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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탈옥했다-229화 (229/237)

# 229

코어 다운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이게 네가 할 수 있는 전부냐. 남의 트라우마를 드러내 후비는 거?"

나는 어금니를 꽉 물고 그 광경을 바라본다. 보여주는 의도는 알고 있다. 이걸로 사람 정신을 무너뜨려 보겠다는 건데... 어린애한테나 먹힐 것 같은 개수작을 부리네. 이 광경은 이미 애저녁에 직면하고 있었어.

- 내가 보여 주는 건, 네가 이미 알고 있는 기억 속의 트라우마가 아니다.

내 귀로 들리는 선명한 목소리.

- 너조차도 모르고 있던 것들. 이제부터 시작이다. 그리고, 네 죽음의 선택은 네가 하는 거지.

그리고, 내 목에 뭔가가 닿는 감촉이 느껴진다. 살펴보니, 날이 시퍼렇게 서 있는 칼날이다. 사슬로 사지가 묶여 있지만, 다행히 머리는 그런대로 자유롭다. 하지만, 너무 많이 움직인다면 목에 달린 칼날이 내 목줄기를 찌를 거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 같으면, 나보고 자살하라는 거다. 그럴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 과거로 돌아가보지.

목을 매달고 죽은 누나의 시신과, 방 안의 풍경이 되감기기 시작한다. 마치, 비디오를 되감는 것처럼. 도대체, 뭘 하고 싶은거야. 벽에 붙어있는 달력의 날짜와 년도가 바뀌었다.

... 저 때, 나는 군대에 있었을거다.

- 너희들이 말하는 소위 과거라는 개념은, 시간이 흘러간 흔적이다. 네가 기억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 세상은 자신의 품 안에서 일어난 일을 기억하지. 내가 보여주는 것은 네가 모른채 지나간 과거의 흔적. 본디 네가 알 길이 없던 과거. 즉, 네가 모른채 네 가족들에게 일어났던 사건들. 내가 만들어내는 두려움은 네 기억에 의존하지 않는다.

나는 그 말에 침묵했다. 거짓으로 꾸며내는게 아니다. 되감기는 시간이 멈춘 시점은 정확히 일기장에 써져있던 그 날과 일치한다.

너무나도 익숙한 방, 소파에 누워서 TV를 보고 있는 누나의 모습이 보인다.

- 궁금한 적 없었나? 네가 모르는 사이 네 어머니와 누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두 눈으로 한 번 보고 싶었던 적은? 내가 그 호기심을 해결해주지. 감사 인사는 넣어두라고.

그리고, 시작된다. 방 안에서 TV를 보고 있는 누나가, 휘파람을 불며 달력을 확인한다.

"짜식, 한 달 뒤에 휴가라고 했었지? 어디 보자..."

누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소파에 누워서 지갑을 뒤적거리다 한숨을 쉰다.

"에이 씨, 돈 아껴야겠다."

나는 쇠사슬에 묶인 채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누나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누구세요?"

- 김수현 씨 따님 되십니까? 어머니를 가정부로 고용한 집에서 왔는데, 전할 말이 있어서요.

"아, 잠시만요. 금방 나가요!"

안돼, 나가지마. 열어주지마. 눈에 절로 핏발이 서기 시작한다. 나는 눈을 감았다.

- 의미 없는 행동이다.

그래, 마르골리스의 말대로 의미 없는 일이었다. 눈을 감았다고 생각했지만 소용 없었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시선을 외면해도 그 장면이 통째로 내 시선을 따라 움직인다. 나는, 이 광경을 볼 수 밖에 없다.

- 다들 거짓 환상을 통해 경험하는 두려움에는 잘 저항하더군, 하지만... 모르고 있던 사실과의 대면에서 비롯되는 두려움은? 전혀 별개의 문제지.

눈을 크게 뜬 누나의 입을 누군가 틀어막는다. 으으읍, 하는 소리가 들린다. 열린 문 넘어에서 남자들이 들어온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힌다. 나는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지나간 일이야, 지나간 일이야. 머리 속으로 수없이 되뇌는 와중에 빰을 주먹으로 얻어맞은 누나의 입에서 피가 터져나온다. 쓰러진 누나 위에 남자가 올라탄다. 입이 테이프로 막히고, 옷이 찢어진다. 외면 할 방법이 없는 가운데, 내 눈에 그 광경들이 또렷히 새겨진다.

