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2
시계공
이야기를 듣고 있던 페넬로페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빛내기 시작한다. 하긴, 이쯤 제르멩이 설명했으면 상황을 이해 못하는게 더 어려울 것이다.
"그럼, 내 트리거 기어를 사용 할 수 있는거야?"
제르멩이 페넬로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런 식으로 끼워맞춰지면, 오현석과 서지현을 현 상태로 보존한 채 시간을 되감을 수 있을거야. 다만, 카피라의 유산은 포기해야 할 걸세. 그게 또 무게가 꽤 나가는 녀석이거든."
"혓바닥과 심장 말하는 거지? 필요없어."
내 말에 제르멩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대답 할 줄 알고 있었네. 그럼, 대충 상황 파악을 끝낸 모양이니... 진짜 문제에 대해서 들을 준비도 되었다고 생각하겠네."
제르멩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지팡이를 가볍게 한 번 휘저었다. 우리를 휘감고 있던 사슬이 풀렸다.
"내가 뜯어낸 불멸성은... 자아를 가진 채,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오려 들거야."
즉, 뜯어낸 불멸성은 다시 제르멩의 몸 안에 깃들고 싶어할 것이다.
"그리고 그걸 막기 위해서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격리시켜야 하는데."
나는 그 말에 수확자를 흔들었다.
"이거?"
여기에서 번쩍이는 참령의 존재. 내 말에 제르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거. 하지만 녀석이 곱게 당해주지는 않을 거야. 그 점은 확실히 말해두지."
즉, 싸우게 된다는 뜻이다.
"사실 상 내가 가진 힘의 대부분이기 때문에... 그냥, 나랑 싸우게 된다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어. 당연히, 힘의 대부분을 뜯어낸 나는 자네들을 도울 수 없을테고."
제르멩의 이야기를 다 들은 서지현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전까지 죽일 것처럼 치고 받던 사람과 한 편이 되어야 한다니."
페넬로페가 서지현의 말에 간단하게 말했다.
"싸울 이유가 없어지고, 함께 싸울 이유가 생겼으면 문제 될 거 없잖아."
그래, 원래 적었다가 동맹이었다가 그러는 거지 뭐. 나는 잠깐 제르멩을 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괜찮겠냐."
카피라도 그렇고, 마르골리스도 그렇고. 자기가 불멸이라는 점에 대해서 굉장한 자긍심을 느끼는 모양이던데.
"그 질문 참 마음에 드는 군. 어차피 원하는 대답은 하나 뿐인데 질문을 하다니. 안 괜찮다고 하면 어쩔건가?"
그러게, 쓰잘데기 없는 질문이었다.
"내가 내린 결정이네. 신경 쓸 필요 없어. 어차피 필멸자가 되었다고 해도 죽을 때까지 재벌 3세일 텐데."
나는 그 말에 흠, 하는 소리를 냈다. 물론 제국이 망해서 황제가 왕이 되었다고 해도 대다수의 평민보다는 훨씬 더 훌륭한 삶을 살지만. 황제였던 사람 입장에서는 왕으로 굴러 떨어지면 기분이 참 더러울텐데.
"카피라를 정리하고 나서 밥 먹을 때 이것저것 물어본 이유도 이제야 알겠네."
막상 불멸을 버리려니 이런 저런 궁금함들이 생겼겠지.
"그래서, 진짜 밥 먹으러 올 건가요?"
서지현의 말에 제르멩이 어깨를 으쓱했다.
"일이 잘 풀린다면. 밥 정도는 얻어먹을 만하지 않겠나."
그는 말을 마치고 나서 페넬로페를 바라봤다.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혜택을 많이 보는 사람은 다름 아닌 저 멕시코 아가씨다. 의견을 물어볼 필요도 없다. 동의하지 않을 리가 없지.
제르멩 입장에서는 그냥 결착이 날 때까지 구경하면 되는 걸 굳이 찾아와서 자기 희생까지 해가며 도와주겠다고 하는 거니까.
"그렇게만 해준다면, 잊지 않을게."
"좋아, 그럼 세 명 모두 동의한 걸로 알겠어. 쉬어두게, 어차피 일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니."
말을 마친 제르멩이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눈 앞이 어지러울 정도로 수많은 문양들이 그의 주변에 떠올랐다가, 손으로 빨려들어가기를 반복한다. 나와 서지현은 포션을 꺼내 마시고, 페넬로페에게도 한 병 건네주었다.
"결국 돌고 돌아 제르멩과 싸우게 되는 건 같네."
의미는 약간 다르고, 내가 예상하고 있던 방식은 아니다.
"마르골리스와 비교하면 어때?"
내 말에 눈을 감고 있던 제르멩이 대답했다.
"서로 다르지. 마르골리스는 지나온 과거를 살피고, 그 과정에서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니까. 카피라는 목소리에 힘을 부여해 모든 존재가 의존하는 현재를 흔들어, 좀먹게 하지."
