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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탈옥했다-227화 (227/237)

# 227

코어 다운

눈에 힘을 주고 반구를 노려보고 있던 서지현이 하아, 하는 소리를 내고 내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최현우가 남산에 만들어 놓았던 반구랑은 내구도가 차원이 달라요."

"그 말인 즉슨, 못 부술 것 같다는 소리야?"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아요. 하지만 부수기 위해서는 마력을 굉장히 많이 써야 할 것 같은데... 제 도움 받지 않고 승리할 자신 있어요?"

"아니, 없어."

서지현의 도움은 필요하다. 무식하게 힘으로 박살내려고 한다면 못 부수는 건 아니지만, 박살내는데 성공한다고 해도 그 다음에 서지현의 도움을 받기 힘들다면 본말전도가 따로 없다.

"입구가 따로 있지 않을까? 아니면 저 반구를 유지해주는 뭔가라도 있을것 같은데."

우선 그것부터 찾아내야 한다. 찾아야 하는 물건이 있을 때 언제나 유용하게 사용하던 물건이 있기는 하지만.

"아껴둬야지."

마르골리스와 싸우게 되면 좋든 싫든 짐승의 시간을 발동시키며 결착짓게 될 거다. 그리고 짐승의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는 목걸이의 발동은 아껴두어야 한다. 천상, 목걸이의 도움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저 반구 안으로 진입하는 입구, 또는 저 검은 반구를 유지하게 하는 원동력을 찾아내야 한다.

"흐읍."

서지현이 그런 소리를 내고 발을 한 번 크게 굴렀다. 희미한 아지랑이가 서지현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간다. 새로 배운 기술인 모양이다. 잠깐 눈을 감고 있던 서지현이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나를 바라봤다.

"저 반구와 연결되어 있는 구조물이 네 개 있어요."

네 개라.

"통로 같은 거야?"

내 말에 서지현이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거기까지는 확인 할 수 없어요. 탐색 범위가 넓은 대신 자세한 정보는 알려주지 않는 기술이라."

어쩔 수 없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배낭에서 노트를 꺼내 건네주었다.

"한 번 그려줘."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하늘에서 뭐가 퍼덕거리는 소리를 내며 우리 쪽으로 몰려온다. 엄청나게 커다란 까마귀들이다. 대충 봐도 사이즈가 경비행기 급은 나올 것 같은데.

눈깔이 여섯 개 정도 달려있고, 깃털은 피에 젖어있고, 발톱에는 살점이 엉겨붙어있는 까마귀들이다.

가오, 까오,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날개를 퍼덕이던 녀석들이 세 쌍의 눈동자를 우리에게 향한 채 크게 한 번 울었다.

"기록하고 있어봐."

서지현이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까마귀가 정력에 좋다고 하던데. 몇 마리 잡아서 먹는 건 어때요?"

서지현의 말에 나는 하, 하는 소리를 내고 그녀를 바라봤다. 정력이라.

"여기에서 더 정력이 좋아지면 받아낼 자신은 있어?"

"아니요,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정력 감퇴 효과가 있는 고기는 없으려나."

그런 건 줘도 안 먹을거다. 많을수록 좋은게 정력인데, 굳이 고기까지 먹어가면서 줄여야 할 이유는 없잖아. 하늘을 날아다니던 녀석들이 우리를 노리고 급강하기 하기 시작한다.

"말이 급강하지."

불쌍할 지경이다. 나는 녀석들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몸이 무거워. 날갯짓 한 번 하기도 힘에 벅차."

고속으로 우리를 향해 쇄도하던 녀석들이 그대로 행동을 멈추고 힘겹게 날갯짓을 하기 시작한다.

"어쭈, 버텨?"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녀석들을 살펴봤다. 저주에 나름대로 면역이라도 가지고 있는 건가. 하지만, 완전히 떨쳐내지는 못하고 가까스로 날갯짓을 반복해 허공에 떠있는게 고작인 모양이다. 수확자를 뽑아들고 뛰어오른 나는 허공에 검을 휘둘러 궤적을 만들었다. 그 궤적을 박차고 쏘다여 나간 나는 허공에서 가까스로 몸을 추스르고 있는 까마귀들의 몸통을 밟고 돌아다니며 칼질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칼을 휘두를 때 마다 덩치만큼이나 커다란 까마귀 깃털이 사방으로 흩날리기 시작한다. 한 사십 마리 정도 되던 까마귀들이 전부 하늘에서 요격당해 머리통이 날아간 채 바닥으로 처박힌다.

눈알 세 쌍이 박힌 까마귀들을 다 처리하고 내려오자, 서지현이 바닥을 가리켰다.

"짜잔, 다 그려놨어요."

지도를 확인해서 알아낼 수 있는 사실은 간단했다. 뭔가, 뭔가가 있기는 한데 그 배치는 저 검은 반구를 중심에 둔 채, 정사각형의 형태를 띄고 있다. 서지현이 음, 하는 소리를 내고 자신이 땅바닥에 그린 지도를 감상하는가 싶더니 입을 열었다.

