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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탈옥했다-225화 (225/237)

# 225

휴식

현명한 대답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잠깐 사이 머리를 굴린 나는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말 나온 김에 지금 한 번 해볼까? 내 나이면 맞선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겠지만."

내 대답을 들은 서지현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여기까지 온 사이에 무슨 소개팅이에요."

"그러지 말고, 오늘 하루 할 것도 없잖아."

내 말에 서지현이 음, 하는 소리를 냈다.

"그래서, 그런 자리에 나온 남녀는 보통 만나서 뭘 할까요?"

나는 서지현의 말에 잠깐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글쎄, 보통은 뭐 서로 물어보거나 하지 않아?"

내 말에 서지현이 그런가, 라고 말하고는 걸음을 멈추고 무슨 생각을 한 건지 한강변에 있는 버려진 카페 쪽으로 혼자 달려간다.

"지현아?"

"5분 있다가 들어와요!"

나는 다소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달려가는 서지현을 보다가 시킨 대로 5분 정도 기다린 후, 그 카페로 따라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건 깨끗하게 정리된 카페 안 테이블 앞에 앉아 기대감에 찬 눈으로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서지현이었다.

제법 구색을 갖춘다고 테이블 위에는 깨끗하게 닦은 찻잔에 믹스 커피 두 잔이 김을 피워올리고 있다. 뭐, 내용물이 믹스 커피인 건 어쩔 수 없지.

"...?"

도대체 뭐지. 하는 생각과 함께 다가가니 서지현이 아, 하는 소리를 내고 조심스러운 어투로 입을 열었다.

"혹시..."

혹시는 무슨 얼어죽을 놈의 혹시야. 나는 뭐라고 한 마디 하려고 하다가 이내 대충 속셈을 알아차리고 나서 잠깐 입맛을 다시고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오현석입니다."

내 말에 서지현이 웃으면서 마주 인사를 한다.

"서지현이에요."

이 나이 서른 중반 처먹고 하는 소꿉놀이 비슷해 보이는 소개팅 역할극은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잠깐의 침묵 끝에 커피를 한 모금 홀짝인 후 내가 질문은 굉장히 정석적인 접근 방식이었다.

"좋아하는 음식이 뭐에요?"

"사탕이요."

서지현의 말에 나는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보통은 좋아하는 음식으로 사탕은 잘 안 뽑을 것 같은데. 단 음식을 좋아하나보네요."

"그런 건 아니고... 예전에, 굉장히 크게 충격을 받았을 때 우연히 먹게 된 거에요. 그때부터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힘들 때 단거 들어가면 또 기가 막히죠."

"그러니까요."

뭘 하는 건지, 이게 소개팅이 맞기는 한 건지. 도대체 어쩌다가 우리는 이런 역할극을 하고 있었는지 그런 질문들이 머리 속을 스쳐지나가고 있기는 하지만 의외로 하다보니 재미가 있을 것 같아서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아, 간호사셨구나."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현석 씨는?"

나는 그 말에 음, 하는 소리와 함께 잠깐 고민하다가 순순히 대답했다.

"탈옥수입니다."

"흐읍..."

내 말에 서지현이 잠깐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참은 다음에 작게 후우, 하고 숨을 내쉰 다음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요? 와! 저 탈옥수이신 분은 처음 뵙는 것 같아요. 신기해라."

"큽."

이젠 내가 웃음을 참을 차례였다. 뭐 저렇게 태연하게 되받아? 잠깐 심호흡을 한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대답했다.

"간호사 일은 어때요, 안 힘든가요?"

내 말에 서지현이 아아, 하는 소리를 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목구멍이 원수라고들 하잖아요. 별 도리 있나요. 그래도 저는 보건지소에서 일하니까... 다른 간호사들에 비해 좀 괜찮은 편이에요. 가끔 성희롱 하는 아저씨들이랑, 쓸데없이 수액 맞겠다고 고집부리는 할아버지들만 잘 처리하면 되거든요."

성희롱이라.

"원래 근무하시는 곳이?"

"진보면이에요."

나는 그 말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신기하네요, 제가 탈옥한 교도소도 그 근처에 있거든요."

"어머, 정말요?"

그리고는 서로 눈빛을 마주치며 키들거리고 있던 와중에 서지현이 입을 열었다.

"혹시, 소개팅은..."

