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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탈옥했다-230화 (230/237)

# 230

시계공

눈 앞에서 끊임없이 누나가 괴로워하는 모습이 반복된다. 같은 장면은 하나도 없었다. 내가 알 수 없고 볼 수 없었던 시간들. 누나가 견뎌야 했던 고통뿐인 행군. 그 모든 것들이 끊임없이 재생되며 펼쳐지던 와중.

"...?!"

쩌적, 하는 소리와 함께 눈 앞에 광경이 금이 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눈 앞에 떠오르던 장면들은 그대로 정지된 채, 거미줄 같은 잔금이 시야에 퍼지기 시작한다. 이내, 쩌저적 하는 소리와 함께 무너진다.

"서지현?"

부서져 조각나는 시야, 그리고 그 부서진 시야 너머에 자리잡고 있는 건 초점 잃은 눈을 하고 있는 서지현의 얼굴이었다. 입이 피투성이가 된 서지현이 보인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내 목젖을 간지럽히고 있던 물건은 참령이 끼워진 수확자였다.

"쿨럭."

그녀의 입에서 쏟아지는 피와 함께 이따끔 반짝이는 부서진 조각들. 그 조각들이 반짝이며 비추는 풍경은, 방금 전까지 내가 보고 있던 그 끔찍한 광경의 일부다.

서지현이 쓰러지고, 그 뒤에 보이는 마르골리스의 모습. 그 뒤에 이어진 일은 머리를 통해서 이루어진게 아니라, 일종의 본능이었다. 휘두른 수확자가 마르골리스가 급하게 만들어낸 방벽에 부딪친다.

- 이...!

찰나의 연격과 함께 잔설이 발동된다. 마르골리스의 방벽이 박살나며 녀석이 급하게 뒤로 빠진다.

"어딜 가려고."

후드를 뒤집어쓴 머리에서 끈적이는 액체에 뒤섞인 눈말들이 나를 향해 쇄도한다. 퍼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 덩어리들이 내 몸을 꿰뚫는다. 목걸이 덕분에 통증을 무시한 나는 그대로 수확자를 휘둘러 덩어리들을 썰어내며 마르골리스에게 달라붙는다.

"젠장맞을 새끼가!"

로브에서 눈알이 뒤섞여 있는 검은 액체가 울컥거리며 토해져 나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내 형체를 갖추기 시작한다.

그 형체는 무엇이라 정의 할 수 없었지만, 모든 것을 닮아 있었다. 무엇을 닮았다고 생각하건 그것과 닮아있지만, 동시에 무언가 특정한 사물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 형상. 분노로 눈에 뵈는게 없어진 나도 바라보고 있으려니 몸에 닭살이 돋을 정도의 공포가 느껴진다.

이성과 감성을 전부 쥐어짜 동원해도 이해 할 도리가 없는 거대한 형상이다.

100m? 150m? 고개를 들어올리고 봐도 그 형상을 전부 눈에 담을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다.

"그래도 카피라는 여전히 사람 비슷한 형상이라도 하고 있었는데 말이지."

제르멩이 카피라는 아직 어리다고 했었던 기억이 있다. 다 자라면 저런 몰골이 되는 거냐. 나 같으면 저 꼴이 되느니 그냥 피터팬처럼 영원히 어린애로 남고 싶어 할 것 같은데? 그래서 참령에 당하고 나서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인 건 아닐까.

기괴한 형상으로 변한 마르골리스의 몸에서 거대한 팔뚝이 튀어나와 나를 노리고 휘둘러진다.

"힘이 빠져. 눈 앞의 목표를 놓쳐. 자신이 뭘 하고 있었던 건지 까먹고, 머리 속에 짙은 안개가 낀 것처럼 제대로 생각을 이어나갈 수 없어."

- 그 아이의 재주로 나를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그래? 내 눈으로 보기에 효과는 있는 것 같은데. 착각인가보지."

카피라의 혀를 이용해 흘러나온 목소리는 힘을 가지고, 마르골리스를 구속하려 하지만, 닿지 않았다. 정확히는 막혀버렸다. 내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마르골리스의 몸 주변에서 검녹색의 스파크를 튀기며 짙은 장미향을 흩뿌리기 시작한다. 제대로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지만, 효과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마르골리스의 몸에서 튀어나와 맹렬하게 휘둘러지던 눈알과 검은 액체의 덩어리의 속도가 약간 늦춰진다.

"뭐야 이건?"

째깍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에게 휘둘러진 마르골리스의 주먹이 멈춘다. 팔뚝 주변을 날아다니는 시침과 분침. 그리고 뒤편에서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합류할게!"

이상한 느낌이다. 따로 장비 같은 걸 갖춘 걸까. 분명히 스페인어로 들리는데, 그 의미는 명확하게 나에게 전달된다.

검갈색의 단발과 구릿빛의 피부를 한 여자가 다소 지친 표정을 짓고 있다. 한 손에 들고 있는 고풍스러운 회중시계가 인상깊다.

