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1
시계공
페넬로페가 계속해서 우리에게 화살을 쏴붙인다. 그래, 시간 조종이라 이거지. 그럼 이건 어때.
"온 몸을 타고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아. 숨을 쉬기 힘들어."
내 입에서 말이 흘러나오자마자 페넬로페가 한 손을 앞으로 뻗으며 말했다.
"체불."
주변에 잠깐 시계바늘들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체불이라. 결과를 뒤로 미룬 건가. 아마, 내가 지금 걸어놓은 저주는 우리를 죽이는데 성공하고 나서 받을 생각인 모양이다. 서지현이 뿜어낸 화염이 페넬로페를 향해 쏟아지다가, 서서히 느려지기 시작한다. 그 사이, 페넬로페는 화염의 진행 경로를 피했다. 느려졌던 화염이 느려졌던 시간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는 것처럼 몇 배나 더 빠른 속도로 페넬로페가 없는 허공을 가로질렀다.
그렇게 싸움이 이어진다.
"더럽게 잘 피하잖아."
우리가 어디로 공격할 지 아예 외우고 있는 모양이다. 아니면, 우리가 공격을 시도 할 때 마다 잠깐의 시간을 되감아 공격할 위치를 파악하는 걸 수도 있다. 페넬로페는 우리에게 이렇다할 치명타를 입히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페넬로페에게 피해를 주고 있는 것도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때릴 수 없다. 페넬로페는 개인의 능력치와 장비가 우리보다 빈약해서 공격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우리는 페넬로페가 이미 어디로 공격 할 지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도무지 맞지를 않는다. 애초에, 공격을 시도하기도 전에 이미 그 자리에서 도망치는데 어떡하겠어.
"하악... 하악..."
페넬로페는 숨을 몰아쉬며 입가를 슥 훔치고, 급하게 뒤로 빠진다. 또 저런다. 아주 찰나의 시간만 머뭇거려도 공격에 성공했을텐데. 역시 언제든지 세이브 로드를 할 수 있다는 건 개같은 성능이다.
"이걸로 몇 번째냐?"
내 질문에 페넬로페가 하하, 하고 웃으며 활을 살짝 들어올렸다. 정확히 내가 공격하려고 하던 장소다. 그리고, 계속해서 활의 위치를 이리저리 바꾸고 몸을 움직이며 대답했다.
"축하해, 방금 전에 100회를 돌파했어. 트리거 기어를 모은 다음에 이만큼이나 되돌려 본 적은 없는데."
그것 참 기가 막힐 노릇이 군. 페넬로페가 뒤로 빠지자. 마치 뒤로 빠지기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바닥에서 시퍼런 불꽃이 이글거리는 불기둥이 연달아 솟구친다. 하지만, 페넬로페의 몸에 피해를 주는데 성공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안 지치냐?'
이쯤 했으면 어떤 식으로든 부작용이 있을 수 밖에 없는데.
내 말에 페넬로페는 별 다른 대답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100번이나 똑같은 장면 속에서, 죽기 직전에 벗어나는 행위를 반복하면 사람이 피폐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우리는 되감긴 시간 속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페넬로페는 그 기억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정신력만으로 친다면 나와 서지현에 비견해도 오히려 페넬로페 쪽이 우위겠지. 하긴, 그 정도가 아니면 트리거 기어를 모아서 여기까지 오는 건 엄두도 내지 못했을거다. 그 와중에 페넬로페가 갑자기 옆으로 확 구르고 난 다음, 다소 당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라, 터질 때가 지났는데?"
페넬로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잠깐 주변을 둘러보다가 자기 뺨을 한 대 쳤다.
"아니, 이번에는 조건을 달성하지 못했잖아. 지금 뭐하는거야, 도대체."
슬슬, 자기 자신도 되감겼던 과거를 헷갈리기 시작한다. 시간을 되감은 다음에, 자신이 뭘 준비했었고 뭘 준비하지 않았었는지. 어떤 일에 대비해야 하고, 어떤 일은 대비 할 필요가 없는지. 100번이 넘는 시간의 반복이 불러일으킨 결과다.
계속해서 싸움이 이어지기 시작하자, 이제는 눈에 초점까지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러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몸은 움직여 계속해서 우리의 공격을 피하고, 어떻게든 틈을 노려 우리를 공격하려 든다. 저건 그냥 짐승처럼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거다.
"잠깐만. 너, 지금 몇 초 단위로 되감고 있는거냐."
내 말에 대답이 없다. 입에서 주륵, 하고 침을 흘린 페넬로페가 멍한 눈으로 뒤로 한 발 물러나 화살을 몇 발 쏴붙인다. 우리를 보고 있지 않다. 그냥 기계처럼 움직일 뿐이다. 코 앞에 닥쳐올 죽음을 미리 경험하고, 다시 돌아와서 코 앞에 달랑거리는 죽음만을 가까스로 피할 뿐이다.
