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3
휴식
역시 태평양 건너서 멕시코에 도착해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계획은 시도하는 순간 실패가 확정되어있었다. 어쨌든, 멕시코의 갑순이가 거기까지 해낸 상황이라면...
"우리도 오래 쉴 수는 없겠군."
"그래도 며칠 정도는 여유롭게 쉴 수 있을거야. 보자, 한 3일 뒤에 다시 한 번 찾아오겠네. 내가 찾아오기 전까지는 멕시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을테니, 푹 쉬라고."
말을 마친 제르멩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
"식사 잘 얻어먹었네."
말을 마친 제르멩이 서서히 흐려진다. 나와 서지현은 제르멩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다가 먹고 난 그릇을 정리하고 돌아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한 3일 정도는 쉬어도 괜찮을 것 같아서 다행이다. 카피라와의 싸움은 정신과 육체의 한계를 시험하는 수준이었으니까. 카피라의 궁전을 나오자 얼마 전까지 격전이 이어졌던 거대한 공터가 나오고, 그 공터 너머의 바다에 세워져 있는 성벽이 보인다.
"돌아가야 할 텐데."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다, 얼릴게요."
자신있는 목소리. 나는 서지현의 대답을 듣고 나서 그녀를 바라봤다.
"가능해?"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마력이라면 가능하고도 남아요."
하긴, 한반도를 통째로 열대로 만들 수 있을 정도라고 했으니. 서지현은 말을 마치고 나서 손을 앞으로 뻗었다. 쩌저저적, 하는 소리와 함께 파도가 일렁거리는 바다가 하얗게 얼어붙은 길이 펼쳐진다.
"기가 막히네."
내 말에 서지현이 흐흥, 하는 소리를 내고는 나를 바라봤다.
"이게 바로 두 개의 심장이 가지는 놀라운 힘이죠."
자기 심장에 카피라의 심장인가. 그렇게 치면 나는 뭐 혓바닥이 두 개인 거냐. 아직 제대로 사용해 보지는 않았지만 사용하게 된다면 효과는 보장된 것이나 다름 없다. 카피라의 저주가 어떤 힘과 효과를 가지고 있는지는 직접 온 몸으로 경험해 봤으니까.
"어차피 당분간 시험해 볼 기회가 없겠지."
더 이상 한국에 괴물과 랜드 마크는 없다. 적이 없으면 무기를 쓸 일은 없다. 설사 분쟁이 생겨서 우리가 나서야 할 일이 있다고 해도, 굳이 카피라에게서 획득한 힘을 사용해야 할 정도로 강한 상대가 있기는 할까. 사실 상 마르골리스를 제외하면 우리가 지금 얻은 이 힘들을 사용할 만한 상대는 없다고 봐야 한다.
그 녀석을 제외한다면 기껏해야 다른 지역의 월드 앵커 정도가 있겠지만, 제르멩이 한 말을 고려해보면 우리가 다른 곳의 월드 앵커를 처리할 여유는 없어 보인다.
"차라리 푹 쉬자고."
시간적 여유도 없는데 뭘 더 해보려고 시도했다가 일이 크게 잘못되어버리는 수가 생긴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바다에 만들어진 얼어붙은 길을 따라 걷고 걸어, 우리는 마침내 인천에 도착했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인천에는 이미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아마, 우리에게 떠올랐던 메시지 중에서 앵커 브레이크에 대한 정보는 한반도 안의 사람들에게도 전달된 모양이다. 도착하자마자 사람들이 몰려와서 우리에게 손을 내민다.
그야말로 무수한 악수의 요청. 기쁘겠지.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눈 앞에서 이빨 드러내고 아그르르 거리는 괴물들이랑 어깨동무하고 칼춤 추는게 일이었는데, 이제부터는 그 친구들에게 시달릴 일이 더는 없다는 뜻이니까.
빗발치는 악수와 고생했다는 축하 인사를 뒤로 하고 레토나에 탑승했다.
"앞으로 할 일이 많겠어."
내 말에 김용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죠?"
그렇겠지. 원래 사람이 싸울 상대가 없으면 지들끼리 싸우는 족속들이잖아. 장담하는데, 한반도에서는 김용천을 비롯한 서울 친구들이 꽤 잘 나가는 조직이 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농사도 지을 줄 알고, 머릿수도 방빵한 편이고, 우석진은 생존을 위해 필요한 나름대로의 잡지식을 갖추고 있으니까.
"상대적인 풍요를 누릴 것은 거의 정해진 사실이야. 당연히, 그런 풍요를 보면 군침을 흘릴 사람들도 썩어나지."