그래, 저 여자가 딱 봐도 우리에게 시한폭탄을 떨군 멕시코의 갑순이구만. 여자의 뒤에는 여섯 명 정도의 사람이 서 있다.

"고작 저 정도의 숫자라니."

더 많은 숫자를 동원했을 줄 알았는데. 꼴랑 여섯 명이라니 좀 이상한 느낌이다. 제르멩은 분명히 멕시코의 갑순이가 동원 할 수 있는 생존자의 숫자가 우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많았다고 했는데.

"뭐 하고 있어, 그 칼은 장식이야?! 빨리 찔러! 서지현, 너는 방어벽을 만들어서 저 괴물을 둘러싸. 그거라면 270초는 버텨 낼 수 있으니까!"

- 이 자식들이!

마르골리스의 주변을 떠돌아다니던 시침과 분침이 맹렬하게 떨리기 시작한다. 서지현이 그 상황을 파악하고 난 다음 마력을 끌어올려 마르골리스의 거체를 둘러싼 방어벽을 짜올리고, 그대로 짓누르기 시작한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 나는 곧장 마르골리스의 거체로 다가간다. 서지현이 살짝 손을 움직이려 들자, 멕시코 갑순이가 외쳤다.

"아니, 그러지마."

그리고 그녀가 방벽의 한쪽 구석을 향해 작은 수리검을 던진 다음 작게 뭐라고 중얼거린다. 내 귀를 통해 저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 15.7초 뒤, 내가 수리검을 던진 장소의 방벽이 부서질거야. 해당 장소로 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부서진 틈새로 들어가. 지금 보고 있는 덩어리는 본체가 아니야. 진짜 본체는 저 거대한 덩어리의 정수리에 붙어있는 눈알이야. 동공이 검붉은 녀석을 찾아. 휘두르지 말고, 찔러.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시킨 대로 움직였다.

- 지금!

그 외침과 함께 정확히 멕시코 갑순이가 지정한 장소에 구멍이 뚫렸다. 그 갈라진 틈으로 들어간 나는 곧바로 녀석의 몸을 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 3초 뒤, 왼쪽에서 공격. 하나, 둘, 지금.

휙 하고 몸을 틀자 기다렸다는 듯이 수십개의 칼날이 솟구쳐 올라 내가 지나갈 예정이었던 곳을 찌른다. 그렇게, 멕시코 여자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 나는 마침내 정수리에 도착했다.

"15초 남았어!"

"찾았다."

마르골리스가 저항하려고 들었지만, 내지른 수확자가 정확히 녀석의 눈알 중앙을 꿰뚫었다.

- 이게, 이 자식들이! 이대로 끝날 수는 없다!

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끝났어.

다시 한 번, 카피라 때와 마찬가지로 두궁, 하는 진동과 함께 마르골리스의 몸이 떨리기 시작한다.

"지현아!"

내 말에 서지현이 마르골리스의 몸을 둘러싸고 있던 보호벽을 거두었다. 나는 재빠르게 서지현에게 다가가, 그녀를 안아들고 뒤로 쭉 빠졌다. 그리고, 경계하는 눈으로 방금 전에 우리를 도운 멕시코 여자를 바라봤다.

"페넬로페."

내가 질문을 하기 전에, 먼저 멕시코 여자가 입을 열어 자기 이름을 밝혔다. 무슨 질문이 나올 줄 알고 있다는 듯이.

다시, 질문을 던지려고 하자. 페넬로페가 질문이 나오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마르골리스와의 싸움은 이걸로 86번째야. 질문에 대답이 되었어?"

멕시코 여자의 말에 나는 침을 삼켰다.

"너희를 먼저 제거하고 나서 마르골리스를 제거하려고 했지. 전부 실패. 두 사람과 협력하지 않고는 마르골리스를 이길 수 없었어. 그래서... 일단은 협력해서 마르골리스를 죽이는데 성공한 현 시점을 기준으로 계속 시간을 되감는 중이야."

당연히, 앞으로도 계속해서 지금 이 시점으로 회귀할 것이다. 나와 서지현을 이길 때 까지. 페넬로페는 손에 들고 있는 회중시계를 슬쩍 보고는 말했다.

"지금 이 시점을 기준으로 반복된 나와 너희 둘 사이의 싸움은 벌써 71번쨰야."

71번? 그리고도 계속 시간을 되감고 있다는 건, 우리를 죽이는 데에 71번 실패했다는 뜻이다.

"그 정도로 실패했으면 나 같으면 포기할 것 같은데."

거의 가능성이 없는 싸움을 이어가는 거잖아. 내 말에 페넬로페가 하아, 하는 소리를 내고 우리를 바라보며 옆으로 손을 뻗었다. 일렁거리는 공간 속에서, 활자루가 튀어나온다. 그 자루를 꽉 쥔 페넬로페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연다.