"이번에 처음이에요."

내 말에 서지현이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는 그렇구나,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따로 이상형 같은 게 있나요?"

"글쎄요... 굳이 있다면."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심지가 강한 여자였으면 좋겠어요."

"힘든 일도 많고, 괴로운 일도 많은데 그래도 계속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면 좋을 것 같아요.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집을 나가고 말겠다, 라는 결정을 내리고 실천할 정도로 행동력도 좋고, 힘든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버티는 생활력 있는 여자면 더할 나위 없겠고."

서지현이 내 말에 잠깐 입을 다물고 있다가 침을 한 번 삼키고 말했다.

"그, 잡초같은 여자를 좋아하시나봐요?"

"글쎄요, 잡초라기보다는 야생화라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 말에 서지현이 살짝 시선을 피했다.

"덤으로 전직 간호사면 더 좋겠네요. 서지현 씨는 어때요, 이상형이 있나요?"

내 말에 서지현이 대답했다.

"많이 연상이었으면 좋겠어요. 저보다 한 열 살 정도 맞은 남자. 턱 만지먼 막 깎은 수염이 느껴지고, 막 씻고 나서 안고 있으면 살짝 비누 냄새도 나고. 말하지 않고 서로 잠깐 눈 만 마주쳐도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어쩐지 모르게 알 것 같은 사람."

어떻게 이야기가 흘러가다보니 서로를 칭찬해주는 시간이 되어버린 것 같다. 이제 나와 서지현은 상대와 어떤 식으로 만났으면 좋겠는지와 같은 의견을 공유하고 있었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만났던 상황이나 그 이후에 보내온 시간들을 되새김질 하는 느낌이었다.

"조금 흔한 전개일수도 있지만, 제가 위험에 빠져있는데 누군가 다가와서 구해주는 거에요. 그 뒤에 우연히 하룻밤을 보내는데, 의외로 상냥하고, 의지가 많이 되는 사람인거죠. 그래서 자꾸 눈길이 가고..."

시간이 지나면서 어렴풋해진 기억의 조각들을 다시 꺼내 부지런히 문질러 광을 낸다.

나와 서지현이 함께 경험했던 일이지만, 이렇게 마치 다른 사람 이야기 하는 것처럼 꺼내놓기 시작하니 참 여러가지 의미로 새롭게 느껴진다.

한 동안 카페에서 그런 이야기를 나누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배고프지 않으세요? 벌써 점심 먹을 시간인데."

자리에서 일어나자 곧바로 서지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는 카페를 나섰다. 그리고, 이걸로 역할극은 끝내기로 정했는지 서지현이 내 옆으로 와서 팔짱을 낀다.

"어땠어?"

"제법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소개팅 해본 적 정말 없는 거 맞아요? 굉장히 자연스럽던데."

"아 없다니까. 게다가 소개팅 한 번도 안 나가봤으면서 내가 자연스럽게 소개팅을 한 건지 아닌지는 어떻게 알아?"

"일리있는 지적이네요. 좋아요,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까 그냥 믿어드릴래요."

나름대로 결정을 내린 서지현이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얌전히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다른 역할극도 해볼까요?'

꽤나 재미있었던 모양이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대답했다.

"선후배는 어때?"

"싫어요. 차라리 목에다가 밧줄 걸고 번지점프를 하고 말지."

칼로 잘라내는 것처럼 단호한 대답이었다.

"대학생활이 즐겁지 않았던 모양이네."

내 말에 서지현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대학생활이라기보다는 생존기라고 부르는 편이 좋을 정도로 처절했었거든요. 공부하고 일하고의 반복이었으니까. 사실 대학생활이 뭔지 대학 다니면서도 도무지 모르겠던데요."

뭐, 싫다면야 별 수 있나. 이후로는 딱히 역할극을 한다기 보다는 이런 저런 잡담을 하는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일부러 나와 서지현은 마르골리스에 대한 이야기는 피하고 있었다. 한 마디라도 나온다면 나와 서지현은 또다시 그 일에 몰두하게 될 테니까. 그래서야 쉬는게 아니잖아.

"아하하하하하!"

식사를 마치고, 서지현은 그런 소리를 지르며 나와 함꼐 한강 둔치에 버려져 있던 오리배를 타고 질주 중이었다. 우리는 페달 같은 너절한 거 밟지 않는다. 머리를 배 밖으로 내민 서지현이 뒤를 향해 화염을 폭풍처럼 뿜어내는 중이었고, 그 반발력을 이용해 오리배는 제트스키처럼 질주하고 있었다.