이 여자는 그런 단순 행위를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다가 진짜 망가지겠는데. 나와 서지현은 잠깐 눈을 마주치고 뒤로 물러났다.
"싸운지 몇 분이지. 아, 기준시... 기준시간."
페넬로페는 그렇게 중얼거린 다음 휘감고 있던 시계를 슬쩍 확인한다.
"3시간 23분 18초라. 헤, 최고 기록이네. 최고 기록 맞나?"
정신이 나간 것처럼 혼자 중얼거리는 모습은 분명히, 안쓰럽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양보 할 생각은 없다. 그리고, 페넬로페가 멍하니 나와 서지현을 바라보다가 활로 땅을 짚은채 울기 시작한다.
"그냥, 그냥 내가 트리거 기어를 쓰게 해주면 안될까? 부탁할게."
배 아래쪽에서 긁어올린 것 같은 애원이었다. 지칠만큼 지쳐서, 어쩔 수 없이 적대하고 있던 상대에게 하는 애원. 세시간이 넘도록 우리와 싸움을 이어간게 처음이라면, 이 애원도 처음 해본다는 뜻이다.
"시간을 되감아도 내 기억은 남아. 서지현은 간호사고, 오현석은 죄수지? 한국, 진보면! 트리거 기어를 사용하고, 내 남편이 살아돌아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두 사람을 돕겠어. 모자란거 없이, 최대한 행복하게 살도록 내가 뭐든지 해줄테니까. 그러니까... 부탁해. 그만해줘. 내 남편 살리게 해줘. 응? 제발, 그 사람이 살아 돌아온다면 나 뭐든 할 수 있으니까."
그녀는 말을 마치고 나서 나와 서지현을 보다가 외쳤다.
"너희도, 너희도 내 기분 알 거 아니야!"
"알다마다."
나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페넬로페의 외침에 대답했다. 저 여자가 저렇게 필사적인 이유는 이해한다.
"하지만, 당신 행복을 위해서 포기해야 하는 건 우리의 행복이에요."
서지현의 말에 페넬로페가 발악하듯이 머리를 감싸쥐고 울부짖는다.
"트리거 기어, 쓰게 해준다면 내가, 그 이후 두 사람의 행복은 보장해줄게. 뭐든지, 어떤 수단이든지 동원해서!"
"마찬가지 소리를 우리가 할 수도 있다는 생각, 안해봤어?"
내 말에 페넬로페가 침묵했다. 방금 전 페넬로페의 말은 우리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주장이다. 나는 수확자에 박혀 있는 참령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우리가 트리거 기어를 쓰게 해줘. 그 이후 네 행복은 우리가 최대한 보장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트리거 기어를 쓰게 해줘."
이 부탁에 페넬로페가 동의할 가능성은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페넬로페의 부탁에 동의 할 수 없다. 여기에서 우리와 페넬로페,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지독한 싸움이다.
"흐읍..."
페넬로페는 그런 소리를 내며 비틀비틀 활을 들어올렸다. 그때, 땅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린다.
"이건?!"
갑자기 바닥에서 쇠사슬이 솟구쳐 나와 서지현, 그리고 페넬로페의 몸을 휘감는다.
"두 명에게는 3일만 기다려 달라고 했고, 페넬로페 양에게는 제가 돌아올 때까지 기달려 달라고 했던 것 같은데."
사슬에 묶인 상태로 고개를 돌리자, 긴 펠트 모자를 눌러 쓴 남자가 지팡아를 들고 우리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제르맹, 이거 풀어."
내 말에 제르멩이 고개를 저었다.
"조금 있다가 풀어드릴 겁니다."
서지현이 그 말에 마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당장 풀어요, 직접 박살내기 전에."
제르멩이 서지현을 보고 있다가 한숨을 쉬고 지팡이로 땅을 한 번 강하게 짚었다. 그의 주변에 수많은 마법진이 떠오르고, 서지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마력이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한다.
"서지현, 오현석, 페넬로페. 세 분 모두 제 부탁을 한 번 무시했죠. 그러니, 하다못해 5분 만이라도 가만히 있으라는 내 말을 좀 들어줬으면 합니다."
말을 마친 제르멩이 페넬로페의 눈을 확인하고 혀를 한 번 차고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나와 서지현을 바라봤다.
"트리거 기어는 페넬로페의 것을 쓰는 편이 좋겠어."
"누구 맘대로 이 새끼야."
내 입에서 대뜸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서지현도 옆에서 마찬가지로 잔뜩 열이 받은 표정으로 자신을 묶고 있는 쇠사슬 속에서 몸을 뒤틀며 외쳤다.
"카피라 모가지를 따고, 사실 상 마르골리스를 때려 잡은 건 우리야! 페넬로페는 조력했을 뿐이고! 심지어, 너는 일 다 끝나고 우리가 치고 받는데 갑자기 끼어들었을 뿐인 주제에! 네가 뭐라고 그걸 멋대로 결정해?!"
