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8
코어 다운
루빅 큐브의 보호막은 최선을 다해 버티려고 노력했지만, 그 노력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마침내, 일렁거리며 서지현이 쏟아내는 광선을 막아내던 방어벽의 형상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좋아, 이 틈에. 나는 곧장 그 방어벽을 향해서 달려들었다. 서지현이 쏟아내던 광선을 걷어내자. 그 튼튼해보이던 방어벽에 뻥 하고 뚫린 구멍이 보인다.
그 사이에 회복이라도 하려는 건지. 시시각각 보호막에 생긴 구멍이 줄어들기 시작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 한 명 통과하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의 크기다. 나는 보호막 안으로 쏙 들어가, 허공에 떠 있는 루빅큐브를 향해 크게 수확자를 휘둘렀다.
까각, 하는 소리와 함게 수확자가 약간 박혀들고 곧바로 검이 빠르게 진동하며 그대로 루빅 큐브를 파고 들어가기 시작한다. 이내, 잔금 하나 없이 깔끔한 형태를 자랑하던 루빅큐브는 그 한쪽 면에 크게 베어진 흔적이 남게 되었다.
"후우."
바닥에 착지한 나는 허공에 더 있던 루빅큐브가 이리저리 스파크를 튀기며 땅으로 추락하는 광경을 확인하고 뒤로 쭉 빠졌다. 아래에 있는 받침대를 박살내며 땅으로 추락한 루빅큐브. 확 하고 회색 먼지가 우리를 한 번 휩쓴다.
"끝."
잠깐 입을 가리고 있던 나는 박살난 루빅큐브를 확인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어때, 교전해 본 감상은?"
내 말에 서지현이 글쎄요, 하는 소리를 내고는 주변을 한 번 훑어봤다.
"별거 없는데요."
그러게 말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다음 구조물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직 세 곳이 더 남았다. 그리고, 마르골리스는 그 전까지는 저 검은 반구에서 기어나올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
첫 번쨰 구조물을 무너뜨리고 나서 이동하고 있으려니, 뭔가 시커먼 덩어리 하나가 우리 앞에 나타났다. 순간적으로 살짝 등에 소름이 돋는다.
"마르골리스."
본 적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대면한 건 아니지만. 이전에 최현우를 한 번 물먹이고 나서 녀석이 남산의 N 타워 속으로 숨어들었을 때 목걸이를 통해 확인했었다.
-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
그 덩어리는 눈알을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나와 서지현을 응시했다.
- 이 세상에는, 이겨낼 수 없는 존재라는 것도 있는 법이다.
나는 그 말에 후우, 하고 심호흡을 한 번 한 다음에 웃었다.
"옘병, 우리가 카피라랑 싸울 때도 그런 생각 하고 있었겠지? 아, 최현우랑 싸울 때도 그런 생각 했었냐? 어차피 니가 이긴다고?"
내 말에 마르골리스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그 점액질의 형체를 바라보다가 수확자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씨알도 안 먹힐 너절한 협박은 접어두고, 목이나 닦고 기다리고 있어. 조만간 멱 따러 갈테니."
수확자가 마르골리스의 분신 위로 떨어진다. 토막난 점액질이 바닥으로 떨어진 다음, 점성을 잃고 검은 액체로 변했다. 나는 수확자를 다시 칼집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우리는 차근차근 하나씩 저 검은 반구를 유지하고 있는 구조물들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가. 서지현이 머리를 쓸어넘긴 다음에 나를 보고 말했다.
"힘을 아끼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간이 꽤 많이 지났어요."
그래, 한 10시간 정도 지난 것 같다. 우리가 공격을 이어가기 시작하자 마르골리스도 우리 쪽으로 계속해서 괴물들을 보냈다. 물론 큰 어려움 없이 제거 할 수 있었지만, 덕분에 시간이 질질 끌리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여기에서 10시간이라면, 밖에서는 100시간이 지났겠지. 그럼 나흘 정도 경과한 시점이다.
"멕시코 여자가 신경쓰이나봐?"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일주일이에요. 우리가 앵커 브레이크를 시도해서 성공하는데 걸렸던 시간을 생각하면."
우리의 인생에 시한부 폭탄을 붙여놓은 멕시코 갑순이가 여기에 도착 할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 아가씨 좋은 일 시켜 줄 수는 없지."
