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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탈옥했다-219화 (219/237)

# 219

염소 도축

접시가 빈 다음부터는 언제고 이런 상황이 되어도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했기에, 우리는 대응 할 수 있었다.

솟구치는 칼날을 막아내자 끼긱, 하는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치맛자락이 조금 베어진다. 그 상태에서 즉시 잔설을 발동시키자. 수확자가 촌경을 반복하며 치맛자락을 잘라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범위가 넓다. 이 홀 전체를 카피라의 드레스 밑단이 전부 감싸고 있다. 함부로 땅에 발을 딛을 수도 없어서, 나와 서지현은 멀쩡하게 딱딱한 맨 땅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공중전을 이어나가는 중이었다.

"크으."

카피라의 공격을 막아내는 와중, 수확자에 잘려나간 치맛자락이 허공에서 너풀거리다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장면이 눈에 잡힌다.

잘려나간 치맛자락은 다시 드레스로 흡수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대충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알 것 같다.

"땅따먹기."

어릴 때 오락실에서 형들이 플레이 하던 그 야한 땅따먹기 게임이 생각나는군. 가능한 많이 드레스 밑단의 면적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 하지만, 너무 욕심을 부리다가는 카피라의 공격에 당한다.

서지현이 어지간한 건물 기둥만한 굵기의 화염을 손에서 쏟아낸다. 카피라가 살짝 손을 들어올리자 치마가 거대한 벽이 되서 그녀를 향해 쏟아지는 화염을 막아낸다. 그 와중에도 나와 서지현을 노리고, 치마가 계속해서 꿈틀거리며 칼날과 가시의 모습으로 찔러들어온다.

서지현의 화염은 카피라에게 닿지는 않았지만, 카피라의 치맛자락에 커다란 구멍을 뚫는데는 성공했다. 드레스에 생긴 빵꾸 주변에 엉겨붙어 타오르는 화염.

"아뜨뜨, 아뜨."

카피라의 장난스러운 말투와 함께 검은 드레스에서 솟아오른 커다란 손이 툭툭 털어 꺼버린다. 그 사이, 카피라는 양 손으로 드레스를 잡고 크게 한 번 펄럭였다. 바닥을 감싸고 있던 드레스 자락이 그 기세에 확 하고 딸려 올라간다.

그 기세에 펄럭이던 넓은 드레스 자락이 허공에서 거대한 크기의 주먹으로 변해 우리를 향해 떨어진다.

"이런 걸로...!"

서지현의 외침과 함께 자기 앞에 방어벽을 친다. 주먹이 방어벽 위에 떨어진다. 반투명한 막이 그 기세에 통째로 흔들리며 금이 쩍쩍 간다. 하지만, 벽을 뚫지는 못했다. 주먹이 벽 앞에 멈추고, 서지현의 몸에서 화염이 쫙 퍼진 다음 정면에 멈춘 주먹을 향해 쏟아진다.

"조심해."

주변에 쫙 깔린 치맛자락들이 서지현을 가만히 둘 생각은 없었고. 나는 부지런히 우리를 노리고 사방에서 튀어나오는 창이나 말뚝, 이빨과 같은 기괴한 형체들을 막아내고, 잘라내기 시작한다.

"이 정도면."

충분히 해볼 만 한 상황이다. 카피라는 이따끔 드레스 자락을 잡고 손을 이리저리 흔들 뿐이다. 그러면 그 결과로 튀어나오는 온갖 흉악한 무기들을 가까스로 막아내고, 드레스 자락을 잘라 크기를 줄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싸움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하악, 하악."

서지현과 나는 온 몸에 긁히고 찔린 상처를 입은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일단, 카피라의 드레스는 많이 줄어들었다. 권좌와 계단은 전부 감쌀 수 있는 정도지만, 이제 저걸로 우리를 공격하지는 못할거다. 포션을 마셔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처를 입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점이 없는 건 아니다.

"아, 이제 더는 못 쓰겠네."

권좌에 앉은 채 이리저리 자기 치마를 둘러보던 카피라가 치마를 들어올려 자기 입에 물더니, 그대로 확 잡아 뜯는다. 지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드레스의 밑단이 찢어져 나간다. 뜯어져 나간 드레스 자락이 스르르 흘러내리고, 카피라의 검은 드레스 밑단은 발목 정도 높이에서 살랑살랑 흔들린다.

자리에서 일어난 카피라가 우리를 내려다본다.

"지친 건 아니지? 아직 나랑 싸우지도 않았잖아."

그 말에 나는 절로 탄식이 나왔다. 내가 걱정하던게 바로 그 점이다. 우리가 싸운 건 카피라의 드레스 자락이지, 카피라가 아니니까. 우리를 바라보며 검지로 머리카락을 감아올리던 카피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 사실 몸을 쓰며 싸우는 건 처음이거든. 그래서 잘 모르는데... 이 정도면 강한 편이려나. 애들아, 어떻게 생각해?"