나와 서지현의 말을 들은 제르멩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3일 기다리라고 했지 않나."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내 말에 제르멩이 대답했다.
"나에게도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었고, 정리 할 필요가 있었다는 뜻이지."
"생각은 무슨 처망할 놈의 생각!"
카피라한테 뒤질 뻔하고, 마르골리스가 만들어낸 환상에 고통받았던 내가 듣고 있자니 머리통이 절로 열리는 개소리다. 그리고는 기어와서 갑자기 한다는 소리가, 대뜸 '트리거 기어는 페넬로페의 것을 쓰자' 니가 뭔데. 누가 보면 씨발, 하나님이라도 되는 줄 알겠다?
"포기할 생각."
제르멩은 말을 마치고 나서 나와 서지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 또는 페넬로페. 둘 중 누가 성공해도 내 입장에서는 상관없었지. 애초에 내 목적은 이룬 것과 다름 없었으니까."
우리가 성공해도 제르멩은 이 세상에 남을 수 있다. 페넬로페가 성공해도 제르멩은 이 세상에 남는다.
"문제는 말이지. 나는 비극은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거든."
"요점만 간단히 말해."
내 말에 제르멩이 고개를 끄덕였다.
"페넬로페의 트리거 기어를 사용해 지구의 시간을 되감을 때, 두 사람은 예외로 포함 시킬 수 있네."
"..."
그 말에 나와 서지현은 잠깐 입을 벌리고 제르멩을 바라봤다.
"그걸 왜 이제 말해주는 건..."
서지현의 말을 자르고 제르멩이 다소 짜증난다는 듯한 어투로 대답했다.
"제약이 있으니까. 되감기는 시간에서 예외로 빠져야는 건 나도 포함이야. 그리고, 코어에 접촉한 트리거 기어라고 해도 나와 자네 둘을 모두 온전히 보존한 채로 시간을 되감을 수는 없어. 쉽게 말해서, 용량 초과라는 거지. 엘리베이터로 치면, 과적재로 인해 삐이이,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지 않는 것과 비슷해."
"듣고 있어."
내 말에 제르멩이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쉰 다음 말했다.
"마침내, 들을 준비가 된 모양이군. 어쨌든, 과적재가 문제라면 짐을 덜어내면 될 일 아닌가."
제르멩은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잠깐 침묵하나 싶더니, 다시 다소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약간의 편법이지. 나는 내 불멸성을 포기할 생각이네. 3일의 시간을 달라고 했던 건, 이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 갈등의 시간을 보내고, 불멸성 포기에 대한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이고. 그런데 세 사람 모두 보기 좋게 내 조언을 개무시했지. 신뢰받지 못하는 진심이라는 건 참 슬프군 그래."
3일 뒤에 찾아오겠다고 했었나. 그럼 그때 가서 지금 자신의 결정을 말할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도 당연하다. 그야, 이게 무슨 택시비 계산하다가 이상한 곳에 떨어진 백원짜리 동전 포기하는 것 만큼 가벼운 일이 아니잖아. 그 말에 우리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한참 뒤에,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버린다니?"
내 말에 제르멩이 지팡이를 몇 번 돌리고 나서 내 손에 쥐여진 참령을 지팡이로 가리켰다.
"알겠지만, 참령에 당한 사람들은 트리거 기어를 통해 시간을 되감아도 살아 돌아오지 않아."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시간이 되감기게 될 때, 이미 참령에 당한 사람들의 자리는 텅 비게 되지. 되감긴 세상에서 참령으로 인해 존재가 지워진 자들의 자리와, 그 상실로 인해 모순이 생긴 인과관계는 적당히 다른 것들이 채우게 된다네. 대표적으로 뭐가 있을까. 최현우가 있겠군. 최현우는 참령에 의해 존재가 완전히 격리되었어. 하지만 자네의 누나와 어머니는 그 녀석 때문에 죽은 상황이지. 그렇다면 두 사람의 사인이 다른 걸로 바뀔거야."
교통사고일 수도 있고, 질병일 수도 있다. 최현우가 사라진 채 시간이 되감긴다고 내 누나와 어머니가 되살아나는 건 아니다. 최현우가 아닌 다른 이유로 인해 죽은 걸로 원인이 갈아치워질 뿐이다.
"그리고, 불멸성을 버린 대신... 나는 약간의 편법을 이용해 최현우의 자리에 끼워 맞춰질 생각이야. 그럼 트리거 기어의 부담이 확 줄어들겠지. 자동차로 치면 싵고 가야 하는 짐이 자동차의 부품 중 하나로 변한 셈이니까."
재벌 3세 최현우 대신, 재벌 3세 제르멩으로? 나는 그 말에 멍하니 녀석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