제르멩은 말을 마치고 나서 잠깐 있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불변하는 과거를 활용하는 마르골리스. 의존하는 현재를 활용하던 카피라. 그리고 이해 할 수 없는 미래를 활용하는 나. 뜯어져 나온 나의 불멸과 싸울 때는 이해하거나, 분석하려 들지 말게. 뭐지? 라는 질문이 떠오르면 나름대로 간단한 대답을 내려버리는게 좋을거야. 자네들의 이성에는 한계가 있어. 이해하려들면 망가지겠지."
이해 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고 들면 안된다.
"월드 앵커는 대부분 시간과 관계가 있는 모양이지?"
내 말에 제르멩이 하, 하는 소리를 내고 고개를 저었다.
"카피라는 아직 어려서 월드 앵커를 담당하게 되었을 뿐이야. 시간이 충분히 있었다면 월드 앵커 이상의 것을 담당했겠지. 그리고, 집중해야 하니까."
알았어. 얌전히 닥치고 있을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주저 앉았다.
"돌아갈 수 있다면야 돌아가는 편이 좋겠지."
거기에 덤으로 감방 신세도 면할 수 있다고 제르멩이 확언해두었으니. 문제가 생기는 일은 없을거다. 정말로, 끝이 코 앞까지 다가왔구나. 서지현의 표정을 보니 나만큼 복잡해 보인다. 그야 그렇겠지,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 동안 일어난 일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수많은 일들이 일어났었으니까.
"주기가 빨라졌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제르멩의 몸 주변에 떠오른 마법진들이 손으로 빨려들어가는 주기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마력에 일가견이 있으신 서지현 양의 의견이 궁금한데."
내 말에 서지현이 제르멩 주변에 떠오른 마법진을 보고 한 마디 했다.
"저런거 몰라요. 알고 싶지도 않아. 알려고 해도 이해 못할테고."
서지현은 그렇게 말을 마치고 나서 뭔가를 꺼내 우물우물 먹기 시작했다. 육포다. 나와 눈이 마주친 서지현이 한 조각 나에게 건네주고, 페넬로페에게도 건네주었다. 그렇게 다 함께 말린 고기 쪼가리를 씹고 있으려니 제르멩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우리는 일제히 목젖을 움직여 입 안에 남아있던 말려놓은 동물 시체의 잔해를 넘겼다.
"준비하도록."
서지현이 자신의 몸에 보호벽을 두르고 마력을 끌어모은다. 나는 수확자를 꽉 쥐었다. 페넬로페도 마찬가지로, 시곗줄을 감은 활을 손에 쥔 채로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한다. 근거리 하나에 원거리 둘이면. 결국 내가 몸빵행이구만.
"너를 보호할 필요는?"
내 질문에 제르멩이 고개를 저었다.
"나를 공격하지는 않을거야. 분리된 불명성의 목적은 다시 나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니."
그래, 자기 돌아갈 집을 부수는 또라이는 없지. 제르멩이 머리 위에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옆으로 들었다. 그리고 제르멩의 몸에서 스물거리는 기운이 모자 쪽으로 옮겨가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사라진 것은 모자 아래에서 빛나고 있던 안광이었다. 서서히 희미해지는 안광이 제르멩이 들고 있는 모자 아래에 자리잡는다. 페넬로페가 그 상황을 보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도 해보고 싶은 건 다 해봐. 실패하면 되감고 하지 말라고 말해줄테니."
그거 참 든든하네.
그리고, 제르멩의 몸 안에서 뭔가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온갖... 도형이나 숫자 같은 것들이다. 곧바로 머리가 욱신거리기 시작한다. 단순하게 생각하자. 그냥 뭐 기운 같은 거겠지.
그렇게 빠져나간 기운들이 서서히 모자 아래에 모이기 시작한다.
"..."
세상에 씨발, 저걸 보고 어떻게 의문을 안 품을 수가 있어. 그냥 온갖 도형이랑 숫자 따위들이 대충 엉키고 설켜서 사람 몸뚱아리 비슷한 꼬라지를 하고 있는데! 그 기괴한 형체의 머리 부분에 달라붙어있는 붉은 안광이 우리를 향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언제나 선빵이다. 녀석이 뭔가를 하기 전에 서지현이 끌어모은 마력으로 만들어낸 거대한 화염구가 하늘에서 떨어지고, 페넬로페의 손이 잔상을 남기며 퍼렇게 물든 화살 수십발을 쏟아낸다. 그 틈에 내가 저 유사 제르멩에게 달려들자 페넬로페의 입이 열렸다.
"연체."
내가 달리는 방향으로 쏟아지던 화살들이 느려지고, 서지현이 떨군 화염구가 만들어낸 들끓는 공기도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수확자를 휘두르려 하자 페넬로페가 외쳤다.
