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8
공수전환
괴물들의 시체는 쌓이지 않았다. 피가 흘러도, 살점이 뜯어져 나가며 구슬픈 단말마와 함께 숨을 거두어도. 그 모든 것들은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는 것처럼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아름다운 백색의 궁전 안으로 빨려들어간다.
하지만, 빨려들어간 살점과 피가 다시 형태를 갖추고 밖으로 나오는 일은 없었다. 한 녀석도 살려두지 말아라. 우리가 칙령을 통해 내린 명령을 삼만 오천의 유령 군대는 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얼마나 긴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벽 너머에 자리잡고 있던 모든 괴물이 그 숨을 거두었다.
남아있는 유령들의 숫자는 정확히 셀 수는 없지만 절반 정도다.
"저 궁전 안에 나머지 괴물들이 전부 모여있는 건 아닐까요?"
서지현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기에는 너무 조용해."
궁전 안에서는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완벽한 침묵.
- 궁전에 진입한다. 문을 파괴해라!
유령 군대를 지휘하던 자의 외침에, 궁전이 저절로 그 거대한 문을 열어 젖혔다. 마치, 부수지 말라고 말하는 것처럼.
"알아서 열어주면 우리야 고맙지. 궁전이 자동문이 있다니. 엄청 최신식인데."
유령들과 함께, 나와 서지현은 열린 궁전의 문 안으로 진입했다. 유화로 그러낸 것처럼 선명하고 화사하던 백색의 궁전 안을 점령하고 있는 건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지독한 어둠이었다. 그리고, 발에 걸리적거리는 천이 느껴진다.
저 목소리와 저런 식의 화술은 알고 있다. 까먹을 수가 없다. 어두운 궁전 안에 수백개의 조명이 동시에 밝혀진다. 일만 오천의 병력이 모조리 들어왔는데도 불구하고 이 홀 안에는 아직 공간이 남아있다.
나는 바닥을 뒤덮고 있는 검은천을 보고 움찔했다. 이 거대한 홀 안에 덮여 있는 검은 천은, 화려한 권좌 위에 앉아있는 한 소녀의 드레스 밑단이다. 양 손을 모으고 있는, 머리 위에 작은 염소 뿔이 달린 소녀의 모습을 한 괴물 카피라. 녀석은 눈을 감고 있었다.
확, 하고 온 몸을 짓누르는 강렬한 존재감. 나와 서지현은 잠깐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견딜 수 있어. 견딜 수 있는 정도다. 하지만, 홀 안으로 들어온 유령 군대가 그 존재감에 짓눌려 몸을 떨기 시작한다.
- 이곳에, 이곳에 아직 남아있는 유일한... 적이다. 저것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그러니, 칙령에 따라...
그 와중에, 어떻게든 공포를 극복 한 것 같은 유령 군대의 지휘관이 크게 외쳤다. 공포를 이겨내는 와중에, 이를 얼마나 강하게 악물었던건지, 외침과 함께 입 안에서 박살난 이빨이 우수수 떨어진다. 검을 가까스로 들어올린 그 손은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카피라의 입이 열렸다.
"세월이 흘러. 수천년, 수만년... 아니, 수억년. 무엇 떄문에 여기에 있는지 까먹어. 원래 가지고 있던 목적이 세월의 풍파에 흩어지기 시작해. 시간은 계속 흘러. 스스로의 존재를 실감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득한 세월이 흘러. 기억이 흐려져. 마침내 모든 것을 까먹어. 존재를 지탱해주던 강철같은 의지는 진작에 녹슬어 부스러졌어."
찌잉, 하는 소리와 함께 왼손에 들려 있던 이성의 보루가 미친듯이 덜덜 떨리기 시작한다. 서지현의 몸 주변에 투명한 얼음이 만들어지고, 박살나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이유는 알 것 같다. 카피라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막아내고 있는거다.
하지만, 저 괴물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견뎌 낼 수 있었던 건 우리 둘 뿐이었다. 카피라의 목소리와 함께, 한 가득 남아있던 유령 군대가 동작을 멈추고, 축 늘어진다. 그리고, 그 상태로 흐려지기 시작하다, 이내 먼지와 함께 사라진다.
남아있는 해골 병력이 전부 들어가도 더 들어갈 공간이 남아있던 궁전의 홀이 순식간에 축소된다. 고작해야 300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을 법한 좁은 홀. 카피라는 계단 위 권좌에 앉은채 눈을 떠 우리를 바라봤다. 오각형과 별모양의 눈동자가 우리를 바라본다.
"필멸은 슬퍼. 강인한 의지로 죽음을 초월하는데 성공해도, 결국 그 의지가 세월의 흐름에 굴복하고 쓸려나가 버리니까. 필멸은 결국 그런거야. 욱체와 정신, 그 어떤 것도 시간의 흐름에 거역하지 못한다는 안타까움과 가여움."
서지현이 손에 화염을 피어올리고, 내가 검을 강하게 쥐자 카피라가 잠깐 우리를 응시하다 손을 살짝 흔들었다.