누나의 일기는 그녀가 당했던 일의 100분의 1도 제대로 적혀있지 않았다. 나는, 비로소 그녀가 당했던 일을 직면하게 되었다.

누나가 반항하자, 녀석들에게 두들겨 맞는다. 입으로 피를 흘리며 누나가 엎드려 울부짖는다. 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들이 엎드린 누나를 끌어당긴다. 반항하는 와중에 누나의 손톱이 바닥을 긁으며 부러지는 장면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몰랐던 사실들, 보고 싶지 않았던 장면들.

"거짓말이야."

환상이다. 이 자식이, 지금 나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일부러 거짓을 보여주는 거다.

- 확신 할 수 있나? 지금 네가 보고 있는 이 장면이, 정말로 네 누나가 과거에 경험한 일이 아니라고?

나는 그 말에 어금니를 꽉 물었다. 심지어, 어쩌면 나조차도 눈여겨 보지 않고 지나갔던 집안의 풍경이 너무나도 선명하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이 장면들이 거짓이라고 말할 용기가 없다.

- 조금 더 가까히서 보는 건 어때? 특등석으로 가자고.

내 몸을 휘감고 있던 쇠사슬이 멋대로 움직여 나를 누나의 코 앞까지 끌고 간다. 터진 입술로 자기 위에 올라탄 녀석을 노려보며 욕을 퍼부으며 발길질과 주먹질을 거듭한다.

- 누나가 입이 거친 편이군.

"닥쳐."

누나의 팔다리가 테이프로 고정된다. 지금 이 상황 속에서, 나는 무력하기 짝이 없다.

이미 지나간 일이기에, 다시 되돌릴 수 없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저, 눈에 핏발을 세우고 이빨을 갈며 그 광경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수 밖에.

***

"그만둬 이 개새끼야!"

서지현은 사지가 묶인 채 눈을 크게 뜨고 오현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핏발 선 눈으로 눈물을 쏟아내며 고함친다. 그가 보는 장면과, 그가 그 장면을 응시하며 보이는 반응. 그 모든 것들이 서지현의 뇌리에 박혀들고, 사람을 미치기 일보 직전까지 몰아넣는다.

- 얼마든지 멈출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네가 해야 하는 일은 딱 하나다. 즉, 네 선택이라는 거지.

서지현의 목에 닿아있는 칼날. 마르골리스는 서지현이 스스로 자기 목줄기에 칼을 박아넣는다면 오현석에게 보여주고 있는 모든 것들을 멈출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설사 그녀가 자신의 목줄기에 칼을 박아넣어서 죽고, 그 대가로 오현석이 저 끔찍한 광경에서 벗어나면 그 다음에는? 오현석은 죽은 그녀의 시체를 보게 된다. 과거의 악몽에서 벗어나 현재의 악몽과 마주하게 하는 꼴이다.

마르골리스가 노리는 것도 그거다. 누나가 자살하기까지의 과정을 미치기 일보 직전까지 본 다음, 다시 돌아온 현실에 기다리고 있는 건 자살한 서지현. 그 지독한 현실 속에서 오현석은 어떤 선택을 할까.

고민이 깊어지는 가운데, 마르골리스가 입을 연다.

- 시간이 꽤 지났군. 저 친구, 벌써 눈이 맛이 가기 시작했는데. 과거가 찝찝한 녀석들은 요리하기 쉽단 말이지.

오현석의 상태가 점점 더 안좋아진다.

"멈춰, 멈춰주세요. 그만해요. 저 사람 저러다 죽어!"

서지현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눈물부터 콧물까지, 얼굴에서 액체란 액체는 전부 쏟아져내리고 있다.

- 길은 하나다. 이미 알고 있겠지.

"누나... 제발. 미안해."

오랜 시간 악을 써서 목이 완전히 쉬어 잠긴 목소리 순간적으로, 자신도 모르게 서지현은 자신의 목 앞에 놓인 칼날에 자신의 목을 살짝 내밀었다. 시큰하는 느낌과 함께 칼날이 목 끝을 찌른다.

"아, 으..."

어떻게 해야 하지, 이 상황에서 지금 뭘 해야 하는 거지.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그 광경을 보며 눈물을 흘리던 서지현의 시선이 자신의 왼손에 끼워져 있는 반지로 향한다.

살갗이 찔린 목에 맺힌 핏방울이 주륵, 하고 피부를 타고 흘러내린다.