내 말에 김용천이 차분한 어투로 대답했다.
"그런 일이 생긴다면, 우리는 단합해서 응당한 조치를 취할 겁니다."
거기에 더해서 용인부터 서울을 거쳐 인천까지 함께 괴물 시체랑 동료 시체 밟고 달려온 사람들 사이의 연계도 끈끈하다. 그나저나, 생각했던 것 보다 빠르게 튀어나오는 대답에 나는 살짝 놀랐다.
"서울에서 잡혀 있는 사람들 살려야 한다고 하던 김용천은 어디가고 칭키스칸이 앉아있는걸까."
다소 비꼬는 것 같은 내 말투에 김용천이 대답했다.
"그 사람들은 스스로 선택한게 아니지 않습니까."
서지현이 김용천의 대답을 듣고 시원하게 한 마디 했다.
"지도자가 강요했을 수도 있죠."
"그런 상황이라면 기꺼히 항복할 기회를 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세를 이어간다면, 그건 그 사람들의 선택입니다."
김용천은 말을 마치고 나서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저는 사람들을 제 입맛대로 이끌고 싶은 건 아닙니다. 함께 할 기회는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해가 되는 선택을 한다면, 가만히 있을 수는 없겠죠."
뭐, 그거야 알아서 할 일이다.
"제 아무리 개판이 되어봤자 이전만하겠어?"
내 말에 김용천이 나지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제 아무리 상황이 안 좋아져도 이전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반도는 완전히 확보되었으니까.
"이전에도 말했었지만, 우리한테 뭐 시키거나 부탁하려고 하지 마세요. 어차피 한동안 바쁠 예정이고, 한가해진다고 해도 그런 일에는 별로 관심 없는 편이라서."
그래, 일이 다 끝나고 나면 이후에 우리는 김용천은 물론이고, 사람들이 끼리끼리 뭉쳐서 날뛰고 지지고 볶고 하는 일에는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우리한테 피해만 오지 않으면 된다. 서지현의 말에 김용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습니다."
이미 여러번 그런 기색을 주었기 때문에 김용천 쪽에서도 우리에게 딱히 뭔가를 기대하고 있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물론, 말은 그렇게 해도 사람이 무인도에 단 둘이 떨어진 것처럼 살 수는 없으니까 주기적으로 교류는 생길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주로 교류하게 되는건 김용천이 통제하는 생존자들일 수 밖에 없고, 거기가 무너지면 우리도 곤란해지니까 정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간다면 도움을 줘야한다.
어디까지나, 쓸데없는 일로 사람 오라가라 하지 말라는 취지의 발언이었을 뿐이다.
"돌아가면 창고에서 꽤 많은 양의 물자를 꺼낼 생각입니다."
그래, 나름대로 기념일이라고 부를 만한 상황이니까. 이런 날 먹고 마시지 않으면 언제 먹고 마실까. 한참을 편히 쉴 기회 없이 살았던 사람들이니...
"한 나흘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용천의 말을 들은 나는 허허, 하고 웃은 다음에 김용천을 바라봤다.
"그렇게 놀고 먹다 하늘에서 유황불 쏟아진다?"
나흘을 놀고 먹는다니. 누가 들으면 무슨 국경일이라도 되는 줄 알겠다. 아주 그냥 여태동안 싹싹 긁어모은 물자란 물자는 싹 다 털어내고 제로부터 다시 시작할 생각인건가.
"이 사태가 벌어지고 나서 한 번도 마음 편하게 쉬어 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일은 두 분께서 해주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했고..."
나는 그 말에 휙휙 손을 저었다.
"그냥 한 말이야. 뭘 설득까지 하려고 들어. 방금 전에 말했잖아."
니가 하고 싶으면 하고, 할 생각이 없으면 그만 두고. 그냥 이야기를 듣고 나도 모르게 던진 말일 뿐이다.
"게다가, 오랜 싸움이 이어지면서 서로 마음이 맞게 된 사람들도 굉장히 많으니까요."
서지현이 어머, 하는 소리를 냈다.
"좋은 일이네요."
괴물과의 싸움이 이어지는 상황에서라면 섵부르게 미래를 약속 할 수 없었겠지만, 이제는 괜찮다. 생존을 위해 서로 고난을 함께 해오던 남녀가 단순한 전우 관계를 넘어 마침내 눈과 마음이 맞아 미래를 약속한다는 건 까놓고 말해서 아포칼립스 상황에서 진행되는 연애의 왕도라고 할 수 있지. 도로 걸어가던 중에 만나게 되는 강도만큼이나 전형적이다.