"아, 그건 조금 있다 하자. 어렵게 찾아온 손님이잖아."
바닥을 덮고 있는 드레스의 검은 밑단 중 한 켠이 꿈틀거리기 시작하다, 쩍 열리더니 뭔가를 토해낸다.
테이블과 의자. 찻주전자와 케이크.
"뭐 하자는거야."
"케이크는 별로 안 좋아해? 특별히 언니랑 오빠가 싫어할 만한 재료는 하나도 안 넣었는데."
호불호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카피라를 응시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의도를 모르겠는데. 음식에 장난질이라도 쳐놓은 건가? 고민하는 우리를 보고 카피라가 창백한 손으로 입을 가린채 잠깐 키들거린다.
"에이, 음식에 장난치지는 않아. 그야, 그럴 이유가 없는걸. 내가 뭐하러?"
읏차, 하는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카피라가 앞에 놓인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리고 찻주전자를 들어올려 잔을 채운다.
잠깐 그 동작을 바라보던 나는 이내 후우, 하고 숨을 내쉰 다음 의자에 앉았다. 곧바로 카피라가 활짝 웃고 서지현을 바라본다.
지금이라면.
나는 그런 생각과 함께 재빠르게 수확자를 뽑아 카피라의 목을 노렸다.
"오빠, 지금까지는 내 제안에 동의하지 않은 거니까 한 번은 그냥 넘어갈게. 조금 있다 싸우기로 동의한거지, 그렇지?"
수확자는 카피라의 몸에 닿는데 실패했다. 찌이잉, 하는 소리와 함께 카피라의 근처에서 멈춘 검은, 잔설이 발동되어 진동하는 중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기는 하지만 그 속도는 느리다. 카피라는 무심한 눈으로 내 검을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내 제안에 동의한 거라면, 손에 힘 풀고 검을 집어 넣어줘."
그 말에, 나는 손에서 힘을 풀고 수확자를 칼집에 밀어넣었다. 그 장면을 바라보던 서지현도 이내 의자에 앉았다. 테이블 아래에 깔린 드레스 밑단이 잠깐 꿈틀거리더니 테이블 위의 케이크를 잘라, 나와 서지현의 접시에 하나씩 놓아준다.
그리고, 카피라는 손을 뻗어 남은 케이크를 통째로 자기 앞으로 가져왔다. 그 상태로 잠깐 나와 서지현의 눈치를 보던 카피라가 입을 열었다.
"나머지는 내가 다 먹어도 될까? 더 먹고 싶으면 말해. 더 줄 수 있어."
"그러던가."
"와앗, 고마워! 사실, 방금 그 말 하는 거 엄청 힘들었어."
대답을 들은 카피라가 손을 몇 번 비빈 다음, 포크로 케이크를 잘라내서 입 안에 넣었다. 잠깐 입을 우물거리던 카피라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그래서, 불멸이라는 거 말인데. 사실은 간단한 거야. 오빠랑 언니는 이 케이크를 먹는 순간 그 경험은 과거라는 이름 하에 기억의 영역으로 넘어가버리잖아. 시간이 지나면 까먹고. 흐려지고, 어떤 맛인지 기억하기 힘들고."
카피라는 계속 케이크를 먹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아니야. 나의 경험은 과거로 넘어가는 법이 없어. 기억이라는 밑빠진 독같은 용기에 보존되는게 아니야. 모든 경험이 너희들의 구분에 따르면, 현재에 위치하지. 고로, 나는 앞으로도 계속 이 케이크를 먹고 있는것과 다르지 않아. 케이크를 먹었을 때 느꼈던 감정마저도 고스란히, 조금의 결손도 없이 완벽하게. 물론 싫은 경험이라면 당시의 감정은 지우고, 까먹지 않도록 정보만을 남겨둘 수도 있지."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죠."
서지현의 질문에 카피라가 살짝 포크를 흔들었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지? 첫 키스는 어땠어? 애정을 느꼈을 때의 두근거림, 처음 사랑을 고백했을 때 느꼈던 기쁨, 첫 잠자리. 기억 할 수 있어? 기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어? 그 모든 경험과 감정이 조금의 결손도 없는 상태로,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함께한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지 않아?"
그리고 잠깐 나와 서지현을 번갈아보던 카피라가 웃었다.
"또 꼬시는거냐?"
내 말에 카피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르멩의 계약은 미완성이지. 제르멩이 일방적으로 계약을 취소 할 수는 없지만, 두 사람은 가능해. 나와의 계약은 소위 랜드 마크라고 일컬어지는 아랫것들의 계약과는 달라. 그렇다고 마르골리스처럼 육체의 불멸만을 약속하지도 않을거야. 내가 주는 것은 완벽한 불멸이야. 변치 않는 육체와 시간의 굴레를 벗어던진 자아가 누리는 완전한 경험."
"대가는?"
내 말에 카피라가 아, 하는 소리를 내고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두 사랑은 내 종속이 되는 거니까. 내 명령에 복종해야해. 아마, 따로 만나서 시간을 가지는 건 힘들 걸."
