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4
휴식
다음날, 일찍 일어나서 이빨 닦고 세수하고 있으려니 텐트에서 유령이 심연에서 기어나오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의 주인이 누군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어차피 텐트 안에는 나를 제외하면 한 명 밖에 없었고, 그 사람이 어제 학살한 소주병의 숫자는 참담할 정도였으니까.
텐트에서 알콜 살인마가 비틀거리며 기어나왔다.
"으윽."
부스스한 머리로 잠깐 비틀거리며 인상을 쓰고 머리를 짚고 있는 서지현. 나는 배낭에서 냉수와 꿀을 꺼내들었다.
"마셔."
"아, 고마워요."
서지현은 꿀물을 받아서 들이키고는 고개를 휘휘 흔들며 다시 낮게 신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너무 마셨던 것 같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타준 꿀물을 마저 비운 다음 샤워를 하러 갔다. 안색이 썩 좋아보이지는 않던데. 북엇국이라도 해줘야 하려나. 국을 끓이고 밥을 짓고 있으려니 서지현이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비비며 다가왔다.
"신난다."
"달걀이 없다는 점이 아쉽네."
내 말에 서지현 고개를 저었다.
"원래 이런 건 있는 재료로 대충 만드는게 제맛이에요."
말을 마친 서지현이 바로 식사를 시작한다. 보통 술을 많이 마셔 숙취가 심한 날에는 입맛이 없기 마련인데, 서지현에게는 별로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순식간에 식사가 끝나고, 나와 서지현은 상점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짐승의 시간 - 급상승 : 짐승의 시간을 발동시키는 순간, 곧장 현재 당신의 감각 능력치가 감당 할 수 있는 한계까지 육체와 체력 능력치를 끌어올립니다. 발동 종료 후 부작용은 (감각 능력치 + 유지 시간)/10의 공식을 따릅니다.]
[짐승의 시간 - 연착륙 : 짐승의 시간 발동 종료 후 부작용이 획기적으로 줄어듭니다.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 없던 기존의 부작용과는 다르게, 부작용이 유지되는 시간 동안 모든 능력치가 35% 하락하는 선으로 완화됩니다.]
그렇군. 나는 애매한 표정으로 짐승의 시간의 마스터 선택지를 살펴봤다. 언제나 그렇듯 둘 다 괜찮아 보이는 한편, 둘 다 조금 애매해 보이기도 한다.
"어차피 강력한 한 방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발동 이후 부작용으로 모든 능력치 35% 감소는 뭐라고 해야 하나. 뭔가 수치가 좀 애매하다. 큰 리스크라고 하기에는 감소되는 능력치의 폭이 그렇게 커 보이지는 않고, 적은 리스크라고 하기에는 또 35%라는 숫자가 커보인다.
"그렇다고 급상승을 고르자니, 부작용이 강력하고."
지금 내 감각 능력치를 고려해보면... 발동한 다음, 한 방 먹이고 나서 바로 해제한다고 해도 최소 25초의 시간 동안은 꼼짝없이 탈진을 견뎌내야 한다. 서지현이 내 이야기를 듣고 나서 대답했다.
"급상승 쪽이 나을 것 같은데요."
서지현의 말에 나는 음, 하는 소리를 냈다. 서지현은 그릇에 남아있는 북엇국을 쭉 들이킨 다음 입가를 훔치며 말했다.
"생각해봐요, 다른 녀석과 싸우는 것도 아니고 마르골리스와 싸워야 하는데. 탈진해서 손가락 하나 꼼짝 못하는 것과 모든 능력치 35% 하락은 별로 다를 것도 없잖아요? 짐승의 시간을 발동시켰는데 마르골리스에게 치명타를 입히지 못하면..."
볼 것도 없이 죽겠지. 어차피 전력으로 싸워도 승산을 장담 할 수 없는 상황인데 거기에 더해서 35%의 능력치 리스크까지 받게 된다면 부작용이 완화되었다고 해도 죽는 건 똑같다.
"어차피 실패하면 교수형이 확정인데, 한 방에 목 뼈가 꺾이는 대신 질식사를 선택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서지현이 말하고자 하는 취지는 이해했다.
"하지만, 대량의 적이 몰려오는 상황에서는..."
내 말에 서지현이 검지로 내 입술을 톡 하고 건드렸다.
"카피라의 혓바닥이랑, 제가 있잖아요."