슬프게도, 코어는 하나 뿐이다. 즉, 멕시코의 갑순이가 앵커 브레이크를 마치고 나서 코어로 진입한다면 우리와 같은 장소에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제르멩이 만들었던 루빅큐브 네 개 중 세 개를 부수는데 성공했다.
우리가 다 요리했는데 갑자기 슥 하고 멕시코 아가씨가 달려들어서 막타를 치고 트리거 기어를 발동시킬 가능성도 생각해야 한다. 나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막타충 극혐이야."
"이미 도착해서 저 검은 반구 주변에 숨어있을 수도 있어요. 저 검은 반구 주변에서 인기척을 조사해보죠. 남아있는 하나는 그냥 제가 힘 한 번 크게 써서 방어막 째로 작살낼게요."
그래, 마지막 남은 하나는 그렇게 처리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하지만.
"남아있는 구조물과 반구 사이의 거리가 제법 되는데, 가능하겠어?"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당사자가 괜찮다고 하면 할 수 있는 거겠지. 나와 서지현은 곧바로 반구 주변에 다가가서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2시간 정도의 정찰이 끝나고, 나는 결론을 내렸다.
"... 별 다른 인기척은 없어."
"좋아요, 그럼 시작할게요."
서지현은 손을 들어올리고 살짝 얼굴을 구긴 채 호흡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으로 인해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먼지가 확 일어나 요동치기 시작한다. 그렇게 3분 정도 지났을까.
"참나."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하늘을 바라봤다. 지랄 맞을 정도로 거대한 크기의 불덩이가 이글거리며 허공 위에 떠 있었다. 저 정도면 작은 태양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잠깐 비틀거리던 서지현이 이내 자세를 바로잡고 들어올렸던 손을 아래로 내렸다.
허공에 떠 있던 무지막지한 크기의 화염구가, 그 손짓에 맞춰 제르멩의 루빅큐브가 자리잡고 있을 장소로 유성처럼 쇄도해 작렬한다. 솟구치는 버섯구름과 요동치는 대지, 귀청을 박살내는 굉음.
"하아, 하아..."
숨을 몰아쉬던 서지현이 자기 입가를 슥 훔쳤다.
"파괴된 것 같죠?"
그렇겠지, 파괴되었겠지. 저걸 맞고 멀쩡하게 유지 될 수 있는 구조물이 세상 어디에 존재하겠어. 제 아무리 핵방공호 세상 없어도 저거 맞았으면 그대로 안에 들어있는 사람들이 생으로 파묻힌 무덤이 되었을거다.
굳이 확인할 이유도 없다. 우리가 등지고 있던 거대한 검은 반구가 천천히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점점 얇아지고, 점점 연해진다. 그 검은 반구는 마치 선팅한 유리처럼 그 반구 안이 비쳐보일 정도로 얇아졌다.
그리고, 이내 완전히 사라졌다.
"더럽게 크네."
반구가 사라진 자리에 세워져 있는 건 난파선을 닮은 무언가였다. 뱃머리는 하늘 높이 솟구쳐 있고, 절반 정도 되는 나머지 부분은 땅 아래에 파묻여 있다. 붉은 빛이 도는 검은 선박의 선수상은 거대한 문어의 형상이었고, 그 문어에게서 뻗어져 나온 수많은 다리들이 배를 휘감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이었다.
"바라보고 있기 참 신경 사나운 형태..."
말을 마치기 전에, 난파선에서 시커먼 기운이 넘실거리며 솟구쳐 드넓은 하늘을 뒤덮는다. 동시에 나와 서지현을 압박하는 지독한 존재감에 나와 서지현은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어둡으로 휩싸인 밤하늘. 떠 있는 무수한 눈동자를 닮은 입들이 우리를 응시한다.
- 살아서 돌아갈 거라 생각하지 마라.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붉은 광택을 흘리던 난파선에서 꿀럭이는 소리와 함께 시커먼 액체가 쏟아져 나와 대지를 적신다.
"씨팔."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고개를 휘휘 흔들었다. 제르멩이 전달해준 오르골로 적응했다고 해도, 버티기 어려울 정도의 압박감이다. 카피라의 존재감이 마치 물리적인 힘을 가진 것처럼 사람을 짓눌렀다면, 마르골리스의 존재감은 뇌 속을 휘젓고 다니는 격렬한 공포감이라고 표현 할 수 있다.