얘들이라니, 주변에는 아무도 없는데.

다소 기대하는 것 같은 어투로 중얼거리는 카피라의 몸을 타고 가시덩굴이 마구 휘감기기 시작한다. 저 멀리에서 희미하게 염소 수백마리가 울부짖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려퍼진다. 분명히 조명이 홀 안을 환하게 비추고 있는데. 카피라의 주변만이 빛이 닿지 않는 것처럼 검게 물든다.

"좋다고 하네. 응, 아이들도 기대하고 있는 모양이야. 사실, 아이들 대부분은 드레스에서 끝날 거라고 생각했나봐. 다들 놀랐어. 다들 오빠 언니랑 놀아보고 싶어해."

온통 시커멓게 변해버린 카피라의 주변. 다른 색깔이라고는 창백할 정도로 하얀 카피라의 얼굴과 팔, 그리고 거기에 휘감긴 진녹색의 가시덩굴 정도다.

"눈동자가."

내 말에 서지현이 침을 삼켰다. 잠식된 어둠 속에서 수십쌍의 눈동자들이 붉은 안광을 뿌린다. 불쾌할 정도로 지독한 장미냄새가 사방에 차오른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몸 속으로 모든 것들이 빨려들어가기 시작한다.

어둠이 사라지고, 다시 드레스를 입은 채 권좌에 앉아있는 카피라의 모습이 보인다.

"아흑."

그녀가 손으로 배를 쓰다듬자, 화악하고 카피라의 배가 크게 부풀어 오른다. 마치, 임신이라도 한 것처럼. 카피라는 자기 배를 쓰다듬으며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애들이 기대를 많이 하고 있어. 나도 더 놀고 싶었는데. 좋은 엄마는 아이들에게 양보를 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더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확 하고 카피라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존재감이 더 강렬하게 우리를 억누르기 시작한다. 이건, 지금까지와는 다르다. 오르골을 통해 적응했다고 해도, 제대로 움직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 정도 수준이라면...

"마르골리스와 다를게 없잖아."

확 일어났다가 사라진 존재감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잠깐 경험해봤던 마르골리스의 압박감과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다.

"아윽, 윽. 얘들아! 쉬이. 조금만 기다려. 왜 이렇게 급하니."

불길할 정도로 부풀어 오른 카피라의 배가 마구 혼자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부풀어 오른 드레스 너머로 뭔가 불쑥 불쑥 솟아오르는게 보인다.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뭐라도 해야 하는데."

카피라의 몸에서 쏟아져나오는 압도적인 존재감이 몸을 움직이도록 허락해주지 않는다.

카피라가 권자에 앉은 채 하얀 다리를 외설스러울 정도로 크게 벌리고 홍조를 띄운채 작게 숨을 헐떡인다. 크게 부풀어 있던 배가 쏙 하고 원래대로 돌아가며, 카피라의 다리 사이에서 뭔가가 쏟아져나온다. 그리고 그 자세 그대로 잠깐 숨을 헐떡이던 카피라는 손을 들어올려 자기 이마를 슥 훔친다.

동시에, 미친듯이 전신을 억누르던 압박감이 서서히 줄어든다. 특정 순간에만 확 하고 존재감이 높아지는 건가.

우리는 카피라의 몸 안에서 쏟아져 나온 것들을 확인하고 침을 삼켰다. 다리 사이에서 쏟아져나온 점성 높은 액체가 늪을 이루고 잇다.

"저 쬐끄만 몸에 저런 것들이 어떻게 들어가 있는거야."

도라에몽인가? 아니면 몸 안에 호이포이 캡슐을 하나 챙겨넣고 다니는 건가.

"자. 분명히 재미있을거야."

카피라의 말과 함께 늪이 부글거리며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검은 늪에서 뭔가 기어나오기 시작한다. 제대로 표현하는 것도 힘들 정도로 지독한 모습을 하고 있는 녀석들이 점액질을 뒤집어 쓴 채로 늪에서 기어나와 우리를 보고 울부짖는다. 바라보고, 그 형상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가볍게 두통이 느껴질 지경이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곳이 없어 보이는 기괴한 생명체들. 토악질이 올라오는 악취가 방금 전까지 가득하던 장미 향기를 밀어낸다.

- 부러워.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 강해? 강해. 누구보다, 우리보다? 맞아. 우리보다 강해. 우리는 이렇게 흉측한데. 저 녀석들은 왜 멀쩡해? 왜? 어째서?

- 엄마가 마음에 들어하고 있어.

- 싫어. 엄마가 왜 저런 것들을 마음에 들어하는 거야?

- 사지가 멀쩡하고, 강한데다가 엄마 마음에까지 들다니. 너무해. 저 녀석들은 뭔데 다 가지고 있는거야? 왜 나는 이렇게 사는데 저 녀석들은 저렇게 행복해 보이는거야? 우리랑 저것들의 차이가 뭐야?