그래, 대량 살상이라고 한다면 내 자신의 능력보다는 카피라의 혓바닥을 이용한 저주와 서지현의 마력 지원이 훨씬 더 효과가 좋다. 내가 거기까지 생각하며 스킬을 안배 할 이유는 없다.
"알았어."
나는 서지현의 조언을 충실하게 받아들여 급상승을 선택했다. 식사를 마친 서지현이 설거지를 하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중이다. 상점을 살펴보는 모양이지. 잠깐 옆에서 바라보고 있으려니 허공을 바라보는 서지현의 눈이 이리저리 움직인다.
나도 아직 포인트가 남아있기는 하다. 일단, 포션도 충분히 준비해야 할 테고, 그러고도 포인트는 꽤나 많이 남아있다. 그렇다고 마구 낭비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나는 일단 기존에 확보한 스킬들부터 차근차근 강화하기 시작했다.
남은 건 급발진, 야생감각, 흐릿한 존재. 찰나의 연격. 나는 그것들을 강화시키면서 하나 하나 마스터 선택지를 고르기 시작했다.
[급발진 - 무도회 : 육체에 무리를 주지 않고 최고 속력에 달하기 위해서는 원래 일정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당신의 몸은 효율적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육체가 낼 수 있는 최고 속력에 도달하는 시간이 55% 감소합니다. 다리를 활용하는 움직임에 한정해, 제약 없이 원하는 속도를 낼 수 있습니다.]
[찰나의 연격 - 강타자 : 한 번의 공격 기회에 두 번의 공격을 자연스럽게 이어넣을 수 있습니다. 원래 낼 수 있는 위력의 250%를 발휘 합니다.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승리를 쟁취하세요.]
[야생감각 - 범놀이 : 맹수가 순간적으로 함정을 피하는 건, 덫의 작동원리를 알기 때문이 아닙니다. 본능적으로 위험하다는 걸... 그냥, 느꼈기 떄문이지요. 알 수 없는 위험을 피하는데 이해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마법이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당신에게 위협이 될 만한 요소와 이후 벌어질 일에 대한 결과를 짐작 할 수 있게 됩니다.]
[흐릿한 존재 - 신기루 : 움직이는 동안, 당신의 형체는 흐릿해집니다. 흐릿해진 동안 유도되는 기술로는 당신을 제대로 맞출 수 없습니다. 피해를 주기 위해서는 당신을 정확하게 겨누어야 할 것입니다. 적은 당신을 조준하는 대신 당신의 신기루를 조준하게 됩니다. 신기루를 알아채기 위해서는 5초의 응시가 필요합니다.]
"음흠흠."
잠시 뒤, 나름대로 결정을 내린 모양인지 서지현이 다시 휘파람을 불며 설거지에 집중한다. 내가 고르는 동안 서지현도 다 고른 모양이다.
"얼마나 남았어?"
내 말에 서지현이 푸후, 하는 소리를 내고 어깨를 으쓱했다.
"여태동안 배운 것들 싹 정리하고 나니까. 남아있는 포인트는 그렇게 많지 않아요."
나도 마찬가지다. 배우려고 한다면 뭔가 하나를 더 배울 수 있을 것 같지만. 일단 지금 당장은 상점에서 썩 마음내키는 물건이 보이지 않으니까.
"이틀이나 남았네요."
그러게, 아직 이틀 정도는 더 쉴 수 있을 것 같다. 잠깐 멍하니 앉아서 숲을 바라보던 서지현이 입을 열었다.
"제르멩, 믿으세요?"
서지현의 말에 나는 음, 하는 소리를 냈다.
"내가 믿는 사람이 딱 둘이야. 나랑 너."
물론 제르멩이 우리에게 이런 저런 도움을 많이 준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도움들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우리를 이해시키는데 성공하기는 했다. 하지만, 나와 서지현이 사람 입에서 나오는 말을 곧이 곧대로 믿어주기에는 너무 각박하게 살았거든.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제르멩은 3일 정도는 쉬어도 괜찮을 거라고 말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3일을 전부 쉬어야 할 이유는 없다. 아마 저 말을 하고 싶어서 그 전에 제르멩의 신뢰 여부에 대해서 물어본 거겠지.
"물론, 나도 서두를 수 있다면 서두르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잠깐 내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그래도, 오늘 하루만 더 쉬면 안될까요?"