"통로라면 네 장소 중 하나만 방문해도 될 테지만."

글쎄다. 그건 너무 상황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거 아니야?

"세상 어떤 바보가 자기 요새로 들어 갈 수 있는 통로를 네 개나 만들어 두겠어."

"역시 그렇죠?"

서지현의 말에 나는 잠깐 턱을 쓰다듬고 나서 말했다.

"하지만, 네 개 중에 하나만 무너뜨려도 저 검은 반구가 무너질 가능성도 있어."

내 말에 서지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만화영화에 나오는 얼탱이 악당들이나 할 법한 실수 아니에요? 마르골리스가 무슨 로켓단도 아니고."

그래, 방금 전 서지현의 발언과 마찬가지로 너무 긍정적인 가정이라고 생각한다. 마르골리스가 바보도 아니고, 침입자 친화적인 구조로 이 코어 너머를 꾸몄을 리는 없으니까.

"서두르자고."

시계를 보니 벌써 3시간이 지나있다. 그렇다는 말은, 밖에서는 벌써 하루 하고도 6시간이 지났다는 뜻이다. 아주 잘 되가네, 안 그래도 마음이 제법 급했었는데 여기에 들어오고 나서는 마음이 10배로 급해지는 기분이다. 서지현이 내 표정을 보다가 손을 잡았다.

"신속하게 움직여야 하지만, 마구잡이로 서두를 수는 없어요. 알죠?"

고개를 끄덕인 나는 후우, 하고 숨을 쉰 다음에 자리에서 일어나며 엉덩이를 털었다.

"이동하자. 먼저, 시계방향이 좋아, 반시계방향이 좋아?"

"저는 반시계방향이요."

좋아, 그럼 네 개의 구조물은 반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하나씩 처리하도록 하자. 첫번째 목표 주변에 도착한 나는 하늘로 올라가서 구조물을 살펴봤다. 거대한 루빅큐브가 허공에 뜬 채로 계속해서 이리저리 회전하며 맞춰지고 있었다.

"제르멩 작품이네."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 지는 몰라도 그건 내가 100% 장담 할 수 있다. 그야, 저 루빅큐브 색깔 구분이 없이 모든 칸이 검은 색이다. 저럴 거면 루빅큐브를 맞추는 이유와 의미가 없잖아. 어떻게 돌려도 항상 색깔은 다 맞춰져 있을텐데.

"저런 건 퍼즐이라고 할 수도 없잖아."

그리고, 그 루빅큐브 앞에 서 있는 괴물이 인상깊다. 딱 봐도 한 싸움 하게 생긴 친구다. 덩치도 거대하고, 피부에는 허연 뼈다귀 같은 가시들이 듬뿍 솟아난 채로 입에서는 연기가 섞인 불티를 푹푹 뿜어내는 꼴을 보아하니 대충 뭐 저 이상한 큐브의 수호자 정도 되는 느낌인데.

하늘에서 내려온 나는 서지현에게 내가 본 것을 전해주었다.

"그렇군요. 언제 만든 건지는 알 수 있을까요?"

혹시라도 제르멩이 최근에 그 선물을 해준 거라면 우리로서는 이후에 도저히 제르멩을 믿을 엄두가 나지 않으니까. 이미 사이가 틀어질대로 틀어진 관계에 선물을 주고 받을 이유는 없잖아.

서지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허공에 떠 있는 루빅큐브 아래에는 커다란 받침대가 있는데, 거기에 글귀가 적혀 있었어."

길이 남을 원정을 기념하며. 라는 문구였다.

"그럼, 이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만들어진 구조물이라는 뜻이네요."

그래, 제르멩을 의심 할 만한 이유가 없다.

"좋아요, 수호자 비슷한 녀석 하나와 그 이외에 자잘한 것들 한 무더기라고 했었죠?"

나는 서지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거기에 덤으로, 구조물 자체를 지키는 걸로 보이는 보호막도 있었어. 야생감각으로 살펴봤는데, 마력으로 작동하는 보호막은 아니야."

"저런, 그럼 그냥 때려 부숴야 한다는 뜻이네요. 아쉬워라. 그럼, 제가 큰 거 한 방 날릴게요. 이후에 당신은 리더로 보이는 괴물을 상대하고, 나머지 자잘한 것들은 제가 처리하죠."

계획을 정했으니, 움직일 차례다. 나와 서지현은 곧장 구조물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 네 녀석들이군!

우리를 발견한 녀석들이 전투 준비를 한다. 온갖 종류의 괴물들이 괴성을 지르며 우리를 향해 이를 갈며 손톱을 짤각거린다. 나는 녀석들을 보고 히죽 웃었다.

"불법 건축물은 철거 대상이야. 반항하지 말고 순순히 건물 철거에 협조하면 살려보내 줄 수도 있는데."