질주하는 오리배와 함께 서지현의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휘날린다.

한 3분 지나자 오리배 하나가 그 열기를 버티지 못하고 뒤편이 녹아내리며 물이 들어차기 시작한다. 뭐야, 온도 통제 안하고 그냥 뿜어낸 거였어?

그렇다면, 3분이나 버틴 것도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멀리에서 누군가 우리의 오리배 시승 장면을 바라봤다면, 거대한 오리가 불똥을 싸며 한강을 질주하는 것 같은 광경을 감상 할 수 있었겠지.

"뭐해요? 빨리 옮겨 타요!"

그렇게 말하고 서지현이 훌쩍 뛰어서 다른 오리배로 옮겨타 내 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새로 갈아탄 오리배도 3분을 버티지 못하고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리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

"후아."

그래도 네 번째 오리배는 서지현이 한강의 고속 질주에 다소 질리면서 그 질긴 목숨을 조금이나마 더 연장 할 수 있게 되었다. 한 바탕 불꽃의 질주를 마친 서지현은 끼릭거리는 페달을 느긋하게 돌리며 기지개를 한 번 켰다.

"그러고 보니, 날이 더 추워지면 설날이 오겠네요. 지금부터 뭔가 따로 준비를 해야겠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시어머니랑 형님 상에 치킨너겟 같은 걸 올릴 수는 없잖아."

"아직 한 서너 달 남았잖아. 그리고, 지금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치킨너겟이 상에 올라가도 너그럽게 넘어가 줄 것 같은데."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미리 준비하려고 들면 지금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구색은 맞출 수 있지 않을까요."

마음만으로도 고마운 이야기지. 하지만.

"그 전에 결혼식은 올려야 할 거 아니야."

내 말에 서지현이 살짝 입을 벌리고 있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맞다, 그걸 까먹고 있었네요. 뭐, 사실 결혼식이라고 할 만한 게 있을까 싶어요. 초대 할 만한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고."

뭐, 대충 인연 닿고 연락 닿는 사람들 모아서 우리 결혼해요! 라고 선언한 다음에 모두 보는 앞에서 키스하고 온 사람들한테 식사 대접하고 그러면 되는거지.

"혼수 값이랑 집값은 안 들잖아?"

파는 사람도 없고 돈도 없으니 그냥 주변에서 아무거나 막 주워와서 마음에 드는 곳에 자리잡고 꾸미면 될 거다.

"매력적인 조건이네요."

말을 마친 서지현은 페달을 밟다가 말고 나한테 기대왔다. 서지현이 먼저 움직였는지, 내가 먼저 움직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서로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렇게 날아가듯 시간이 지나가 저녁은 금방 찾아왔다. 뽀로로 형님의 말이 맞았어. 역시 노는게 제일 좋아. 시간이 어떻게 지나간건지 모를 정도였다.

"새삼스럽게 창피하네요."

키스를 마친 서지현이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혀로 자기 입술 주변을 낼름 핥는다.

"술은 다 깼어?"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점심 먹기 전에 다 나았었는걸요."

오리배에서 내린 우리는 다시 남산으로 향했다. 딱히 이렇게 하자고 정해놓은 것은 아니었지만, 오리배에서 내리는 행위가 나름대로의 기준점이 되었다.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자정에 출발할까요."

그러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그 게이트를 통해서 들락날락 할 수 있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거의 없다고 봐요. 그 시커먼 구멍 딱 봐도 일방통행으로 보였거든요."

카피라에게서 뜯어낸 혓바닥이 마르골리스에게도 먹힐까. 하긴, 먹히겠지. 카피라가 월드 앵커라고 하지만 당당하게 마르골리스와 제르멩을 이름으로 불렀다는 건 그녀의 힘이 어느정도 녀석들에게도 먹힌다는 뜻이다.

게다가, 이제 사실 상 포인트를 얻을 구석이 없어진 판국에 마지막으로 확보한 아이템이 마르골리스에게 통하지 않는다면 보상 시스템이 그냥 우리를 엿먹일 생각이었다는 것이 증명되는거다.

분명히, 어느정도 효과를 기대 할 수는 있을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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