- 재수 좋은 것들. 우리는 이렇게 힘든데. 띵가띵가 놀면서 다 가졌어. 우린 이렇게 힘든데.

그런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동시에 녀석들의 입에서 침이 질질 흘러내린다. 목소리는, 끊이지 않고 있다.

- 우리랑 똑같이 만들거야. 아니, 우리보다 더 추악하게.

- 히힉, 얼굴을 곰보로 만들고, 전신에 살을 잔뜩 붙이고, 더러운 종기와 개기름이 온 몸에서 줄줄 흐르게 만들고, 다가가기만 해도 얼굴이 구겨질 정도로 악취가 풍기게 할 거야. 뇌 속을 휘저어서 백치로 만들어 똥오줌을 질질 흘리고 있으면 볼만할거야. 너무 재미있겠다.

- 괄약근을 박살내는 건 어때? 똥을 참고 싶으면 손으로 자기 손으로 막고 있게 하자. 양 손이 똥범벅이 된채 울부짖으며 울부짖는 쓰는 모습을 보면 재미있을거야. 아하핫!

- 그리고 목걸이를 채워서 저 녀석들을 알고 있는 놈들에게 끌고 다니며 보여주자. 경멸하겠지? 싫어하겠지? 으흐흐흡.

"..."

대놓고 내뿜어지는 적의에 나와 서지현이 살짝 뒤로 물러났다. 그런 우리를 보고 카피라가 모성애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애들이 말은 저렇게 해도 착해. 저 옹알이 좀 봐. 귀엽지 않아?"

지랄하지마. 옹알이 같은 소리 하네.

"태교를 스너프 필름으로 받고 지옥에서 기어올라온 애새끼들이구만."

내 말에 카피라가 놀란 표정으로 말한다.

"아앗, 엄마 앞에서 애를 욕하는 건 나쁜 일이야. 물론... 애들이 샘이 조금 많기는 해. 저주의 본질은 질투라서 어쩔 수 없거든."

부러운게 있어야 저주도 하는 법이니까. 남 망하라고 기도하면 그게 저주인 법이지.

"게다가 어지간해서는 밖으로 나오지도 않아. 그래서 기뻐. 언니랑 오빠가 잠깐만 보모 역할을 해줬으면 하는데. 다들 순하니까 어렵지는 않을거야."

그리고, 녀석들이 우리를 향해 괴성을 지르며 밀려오기 시작했다. 카피라는 한숨을 깊게 쉬고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권좌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힘들어라. 이렇게 전부 나오고 싶어하는 경우는 처음이거든. 저기, 나는 조금만 쉴게."

기회라면, 지금이다. 저 녀석들만 어떻게든 뚫는데 성공하면...! 나와 서지현은 시선을 교환한 다음에 녀석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 덤벼들다니! 역시,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것들이 다 그렇지! 자기 밖에 모르는 나쁜 개새끼들. 언제나 우리를 괴롭혀. 우린 노력하고 있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저런 것들이 자꾸 앞길을 방해하니까 어쩔 수 없잖아.

"그래, 멋대로 떠들어라."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녀석을 향해 수확자를 휘둘렀다. 콰각, 하는 소리와 함께 물컹거리는 살 속으로 수확자가 파고든다.

- 아가아아악! 때렸어, 아파!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보모 역할이라고 했지. 나는 권좌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카피라를 바라봤다. 그 와중에 서지현이 입을 열었다.

"진짜, 더럽게 못생겼다. 뭐 하나 잘 하는 것도 없어 보이고, 찌질하기는 더럽게 찌질해서."

서지현의 말에 우리를 향해 몰려오던 괴물들의 시선이 서지현에게로 향했다.

- 그러시겠지, 잘 나가시는 년이 보기에는 우리가 한심해보이겠지. 아무것도 자기 힘으로 한 게 없는 주제에 우리를 비웃어?!

서지현이 그 말을 들으며 한 녀석의 머리에 에노테르를 박아넣고, 그대로 화염을 밀어넣어 터뜨리며 비웃음을 날렸다.

"구데기 같은 잉여 새끼들이. 이제 와서 아득바득 짖어대는 거 봐. 역겨워서 일주일 내내 구역질만 해도 모자라겠네."

서지현은 계속해서 온갖 독한 말을 쏟아내며 녀석들을 자극했다. 그와 동시에 내 쪽으로 슬쩍 시선을 던지며 눈치를 준다. 카피라가 쏟아낸 괴물들의 시선을 자기한테 집중시키려는 거다. 그러면, 그 틈을 이용해... 나는 수확자를 손에 꽉 쥐었다.

카피라가 지금 눈을 감고 있다지만, 절대로 그냥 곯아 떨어져 자고 있는 건 아닐거다. 아마, 내가 카피라를 공격하기 위해 접근하면 눈을 뜨고 반격하겠지.

서지현이 카피라가 쏟아낸 저 흉측한 것들과 싸우고 있는 동안, 나는 어떻게든 카피라와 결착을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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