사실, 나와 서지현의 관계도 그런 식으로 시작된 거고.
"내 집 마련도 꿈이 아니잖아."
온 천지에 깔린게 빈 집이다. 물론 보수를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시간이 지난다면 점점 노후화 되서 못 쓰게 되겠지만, 건물이 그 꼴이 나기 전에 사람들도 거기에 대한 대책을 마련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 뭐라고 말해야 하나. 지금 세상은 타노스가 손가락 너덧 번 정도 튕기는데 성공한 세상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따로 머무르실 곳은 정하셨습니까? 정한 곳이 없다면 서울에 머무르시는 편이..."
나는 김용천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 둔 곳이 있어. 걱정할 필요는 없을거다. 서울에서 그럭저럭 가깝거든."
서지현이 내 손을 잡았다. 어딘지는 그녀도 알고 있을 것이다. 용인 근처가 되겠지. 잠깐 그런 생각을 하던 나는 차에서 내린 다음 스스로의 뺨을 한 대 때렸다.
"아직 끝난게 아니죠."
그 광경을 보고 던진 서지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직 끝난게 아니다. 마르골리스의 숨통까지 끊는데 성공해야 모든 일이 끝난다. 다른 사람들은 기뻐 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아니다.
"나흘 논다고 했나. 우리는 사흘 간 휴식하고, 확보한 포인트를 사용해 준비를 마치자."
앵커 브레이크와 함께 카피라가 남기고 간 것들은 굉장한 것들이다. 쥐여준 포인트만 봐도 알 수 있다. 평범한 수준의 랜드 클리어를 통해 확보 할 수 있는 포인트는 일반적으로 7000-10000 포인트 정도다. 그것도 굉장히 정석적으로 랜드 클리어를 진행해서, 미션 클루 확보하고 던젼 좀 부숴주고 하면서 싹싹 포인트를 긁어 모은 다음에 랜드 클리어를 성공해야 기대 할 수 있는 수치다.
근데 15만? 그 정도면 15개 이상의 랜드 클리어를 성공시킨 것과 같은 양의 포인트다.
굉장히 강해보이는 장비를 보상으로 받았는데 거기에 더해서 그 정도의 포인트를 일시급으로 받았다는 건 그 만큼 마르골리스를 상대하는게 힘든 일이라는 증거다.
"복잡한 생각은 여기까지만 하고, 잠깐 멈추자."
저 멀리에서 고기 굽는 냄새와 함께 술병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한 나절 정도는 저런 것들에 집중하자. 우리가 아무리 할 일이 남아있다지만 한 나절 정도 미친듯이 퍼먹고 마실 자격이 있는 일을 해냈다는 점은 틀림없으니까.
잔과 잔이 부딪치고, 그 동안 모아왔던 물자들이 창고정리 행사를 시작한다. 사람들은 웃고 떠들며 노래하고 춤춘다. 피어오른 불꽃의 연기가 밤하늘로 하얗게 치솟는다.
앉은 자리 옆에 빈 병이 쌓이고, 불이 이글거리는 장작 위의 불판 위에는 벌써 몇 번인지 횟수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많은 것들이 올려졌다가, 우리의 위장 속으로 들어갔다.
내 옆에 앉은 서지현이 이시은을 놀려먹다가 울컥하는 모습을 보고 벌게진 얼굴로 키득거리며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고 있다.
시간이 지나 밤에서 새벽으로 넘어갔다. 사람들 대부분이 돌아가고, 나와 서지현도 마련된 숙소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내가 서지현을 업고 이동하는 중이었다.
"끄윽. 이렇게 나흘을 먹고 논다니. 남아나는게 없겠어요."
"아니야 지현아. 우리가 너무 많이 먹고 마신거야."
정확히는, 네가. 나중에는 같이 있던 사람들이 괴물 보는 표정으로 바라보던데. 우석진은 당당한 표정으로 서지현이 권하는데로 마시다가 2시간 뒤에 맛이 가서 조기퇴근 해버릴 정도였으니까.
이시은이 기가 막힌 표정을 지으며 제시한 가설이 가장 인상 깊었다. 저 가슴이 사실은 가슴이 아니라 전부 간이라면 설명이 된다나. 서지현은 키들거리며 웃었다.
"그런가요?"
아마 그럴걸. 우리 앞에 놓여있던 술 한 궤짝 중에 절반 정도는 네가 마셔버린 것 같은데. 그 정도 되는 양의 알콜을 때려 넣는다면 아마 자동차도 굴릴 수 있지 않을까. 날 잡고 죽자며 마신다는게 이런 거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