스스로의 눈알을 뽑아버리고 싶을 정도의 공포.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떻게 다시 경험하게 되었다.
"인사라도 좀 하지?"
서지현은 힘에 부치는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쏟아진 액체로 시커멓게 물든 난파선 주변의 땅에서 뭔가가 부글거리며 형상을 갖추기 시작한다. 녹슨 검과 먼지 투성이의 홀을 쥐고 있는 무언가다. 얼굴은 뒤집어 쓰고 있는 잿빛 로브 떄문에 보이지 않는다.
"카피라는 하다못해 케이크라도 먹이고 싸웠다 이 개새끼야."
너는 손님 대접하는 자세가 글러먹었구나.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수확자를 꺼내들었다.
- 그 아이는 방심했고, 아직 어렸지. 하지만 나는 아니다.
그리고, 주변에서 넘실거리던 검은 액체에서 다시금 수천, 수만개의 눈동자가 떠올라 우리를 응시한다.
- 공포를 마주해라.
"그렇게 오글거리는 대사는 어디에서 주워온거냐. 공포를 마주해라, 란다. 쪽팔린 줄 알아야지."
서점에서 따로 그런 대사 모음집이라도 파는 거냐. 왜 저러는걸까 소름끼치게.
- 그 입을 다물어라. 나의 이름은 마르골리스, 우리들 중 가장 오래된 자. 네 녀석들이 털투성이 몸으로 동굴 속에 숨어 돌이나 두들기고 살던 시절부터 세상의 법칙과 흐름을 이해했다.
"세상에, 그 나이 먹고 고추는 서요?"
서지현의 말에 마르골리스는 별 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녀석의 주변에서 흘러나오는 존재감이 더 강해졌다.
"하, 질문에 대답이 없는 건, 좀 무례하다고 생각하는데."
서지현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루빅큐브의 방어벽에 거대한 빵꾸를 뚫었던 그 강렬한 붉은 광선이 마르골리스를 향해 쏟아진다.
- ...
부글거리던 벽이 꿈틀거리며 일어나고, 수백개의 눈알이 서로 뒤엉켜 거대한 크기의 눈알이 된다. 그리고, 그 거대한 눈동자의 동공이 쩍 하고 열리며 이빨을 드러낸다. 서지현이 쏟아낸 이글거리는 붉은 광선은 활짝 열린 동공이 먹어치우기 시작한다.
검게 뒤덮힌 하늘과 땅은 모든 지형을 먹어치운다. 그리고 검게 변한 세상에 무수히 많은 눈동자만이 한가득.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의 존재감. 나는 수확자를 뽑아들고 마르골리스에게 달려들었다. 바닥이 끓어오르기 시작하고, 거대한 벽과 함께, 내 몸을 물어뜯기 위해 그 끔직하게 생긴 눈동자들이 몰려든다.
"뭐가 이렇게 많아...!"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숫자의 눈알들이 우리를 응시한다. 점점, 두통이 심해지며 시야가 하얗게 점멸하기 시작한다. 귀에 울려퍼지는 환청과 함께 전신의 감각이 둔해지기 시작한다. 마취제로 목욕이라도 하는 것처럼 둔감해지는 감각.
그리고, 순간적으로 돌아온 내 시야에 가만히 서 있는 마르골리스가 보이고, 이내 흐려진다.
- 내 이름은 마르골리스, 관철하는 눈동자. 지금 이 순간, 네가 모르고 있던 공포를 마주하라.
그 소리를 끝으로 둔해진 감각들이 하나씩 돌아온다. 그리고, 하얗게 변했던 시야도 다시 정상으로 돌아온다. 나는 다시 몸을 움직이려고 했지만, 움직이지 않는다.
"쇠사슬이라니."
고작 이딴 걸로? 나는 사슬에 묶인 몸에 힘을 꽉 주었지만, 사슬은 단단하게 고정된채 꿈쩍도 하지 않는다. 시선을 들어올리자 보이는 건 시신이었다.
"..."
나는 침을 삼켰다.
"하, 이건."
파랗게 질린 얼굴과 길게 나와 있는 혀. 잔뜩 부른 배. 찢어진 옷 사이로 보이는 배에는 보기에도 지독한 피멍. 죽은 누나의 다리 사이에서 흘러내리는 양수가 섞인 피. 머리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어떤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