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2
염소 도축
떠오른 문자를 확인한 다음, 나는 오늘의 승리에서 큰 역할을 담당했던 이성의 보루를 살펴봤다. 황금처럼 반짝이던 방패는 카피라의 등에 닿은 부분의 색이 시커멓게 변질 되어있었고, 광택도 싹 죽어버렸다.
"완전히 못쓰게 된 모양인데."
카피라가 뿜어낸 마력을 전부 받아내는 과정에서 결국 버티지 못하고 망가져버린 모양이다. 하긴, 트리거 기어도 아닌 것이 카피라가 모조리 쏟아낸 마력을 받아내 무력화 시켰으니 그럴 만도 하지. 오히려 못쓰게 되버리긴 했지만 그 마력을 잠깐이나마 상쇄해냈다는 점이 대단한거다.
"그래도 아쉽네."
씁쓸한 표정으로 이성의 보루를 살펴보고 있으려니, 웅웅 하는 다소 섬뜩한 느낌의 소리와 함께 카피라가 앉아있던 권좌에 검은 원이 하나 만들어졌다. 그리고, 뭔가 형언하기 힘든 색깔의 줄기들이 궁전 밖에서 밀려들어와 검은 원 속으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한다. 서지현이 다소 흐린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본다.
"저건?"
아직, 목걸이는 시각만을 남기고 전부 접혀 있었다.
"전부야."
서지현의 눈으로는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선명하게 보인다. 한계까지 잡아늘여진 괴물이나, 정체 불명의 구조물 같은 것들이 실타리와 같은 형태로 검은 원 안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아마, 한반도에 자리잡고 있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모든 것들이겠지. 이런 식으로 사라지는 거군.
한반도에 존재하던 모든 것들을 먹어치우며, 자그마하던 검은 구멍이 점점 커지기 시작한다. 마침내, 문 정도 크기로 커진 검은 원이 카피라의 권좌 위에 얌전히 떠 있는다.
[월드 앵커 카피라와 연결되어있던 코어 게이트가 개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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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 : 코어 다운
목표 : 끝으로 향하는 문이 열렸다. 진입하면 마주하는 것은 이 세상에 일어난 모든 사태의 원흉이다. 미션을 받았다면, 게이트 너머의 존재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알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그 강함도. 여기에서 만족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앵커 브레이크를 달성한 자들의 당신들의 선택이다. 당신들에게는 선택할 자격과 권리가 있다.
보상 : 종국 승리
※ 클리어 보상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트리거 기어를 갖춰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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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눈 앞에 뭔가가 떨어졌다. 장미 향기가 흘러나오는, 이따금 두근거리는 검은 색 심장과 퍼렇게 괴사한채, 가시가 돋아나 있는 혓바닥.
[검은 염소의 심장 : 작은 세계를 창조하고 유지 할 수 있을 정도의 막대한 마력이 맥동하고 있습니다. 자격있는 자가 아니라면 감히 바라보는 것조차 불가능합니다. 자격있는 자의 손에 들어가면 이내 흡수되어, 무궁무진에 가까운 마력을 쥐여줍니다.]
[촌철 : 세상 모든 저주의 근원이라 여겨지는 카피라의 혀입니다. 자격없는 자가 다가오면 죽음을 통한 도피조차 허락하지 않은 채 천문학적인 숫자의 저주를 쏟아냅니다. 자격있는 자만이 이 혀에 담긴 권능을 견딜 수 있습니다. 자격있는 자라면, 이 혀에 담긴 권능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을겁니다.]
그리고 레벨 열두번이 오를 정도의 경험치와 15만 포인트까지가 주어진 보상이다.
"네가 먼저 고를래?"
내 말에 서지현이 살짝 인상을 쓰고 혓바닥과 심장을 바라봤다.
"썩 정감이 가게 생기진 않았네요."
그거야 뭐. 어쩔 수 없지. 서지현이 두 가지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심장이죠.'
서지현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심장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래, 누가 뭐라고 해도 심장은 서지현이 가지는게 좋을 것이다. 서지현이 심장으로 손을 가져가자, 이내 심장이 빠르게 맥동하며 서서히 녹아내린다. 그리고 표정을 굳힌 서지현이 그대로 가만히 서 있는다.
"감상은?"
내 말에 서지현이 잠깐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한반도를 아마존으로 만들 수도 있겠는데요. 저도 그거 해볼까요, 카피라처럼?"