"1.3초 뒤, 옆으로 피하면서 휘둘러!"
벌써 한 번 되감았냐. 이 상황에서 피해를 입을 만한 사람이라면, 나 말고는 없다. 페넬로페의 말대로 옆으로 피하며 검을 휘두르자. 내가 서 있던 자리 위로 뭔가가 떨어진다. 저건, 벼락 같은 거라고 생각하자. 당연히 맞으면 개작살 나겠지. 휘두른 수확자는 유사 제르멩의 몸에 닿기 직전 순간적으로 어디론가 슥 하고 칼날 부분이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온다.
- 그렇군.
짝퉁 제르멩이 우리와 쓰러져 있는 진퉁 제르멩을 한 번 확인하고 한 손을 들어올렸다. 손 주변에 착착 휘감기는 이상한 문자들과 그림들.
"야, 피해!"
페네롤페의 외침은 순순히 따르는 편이 좋지. 쭉 뒤로 미끄러져 자리를 피하자 스스슥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칼날이 쏟아지며 짝퉁 제르멩 주변의 대지에 수십개의 흉터를 새긴다. 잘려나간 단면이 매끈하고, 그에 비해 파편은 전혀 튀지 않았다. 어디, 뭐 다른 공간으로 보내버리기라도 하는 건가.
심지어, 공격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뭐 저래.
"아무리 봐도 쓰러져 있는 녀석이 짝퉁 같은데."
그 와중에 허공에 검은 구멍이 열리고 나를 향해 검은 사슬이 쏟아진다.
- 요점은, 네 녀석만 묶어 놓으면 된다는 거지.
"그게 된다면 말이야. 연체."
어디에서 검은 사슬이 튀어나올지 알고 있어다는 듯이 페넬로페가 손을 뻗고, 나를 향해 쏟아지던 쇠사슬의 속도가 확 느려진다. 재빠르게 자리를 피하자 다시 느려졌던 반동으로 확 속도가 붙은 수십 가닥의 쇠사슬이 파공음을 내며 허공을 가르고 지나간다. 저거 묶으려고 한게 아닌 거 같은데. 그냥 쇠사슬로 때려 죽이려고 한 것 같잖아.
"저 사람만 묶어 놓으면 끝이라니. 우리는 뭐 꿔다 놓은 재활용 쓰레기 봉투로 보이나보죠."
그 잠깐 사이에 서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서지현이 페넬로페 앞에 사람만한 크기의 퍼런 화염이 이글거리는 원반이 만들어진다. 페넬로페가 쏟아낸 화살이 푸른 화염의 원반을 통과하고, 기다란 불꼬리를 남기며 제르멩에게 쏟아진다.
- 그럴 걸.
간단한 대답과 함께 날아가던 화살들이 갑자기 밟아놓은 음료수캔처럼 콱 찌그러진다. 그리고, 찌그러진 화살들이 바닥으로 툭툭 떨어진다.
- 카피라는 처음 경험하는 상황에 흥분해서 실수했고, 마르골리스는 벗어 날 수 없을 거라는 방심 때문에 실수했지. 나는 잔재주 안 부린다.
"찌그러진게 아니라 화살이 있는 공간을 억지로 잡아 늘여서 거리를 벌렸어. 어떻게..."
말을 이어가던 페넬로페가 살짝 머리를 부여잡고, 옆에서 서지현이 외쳤다.
"그냥 막은 거면 막은 거지!"
말을 마친 서지현이 손을 움직이자, 시퍼렇게 타오르던 원반이 날아가며 뒤편으로 화염을 쫙 뿌린다. 날아가는 원반이 점점 거대해지기 시작하지만 허공에 만들어진 구멍을 통해 원반을 구성하는 화염이 빨려들어가기 시작한다. 잠깐 그 꼴을 보고 있던 나는 한숨을 팍 쉬었다.
"저 새끼도 그런 부류구만."
자기는 때리는데 남들은 자기 못때리게 하는 이기적인 부류. 저건 방어벽을 쳐서 막아내는 것도 아니잖아. 공격이라는 공격은 죄다 어디론가 훅훅 날려버리면 우리보고 뭐 어쩌라고.
"못 묶어?"
마르골리스는 잘 묶었으면서, 내 말에 페넬로페가 고개를 저었다.
"10분만 더 기다려! 그것보다, 하려던 거 하지 말고 뒤로 빠져!"
피하자, 다리 아래에서 부서진 조각 같은 것들이 막 튀어나오더니, 주변의 공기를 마구 먹어치우기 시작한다. 다이슨 청소기냐?
그 조각 너머에 보이는 건 새까만 풍경에 희미하게 보이는 별빛들. 저거 우주랑 연결된 거야? 그래서 공기 빨아먹는거고? 별 지랄을 다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