내 말에 대답을 하는 괴물은 당연히 하나도 없었다. 나와 서지현을 향해 우르르 밀려드는 수백의 괴물들. 두 명과 수백 마리가 서로 격돌한다. 서지현이 살짝 하늘에 떠오른 채로 손을 앞으로 뻗었다. 시뻘건 광선이 서지현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다.

그 온도가 얼마나 되는지는 구체적으로 짐작 할 수 없지만, 이따금 쏘아지는 광선의 궤적에서 벗어나 날름거리는 거대한 화염 줄기들을 보면, 저기에 닿았다가는 숯 한 조각도 남기지 않고 녹아내릴 것이 자명하다.

"막아?"

서지현은 꽤나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시커먼 갑주를 걸쳐입고, 너덜거리는 잿빛 망토를 두른 거대한 기사가 방패를 앞세워, 그 공격을 막아내는데 성공했다. 물론, 방패는 그 공격을 막아낸 것 만으로 시뻘겋게 달아올라 녹은 금속을 바닥에 뚝뚝 흘리고 있지만.

- 흐으...

"힘드냐? 편하게 해줄까?"

그렇게 중얼거린 나는 녀석을 향해 검을 휘두르며 말했다. 시뻘건 쇳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달궈진 방패 위로 수확자가 때려박힌다. 뒤이어 잔설이 발동되며 방패는 물론이고, 그 방패르 쥐고 있던 손까지 날름 잘라낸다. 팔과 함께 방패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불티를 사방으로 뿌리고, 나는 녀석과 얼굴을 마주했다.

잔설이 발동된 상태로 수확자로 팔이 잘린 괴물은, 그 기세 등등하던 모습과는 다르게 빠르게 그 형체가 흩어지기 시작한다. 덜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녀석이 입고 있던 갑주에서 검은 기운이 줄기줄기 흘러나와 흩어진다. 그리고, 주인을 잃은 갑옷이 의미 없는 고철이 되어 그대로 바닥을 구른다.

다음은, 우리에게 달려드는 수백의 괴물들.

"지치고 힘들고 괴로워. 서 있는 대지가 떨리고, 다리는 힘이 풀리고, 머리가 어지러워 구역질이 나."

혀 끝에 달리는 아릿한 고통. 우리를 향해 몰려드는 괴물들이 괴로운 표정을 짓는다.

"하, 이거 물건이란 말이지."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도대체 우리가 카피라를 어떻게 이긴건지 의문이 들 정도다. 저주에 대한 대항책을 챙겨오지 않았다면 뭐 한 번 해보지도 못하고 저 녀석들처럼 무력화 되었을거다.

그 사이 녀석들 싹 쓸어낼 생각이었던 나는 순간적으로 몸을 확 틀어야 했다. 허공에 뜬 채로 차르륵 하는 소리를 내며 맞춰지고 있던 루빅 큐브에서 나를 노리고 끝을 날카롭게 깍아낸 돌기둥을 마구 날리기 시작한다.

"망할 자식. 지가 만들었으면 하다못해 해제 코드 같은 거라도 알려줘야 할 거 아니야."

해제 코드 같은 건 따로 만들어 두지 않았나? 쏟아지는 돌기둥에 손을 뻗은 나는 그대로 몸에 힘을 주었다. 쿵, 하는 느낌과 함께 약간 몸이 밀린 나는 기둥을 꽉 쥔 채로 빙글, 하고 뾰족한 부분을 내가 아니라 카피라의 저주에 고통받는 괴물들 쪽으로 돌린 다음 집어 던졌다.

쒜에엑, 하는 소리와 함께 날아간 돌기둥이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하는 녀석들을 후려치고 지나간다. 계속해서 나를 노리고 쏟아지는 돌기둥들.

"굳이 막을 필요는 없겠지."

서지현은 별 다른 표정 변화 없이, 자신을 노리고 쏟아지는 돌기둥을 하나하나 폭발로 박살내며 구조물을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한다.

"확실히, 마력으로 작동하는 보호막은 아닌 모양이네요."

말을 마친 서지현이 에노테르를 어깨 위에 걸친 채로 말했다.

"저 루빅큐브, 방어막 째로 날려버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할까요."

"힘은 아껴. 방어막만 부수고 나면 내가 처리할게."

낭비 할 이유가 없다. 어차피 보호막을 부수는 데에만 성공하면 내가 접근해서 순식간에 요리 할 수 있다. 이후에 뭐가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바로 전력투구를 시도 할 필요는 없지.

"알았어요."

말을 마친 서지현이 다시 아까처럼 시뻘건 광선을 구조물을 향해 쏟아내기 시작했다. 양 손에서 쏟아져 나온 광선이 순식간에 구조물을 지키는 방어벽에 때려박히고, 파바바박 하는 소리와 함께 방어막과 광선이 충돌한 곳에서 이글거리는 거대한 화염 덩어리들이 비처럼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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