말을 마친 서지현이 마력을 뿜어내자, 시뻘건 기운이 기둥처럼 솟구쳐오르더니, 이내 서서히 가라앉는다. 그 광경의 감상을 마친 나는 바닥에 떨어진 혓바닥을 손에 쥐었다.
[자격 확인, 촌철을 소유하겠습니까?]
혓바닥은 그대로 서리가 끼며 얼어붙더니 그대로 박살나버렸다. 그리고, 혀가 찌릿거리기 시작하며 머리 속으로 뭔가가 구겨져 들어오기 시작한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말이 어떤 결과를 불러오게 되는지에 대한 지식들.
순간 밀려들어온 정보에 눈 앞이 어지러워 잠깐 휘청거리던 나는 이내 정신을 차리는데 성공했다.
[소유권이 설정되었습니다. 이후 상황의 변동에 따라 소유권을 포기 할 수도 있습니다.]
"... 기분이 좀 이상해."
떠오른 문자를 확인하고 나서 무심코 내뱉은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 완전 쓰레기네요."
이름을 보면 우리는 카피라를 죽이고 나서 심장과 혓바닥을 뽑은 것과 다르지 않다. 시체 모욕도 이 정도면 수준급이군.
"걱정할 필요 없다네. 어차피 진짜 심장과 혀를 뽑은 건 아니니."
그렇구나. 딱, 딱 하는 복도에 지팡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조금 일찍 와서 도와주지 그랬어."
내 말에 제르멩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야 있나."
"한반도에서 괴물들은 전부 사라지는 줄 알았는데요."
서지현의 지적에 제르멩이 어깨를 으쓱했다.
"인구수 부족하다고 커멘드 센터 못 짓는 건 아니잖나. 카피라의 마력에 의존하고 있던 괴물들이 사라지는 거지, 나는 관련 없어."
얼씨구, 그 사이에 게임도 해본 거냐. 카피라의 마력에 의존하는 괴물들이라. 이미 제르멩이 말해줬었지. 랜드 마크와 괴물들은 월드 앵커의 마력에 의존해서 유지되는 거라고. 우리와 싸웠던 카피라는 전력을 낸 게 아니었다. 뭐, 그렇게 따지자면 AOS 게임에서 죽은 다음 자기 본 실력은 이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거랑 다를게 없지. 그 상황에서 낼 수 있는 최고 출력이 전력이 되는 셈이니까.
결국 그런 점에서 카피라는 우리와 싸울 떄 전력을 다한 셈이다.
"고생이 많았을 거라고 생각하네. 이제 남은 건 마르골리스 뿐이군."
서지현이 제르멩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이 이상 한반도에서는 뭔가를 더 기대 할 수 없다는 점이지만요."
제르멩이 서지현의 말에 픽 웃었다.
"뭘 구한다고 해도 어차피 마르골리스와의 싸움에서는 의미가 없을거라고 생각하네만."
제르멩의 말도 사실이다. 우리가 다른 나라로 넘어가서 랜드 클리어를 한다고 해서 뭐가 변할까. 장비 몇 개 더 얻었다고, 레벨 몇 개 더 올렸다고 마르골리스를 상대하는게 수월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상 우리가 믿고 사용해서 효과를 볼 수 있는 건 앵커 브레이크 보상으로 받은 심장과 혓바닥, 그리고 트리거 기어 정도가 전부다.
정 모아야 한다면 결국 앵커 브레이크까지 시도해야 한다는 건데...
그러려면 일단 일본이든 중국이든 배를 타고 넘어가야 한다. 배를 타고 넘어가면 끝나는 것도 아니다. 그 썩어 넘치는 랜드 마크들 중에서 월드 앵커와 관련된 랜드 마크를 찾아내 봉인을 풀어야 하고, 봉인을 푼 다음 녀석이 머무르는 곳을 찾아내야 하고, 찾아내고 난 다음에는 치고 받고 싸워야 한다.
트리거 기어는 그나마 참령을 그대로 쓸 수 있으니 다행이고, 싸움 자체도 카피라를 제거하고 얻은 물건을 이용 할 수 있으니 쉽게 풀어 갈 수 있겠지만. 거기에서 문제가 끝나는게 아니다. 결국 월드 앵커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특화된 준비를 갖춰야 한다.
카피라와 싸우기 위한 필요최소 조건이 그녀의 저주에 대한 대항책이었듯, 다른 지역의 월드 앵커들도 그 월드 앵커에 맞춘 특화된 준비가 필요하다. 결국, 강해져서 절약 할 수 있는 시간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멕시코 쪽은 어때?"