나는 서지현의 말에 허허허 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숙취로 머리가 뱅뱅 돌고 있을텐데. 그 딱 봐도 불길해 보이는 시커먼 구멍 속으로 들어가려고?"
지금 몰골이라면 네가 게이트 타고 코어로 가다가 토해도 놀라지 않을 걸.
용기는 가상한데, 그렇게 똑똑한 생각은 아닌 것 같아. 게다가, 기껏 큰 일을 성공했는데 꼴랑 한 나절 쉬고 다시 움직이는 건 아무리 그래도 너무 가혹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내 대답을 들은 서지현이 기지개를 한 번 쭉 켠 다음에 나를 바라봤다.
"그 구멍 안에 들어가면, 마르골리스만 기다리고 있지는 않겠죠."
"카피라랑 싸울 때 확인했었잖아?'
마르골리스도 자신의 졸개들을 한 가득 그 코어인지 뭔지 하는 물건 주변에 잔뜩 배치해 두었을 것이다. 우리가 카피라에게서 생겨난 게이트를 타고 도착하게 된다면 최소한 카피라와 싸울 때 맞이해야 했던 괴물들, 또는 그 이상의 숫자가 되는 괴물들이 우리를 맞아주겠지.
"칙령이 남아있었다면 좋았을텐데."
물론 나와 서지현이 카피라를 격리시키고 얻게 된 장비라면 충분히 밀려오는 괴물들을 상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서지현과 나는 다소 피로가 쌓이는 것을 감내해야 한다. 칙령을 아껴두었다면 여기에서 사용할 수 있었겠지만.
"아쉬워 할 필요 없어. 써야 해서 사용한 거잖아?"
거기에서 사용하지 않고 버티려 들었다면 나랑 서지현은 사이좋게 싸늘한 주검이 되어 인천 앞바다를 떠도는 넋이 되었을거다.
"그렇죠."
그리고 한동안 침묵.
서지현이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으후, 하면서 내 뒤편에서 안겨들었다.
"아무것도 안하고 놀아 본 적 있어요?"
나는 서지현의 말에 대답했다.
"교도소 독방에서는 언제나 아무것도 안하지."
내 말에 서지현이 픽 웃고 뒤편에서 나를 안은 채 말했다.
"좋아요. 그럼, 교도소 독방에서 아무것도 안하고 있을 때 즐겁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그럴리가."
서지현이 아하, 하는 소리를 냈다.
"사실, 저도 일생 마음 편하게 놀아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서지현의 삶이 내 삶에 비견 될 수 있을 정도로 빡빡했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그 괴로움의 강한 정도로 치자면 내가 더 괴로웠을 수 있지만, 괴로운 시절의 길이로 치면 내 괴로움은 서지현의 괴로움에 비할 바가 아닐 수도 있다. 서지현은 사실 상, 이 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 평생 힘들게 살았을테니까.
태어나서 지금까지 놀이동산도 카피라 깨우러 갔을 때 처음 봤을 정도잖아.
"바쁘게 살았죠. 먹고 자는 시간 말고는 쉴 시간도 없었고. 하루를 통째로 비워놓은 채 놀아 본 기억이 없어요. 그래서 그런데, 뭘 하면서 노는게 좋을까요? 술 같은 거 말고."
막상 놀아도 되는 상황이 되니, 뭘 하고 놀아야 할 지 모르겠다.
"우선은 산책 같은 거라도 하면서 고민해 볼까?"
내 말에 서지현이 픽 웃었다.
"기왕 가는 산책이라면 한강으로 가봐요. 그 유명한 오리보트도 한 번 타보고 싶어요."
"나 잡아봐라도 한 번 해보고?"
내 말에 서지현이 웃음을 터뜨린다.
"저랑 당신이 나 잡아봐라 하면서 넵다 달리면 대충 아음속 정도는 나올텐데, 주변 건물이 남아날까요?"
틀린 말은 아니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나와 서지현은 한강변을 걷기 시작했다.
"서울 뭐 별거 없네요."
서지현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멍하니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뭐 유달리 좋아하는 음식 있어요?"
"... 이제와서?"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조금 늦었지만 이제야 물어보는 것 같네요."
"어쩐지 소개팅 하는 느낌인데."
내 말에 곧바로 서지현의 목소리에 가시가 살짝 돋는다.
"말씀하시는 투를 보니, 해본 적이 있나봐요?"
서지현의 시선에 명확하게 드러나는 의심이 자리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