이럴수록, 냉정해져야 한다. 눈 앞에서 오현석이 절규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서지현까지 덩달아 미쳐버릴 것 같은 심정에 빠지지만. 그래도, 해서는 안되는 결정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안 죽어.

서지현은 그렇게 속으로 수없이 되뇌었다. 도대체, 그녀의 마력은 어디로 간 걸까. 그리고, 지금 묶여 있는 자신은 정말로 몸이 묶여 있는 걸까?

카피라의 심장이 가지고 있는 마력은 작은 세계 하나를 만들어내고, 유지 할 수 있을 정도로 막대하다. 제 아무리 마르골리스라고 해도 그걸 그냥, 없던 일로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 결정이 느려지는군. 조금 더 수위를 높여볼까. 관찰자 시점 대신, 가해자 시점 정도면 적당하겠군.

그 말에 서지현이 번쩍 정신을 차렸다. 가해자 시점이라니.

"그만둬, 그만둬! 알았으니까, 우리가 졌어!"

- 그럼 해야 할 일을 해라.

서지현이 그 말에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시간이 얼마 없다.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오현석의 흐느낌이 서지현의 귀를 때린다.

"흐극, 흐윽... 미안해, 미안해요."

- 마음에 금이 가는 소리, 무너지기 직전의 성벽이 흘리는 처량한 단말마.

마르골리스의 목소리, 도대체 어디에서 들려오는 거지. 서지현은 절박한 표정을 유지한 채로 입을 열었다.

"죽으면 되잖아... 죽을테니까. 아니, 제발 죽게 해주세요."

- 드디어 결정을 내렸나.

서지현이 몸을 한 번 부르르 떨고. 입을 열었다.

"다만... 한 번만, 얼굴이라도 마주 보게 해줘. 그럼, 미련없이 죽을게요. 그 정도는 괜찮치 않아요?"

마르골리스가 그 말에 흠, 하는 소리를 냈다.

- 나쁘지 않겠군.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자식이 다음에 하려고 하는 행동은 짐작이 된다. 서지현이 죽는 것을 대가로 더 이상 이 기억으로 오현석이 괴롭힘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서지현이 자살을 결정하는 과정을 이용해 다시 한 번 오현석을 괴롭힐 생각이겠지.

그렇다면, 그녀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오현석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자살하는 것 만큼이나 오현석의 마음을 무너뜨리는 광경은 없을 것이다.

"조금만 더... 가까히서 보게 해주세요."

서지현은 오현석과 마주했다.

"미안해 당신. 하지만... 방법이 없었어. 이러면 안된다고 생각하는데, 당신에게 더 큰 상처만 줄텐데."

서지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찬찬히 오현석의 얼굴을 살폈다. 눈의 초점은 흐려진채, 쉬어터진 목소리로 울부짖는 광경이 보인다. 그렇게 한 동안 오현석의 얼굴을 바라보던 서지현이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정말... 정말 미안해요. 나를 용서하지..."

울상을 지은 채 가라앉은 목소리로 애원하듯 울먹이던 서지현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자리잡는다.

"찾았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울먹이던 목소리가 모두 거짓이었다는 듯한 어투로 중얼거린다. 어째서 눈을 감아도 오현석은 저 장면을 봐야 했던 걸까. 왜 서지현은 눈을 감아도 오현석이 절규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봐야 했던 걸까.

눈에 문제가 생겼으니까. 어디까지나 절박한 와중에 찾아낸, 높지 않은 가능성만을 품고 있는 단순한 가설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의존해서 뭐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서지현이 사슬에 묶인 몸을 억지로 뒤틀어 오현석의 눈동자에 자신의 입을 가져갔다. 팔다리를 묶어놓은 쇠사슬이 삐걱이며 그녀의 몸을 구속하지만, 어떻게든 그 정도 움직임은 할 수 있는 틈이 나온다.

그녀는 이빨로 오현석의 한 쪽 눈두덩을 콱 물었다. 문자 그대로, 지금 쥐어 짜낼 수 있는 힘이라는 힘은 모두 짜낸 물어뜯기였다. 앞니 사이에서 눈알이 씹히는 물컹이는 느낌 대신 단단한 느낌이 딱 하고 느껴진다.

그래.

마침내 확신을 가진 서지현이 다시 한 번 있는 힘껏 턱에 힘을 주자 그녀의 입 안에서 뭔가가 빠각, 하는 소리와 함께 부서지고, 박살난 무언가는 날카로운 파편으로 변해 그녀의 입 안을 헤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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