를 만들어 버렸다면 맞지 않는게 더 힘들었을거다. 내 말에 페넬로페가 다시 우욱, 하는 소리를 내고 다소 충혈된 눈으로 중얼거렸다.

"씨팔, 저 새끼의 개짓거리를 보기 전에는 상상도 못해봤을 방법이야. 미안한데 말 시키지 말아줘. 이거 엄청 힘들... 거든."

페넬로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눈을 감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마구 뒤틀려서 이리저리 움직이던 일그러진 공간이 서서히 원래대로 바로잡히기 시작한다.

"저는 페넬로페를 보호하면서, 지원할게요."

저 유사 제르멩이 우선적으로 노리게 될 건 당연히 페넬로페다. 공방 일체라고 할 수 있는 능력을 무효화 시킨 당사자잖아. 움직일 수 없는 페넬로페에게는 적절한 보호가 필요하다.

"또 내가 전선에 서게 생겼네."

- 참 잘했어요.

녀석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한 손을 들어올렸다. 그의 주변에서 뭔가가 떠올라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한다. 저거 알아.

"정다포체라고 하던가."

4차원 도형이라고 불리는거. 모 영화 떄문에 정팔포체, 영어로 테서렉트라고 하는 정다포체는 꽤 알려진 편이다. 문제는, 바라보고 있으려니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머리 속이 복잡해진다는 점이다. 이해하려고 하지 말자. 젠장, 바라보고 있는 것 만으로도 대가리가 아프네.

나는 슬쩍 페넬로페의 상태를 확인했다.

"좋아, 세이브 로드도 못 쓰게 되었군 그래."

저러고 있는 여자에게 추가적인 지원을 기대 할 수는 없다. 애초에, 공간 왜곡을 막아주고 있다는 것 만으로도 페넬로페는 자신의 역할을 다 했다고 볼 수 있겠지. 원딜 근딜 다 있는데 서포터만 없었으니까. 지금 저걸로도 서포터의 역할은 다 해줬다고 쳐줄 수 있다. 최소한, 아까처럼 피해도 맞아야 하는 개같은 상황은 일어나지 않게 되었잖아.

물론 저 망할 놈의 유사 제르멩은 그런 개짓거리를 하면서도 여전히 멀쩡하게 돌아다니며 우리와 싸울 여력이 충분하지만, 그거야 뭐 애초에 제르멩 힘을 전부 빨아먹은 녀석이라서 어쩔 수 없는 거고.

"최소한 상식 선에서 싸우자는 거지!"

드디어 저 망할 새끼가 휘두른 수확자를 개무시 하는 대신 뒤로 물러나 피한다. 이제야 일방적인 처맞음에서 벗어나 공방을 주고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참 감동적이군.

"표정이 좀 굳었는데."

사실 모른다. 저건 얼굴이 아니거든. 그냥 주변에 떠다니는 이세상 도형이 아닌 다포체처럼 기괴한 도형과 숫자들의 덩어리일 뿐이다. 카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잠깐 무기가 서로 부딪치고, 그 틈에 서지현이 쏟아낸 화염이 나와 짝퉁 제르멩을 동시에 휩쓴다.

"사람이 공격을 하면 아픈 티라도 좀 내봐라 이 자식아."

당연히 나는 서지현이 신경 써줘서 안 아프지만, 그렇다고 너까지 그렇게 멀쩡할 필요는 없잖아. 기이한 다포체에서 흘러나온 빛들이 다시금 녀석을 휘감은 다포체를 형성하고, 서지현이 쏟아내는 화염을 버티기 시작한다.

"으아아아아!"

화악, 하는 느낌과 함께 서지현의 양 손에서 쏟아지는 화염이 점점 더 격렬해진다. 화염을 쏟아내며 질주하는 서지현의 뒤편에서 폭음과 함께 날아온 에노테르가 그녀의 손에 잡힌다. 쾅 소리와 함께 다포체 내려찍힌 에노테르. 그 안에 타오르는 화염.

내 몸과 서지현의 몸에 방어벽이 생겨난다.

거대한 폭발과 함께 대지가 박살나고 바람이 몰아친다. 거의 근방 100m 정도는 개박살 난 것 같은데.

"보호는?"

내 말에 서지현이 다포체를 향해 쉬지않고 낫을 휘두르며 외쳤다.

"최고의 수비는 공격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너 골키퍼 비슷한 역할 아니었어? 뭐 괜찮겠지. 아까 전처럼 멋대로 공간을 쭉쭉 늘이고 줄이면서 순식간에 페넬로페에게 달라붙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들끓는 화염이 자리잡은 거대한 크레이터 안에서, 유사 제르멩의 붉은 눈동자가 우리를 향한다. 방금 전까지 녀석을 보호하고 있던 다포체가 다소 지직거리는 느낌이다.

충격이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군. 그렇다면야. 굳이 쉬면서 회복하라고 할 필요가 없지. 쭉 미끄러져 녀석에게 따라붙은 나는 유달리 지직거림이 심한 장소를 노리고 전력을 다해 칼을 쑤셔박았다. 빠지지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방벽에 금이 가고, 잔설의 발동과 함께 뚫렸다. 방벽이 깨지는 사이에 뭔 짓을 해두었는지 박살나 쏟아지는 파편이 몸을 스치고 지나가며 생채기를 남긴다.

"야, 우리가 먼 사이도 아니고."

가깝게 좀 지내자고. 이 새끼야. 우리가 남도 아니고. 턱주가리를 향해 칼끝을 올려 붙이자 재빠르게 뒤로 물러서며 나를 향해 손을 확 떨친다. 픽, 하는 느낌과 함께 뺨을 타고 피가 흐른다. 뒤편에서 뭐가 서걱, 하는 소리가 들린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의 주먹이 내 배를 때린다. 나도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맞는 일은 없었다. 쿨럭, 하는 소리를 내고 바닥에 침을 뱉은 나는 녀석에게 바짝 붙었다.

"그래, 오늘 한 번 뒤져보자."

바짝 붙자 녀석도 양 손에 작은 조각을 손에 쥐고 코 앞에서 미친듯이 치고 받기 시작했다. 쉬시식, 하는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휘둘러지는 칼과 조각들.

그러면서도 또 서지현에 대한 배려는 잊지 않아서 심심하지 말라고 아까 봤던 그 기괴한 다포체를 띄워놓고 빛인지 뭔지 모를 것들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서지현은 그 공격을 막아내며 내 쪽을 지원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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