내 말에 제르멩이 턱을 쓰다듬었다.
"그래, 여기까지 해냈는데 입을 다물고 있는 것도 웃기지. 다 찾는데 성공했어."
나는 그 말에 이마를 짚었다. 그래, 다 찾는데 필요한 시간은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그럼 다음으로 노리는 건 월드 앵커일 것이다.
"그 아가씨는 두 사람과는 다르게 꽤나 정석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으니까."
나는 그 말에 제르멩을 바라봤다.
"랜드 클리어 하고, 생존자들 끌어모으는 식으로?"
내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성과는 꽤나 거둔 모양이더군. 물론, 두 사람도 도움을 줄 사람들이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비교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야."
더 많이, 더 실력이 좋은 녀석들을 끌어모은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도 쉬운 일은 아니에요. 머릿수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그 이야기를 듣던 서지현의 대꾸는 틀리지 않다. 대항책이 없으면 1억이 몰려와도 쓸려나갈 수 밖에 없다. 삼만 오천의 유령 군단이 쓸려나가는데 몇 초나 걸렸었지. 한 30초는 걸렸었나? 양으로 질을 땜빵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뭐, 여태동안 해낸 일들을 생각하면 자네들이 어련히 잘 해낼거라 믿겠네."
말을 마친 제르멩이 잠깐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가 우리를 바라봤다.
"혹시, 뭐 안 먹나?"
나는 그 말에 짜게 식은 표정을 지었다.
"초콜릿으로는 부족했나보지."
"살펴보니, 그건 식사가 아니라 간식이었던 모양이더군. 먹을 생각이라면 옆에 밥그릇 하나 더 놓기만 하면 될 텐데."
그래서 뭐, 한끼 줍쇼 그거냐? 잠깐 못마땅한 표정으로 제르멩을 보고 있던 나는 서지현을 바라봤다. 내 기억이 맞다면 오늘은 서지현이 요리하는 날이다. 당사자의 의견을 물어봐야지.
"제르멩 말대로, 있는 반찬에 밥 한 그릇 더 놓는 것 정도니까요."
그렇게 기묘한 식사가 시작되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식사를 하던 제르멩이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배고프면 어떤 느낌인가?"
나는 제르멩의 말에 숟가락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갑자기 그건 왜?"
"그냥 궁금해서. 꽤나 귀찮은 일이라고 생각하거든. 밥 먹고, 잠자고, 대소변 보고 하는 일들. 안 하면 죽는 걸로 알고 있는데."
"싸고 먹고 자고,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3요소지."
다시 식사를 시작하고, 제르멩은 잠깐 자기 몫으로 놓인 밥그릇을 보고 있다가 말했다.
"굉장히 귀찮을 것 같은데."
"그런 식으로는 생각해 본 적 없는데.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죽 해오던 일이라서."
내 말에 제르멩이 잠깐 밥그릇을 바라보다가 다시 식사를 하기 시작하며 이런 저런 질문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상당히 시시콜콜한 질문이었고,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할 이유가 없는 질문들이기도 했다.
그래, 굳이 표현하자면 상식이라고 할 만한 것들. 피곤하면 어떤 기분이 되는지, 병에 걸린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그렇게 질문을 이어가던 제르멩이 더 이상 질문을 건네지 않고 묵묵히 식사를 이어간다.
궁금한건 다 물어본 모양이네. 그럼 나도 질문 좀 하자.
"멕시코 여자가 앵커 브레이크를 성공하는데 얼마나 걸릴까?"
내 말에 제르멩이 어깨를 으쓱하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카피라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는 전제 하에... 수원에서 참령을 완성시키고 나서 서울로 향하지 않고 바로 카피라를 노릴 각오를 했다면 시간이 얼마나 걸렸을 것 같나?"
아마, 지금처럼 오래 시간을 끌지는 않았을거라고 생각한다. 대충, 하려고 하는 말은 이해 할 수 있다.
"그 여자는 월드 앵커의 위치를 아는 모양이지?"
내 말에 제르멩이 고개를 끄덕였다.
"트리거 기어를 완성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지."
그렇다면 속도는 빠를 것이다. 당연히, 멕시코의 월드 앵커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을 것이고, 트리거 기어를 찾아내고 난 다음에야 카피라와의 싸움을 준비해야 했던 우리와는 다르게 트리거 기어를 찾으면서 월드 앵커에 대한 대처법을 마련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