"어차피 기억하는 건 나 뿐이니까. 사실, 이 대화도 벌써 30번이 넘어서... 조금 지겨워. 하지만 해야 하는 말이니까. 다시 한 번 말할게."

페넬로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나와 서지현을 노려보며 회중시계를 잡은 왼손에 힘을 주었다.

"내가 이기기 전까지는 지금 이 순간을 무한히 반복할 거야. 언젠가는 이기겠지."

나는 그 말에 손에 쥐고 있는 수확자를 툭 하고 건드렸다. 페넬로페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그래, 그 검에 맞으면 되감아도 소용이 없는 것도 알고 있어. 나와 동행한 생존자들의 숫자가 적은 것도 그 망할 검 때문이고. 원래 데려온 사람의 숫자는 1800명이었어. 그 중에 1500명 정도가 첫번째 시도에서 죽어버렸지."

그리고 계속 싸움이 이어지며, 남은 숫자가 저 정도다. 손가락 열 개로도 셀 수 있을 정도로 적은 숫자. 아마, 페넬로페는 자신이 참령에 상처입을 것 같은 상황이 되면 바로 시간을 되감았을 것이다.

페넬로페는 흘러내린 머리를 뒤로 넘기고 우리를 노려봤다.

"내가 이긴 다음 코어를 이용해 시간을 전부 되감아도,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은 사람들은 돌아오지 못할거야. 너희 두 사람의 이기심 때문에."

나는 그 말에 하, 하는 소리를 냈다.

"누가 들으면 너는 공익 실천을 위해 우리와 대립하는 걸로 알겠네. 죽은 남편을 되살리겠다는 개인적인 목표로 움직이면서."

말은 저렇게 하지만 결국, 페넬로페라고 자신을 소개한 저 여자도 원하는 건 딱 하나 뿐이다.

"하지만, 그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서 수십억의 사람들이 다시 자기 삶을 되찾을 수 있어. 두 명이 희생하면 수십억이 자기 삶을 되찾을 수 있는데!"

나는 그 말을 듣고 바닥에 침을 한 번 뱉었다.

"몇 번이나 되감았다고 했지? 그럼 우리의 대답도 알고 있겠네."

페넬로페가 침을 삼키고 무기를 들어 우리를 겨눴다.

"그래, 시간을 되감을 때 마다 소소한 변수는 계속해서 생기지만 지금 네가 뱉은 그 말 만큼은 결코 변하지 않더라."

안 변하는 사실이 어디 그것만 있겠어.

"네가 패배한다는 결과도 변하지 않아."

"그 대답도 씨팔, 벌써 몇 번이나 듣는지 모르겠어!"

우리는 처음 싸운다. 하지만, 페넬로페는 벌써 몇 번이나 우리와 싸웠다. 우리는 저 여자를 잘 모르지만, 저 여자는 우리를 잘 알고 있다. 불리한 싸움이긴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벌써 우리도 모르는 사이 몇십번이나 저 여자를 이겨먹었다고 한다.

째깍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갑자기 몸이 급격하게 피로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몸에 화끈거리는 고통이 달린다.

"... 이건."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몸을 순간적으로 몸을 살폈다. 상처 너덧 개 정도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중이다. 화살이 박혀서 만들어진 상처 같은 것도 있고, 뭔가에 베인 것 같은 상처도 있다. 하지만, 페넬로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너."

내가 뭐라고 말을 이어가기도 전에 페넬로페가 먼저 당긴 활시위를 놓았다. 수십발의 화살이 나와 서지현을 노리고 쏟아진다.

"5초, 가불."

검을 휘둘러 튕겨내려고 하자, 페넬로페가 작게 뭐라고 속삭인다. 화살의 속도가 확 느려져 수확자가 허공을 가른다.

"지불."

그리고, 다시 느려졌던 화살이 아까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가속해 날아온다. 날아온 화살들은 서지현이 만들어낸 방벽에 맞아 바닥으로 떨어진다.

"..."

저 여자가 시간을 멈추는 건 아니다. 그랬다면 내 목줄기에 화살이 박혀 있어야 정상이니까. 몸의 피로와 피가 흐르는 상처를 고려해보면...

"알았다."

내 말에 페넬로페가 살짝 뒤로 뛰어오르며 나를 향해 화살을 쏘아붙였다.

"3.4초라. 70번째 재시도에 비해 알아차리는게 0.3초 정도 늦었는데?"

재시도 하기 전 우리에게 입혔던 피해를 다시 현재의 우리에게 뒤집어 씌운 거다. 이번에 71번째 재시도라고 했었지. 지금 내 몸을 타고 도는 이 격렬한 피로감과 몸의 상처는 페넬로페가 70번쨰 도전에서 나와 서지현에게 입힌 상처와 피로다. 중첩되는 건 아니다. 70번의 전투 동안 누적되었다기에는 피로는 그렇게 심하지 않고, 상처도 치명적이지 않다.

가장 최근의 한 번, 페넬로페가 재시도 했을 때 입힌 상처와 피로가 우리에게 덧씌워지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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