그 말에 곧장 내 입에서 대답이 튀어나왔다.
"우리가 미쳤냐? 그런 조건의 계약을 받아들이게."
내 말에 카피라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 사실 이걸 이해시키는 게 정말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했어."
카피라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손을 들어 머리에 돋아난 작은 뿔을 만지작거렸다.
"이미 설명했듯이. 불멸에는 과거라는 개념이 없어. 아이, 그러니까... 어떻게 설명해야 이해를 해줄까."
카피라는 살짝 얼굴을 찡그리고 뿔을 만지작거리며 한참 고민하더니 핑거스냅을 딱 하고 쳤다.
"그래, 나랑 계약하면 앞으로는 맨날 같은 과자 밖에 못 먹게 될거야. 언니랑 오빠는 그게 불행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그 과자는 영원히 질리는 법이 없는 과자인거지. 그렇다면 굳이 다른 과자를 찾아다닐 필요가 없잖아? 따라서, 전혀 불행하지 않아."
그리고는 나름대로 괜찮은 비유였다고 생각하는지 뿌듯한 표정을 짓고 우리를 바라본다. 대답을 돌려줄 차례인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던 나는 입을 열었다.
"금붕어가 기억력이 3초라는 이야기가 있지."
내 말에 카피라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진짜로? 엄청 멍청하네."
실제로 기억력이 3초인지 어떤지는 잘 모른다.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이야기가 원래 다 신뢰성이 떨어지기 마련이니까. 원래 카더라가 다 그런거지 뭐. 어쨌든 금붕어의 진실 따위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는 관련 없다.
"그래서 금붕어는 좁은 어항 안에 있어도 불행하거나 답답하지 않다고 하더라. 왜냐하면 3초마다 기억을 전부 까먹으니까. 언제나 어항 안의 모든 것이 새롭고 흥미롭게 느껴진다더군."
내 말에 카피라가 아하, 하는 소리를 냈다. 물론, 카피라와 계약을 해서 얻게 되는 불멸이라는 것과 금붕어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겠지만.
"난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항 안의 금붕어 비슷한 신세가 진짜 행복한 건지 모르겠다."
너랑 계약하면 나랑 서지현은 딱 그런 금붕어 꼴이 되는 거잖아. 옆에서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카피라는 잠깐 포크를 만지작거리다가 끄응, 하는 소리를 내고 중얼거렸다.
"아, 또 차였어. 엄청 노력했는데."
카피라는 한숨을 쉰 다음 약간 굳은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있잖아, 나도 자존심이 있기 때문에 절대로 또 물어보지는 않을거야. 방금 전 그 제안으로 언니랑 오빠에게 준 기회는 끝났어. 뒤늦게 계약하자고 해도 내가 거절할거야."
그렇다는 말은... 우리는 그 말에 곧바로 몸에 힘을 주었다. 카피라가 잠깐 케이크를 바라보다가 한숨과 함께 표정을 풀고 말했다.
"하지만, 케이크랑 차는 마저 먹어도 좋아. 제안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언니랑 오빠는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누가 뭐라고 해도 여기까지 왔는걸."
서지현이 그 말에 찻잔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우리가 마음 먹는다면 계속 이대로 시간을 끌 수도 있을텐데? 그러면 어쩌려고."
카피라가 서지현의 말에 눈을 크게 뜬 채 잠깐 침묵하고, 이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핫! 언니, 방금 전에 그 대사 엄청나게 웃겨! 아학, 아하하하핫!"
한참 배를 잡고 웃으며 발을 동동 구르던 카피라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은 다음 가슴에 손을 올리고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후우, 후우. 어휴. 저기, 백년도 좋고 천년도 괜찮아. 아니, 심지어 나조차 길다고 생각할 정도로 시간을 끌어도 상관없어. 그런 건 나에게 의미 없는 단위니까. 편할대로, 좋을대로. 천천히 느긋하게 즐겨."
그리고 나서, 카피라가 희미하게 잔웃음을 남긴 채 포크를 살짝 흔들었다.
"질문 하나. 어차피 언니랑 오빠 정도로 강하다면 한 곳에 자리잡고, 그 불완전한 육체와 영혼이 부스러지기 전까지는 함께 할 수 있었을텐데. 여기까지는 굳이 뭐하러 찾아온걸까?"
카피라도 짐작하고 있다. 우리가 굳이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가 있다는 걸. 그리고, 그건 시간이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카피라의 말을 들은 서지현이 잠깐 혀를 차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 민망할 정도로 웃는 건 너무한데."
"미안. 너무 웃긴걸 어떡해."
카피라는 손을 휘휘 저으며 사과아닌 사과를 했다. 그 뒤로는 간단한 대화가 이어졌다. 머리에 달린 뿔과 기괴한 동공만 아니라면 그냥, 어린 애라고 생각해도 좋을 정도로 카피라는 쾌활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혹시 케이크 더 먹을래?"
"참 힘들게도 말한다. 주기 싫은 모양이지?"
"윽. 맞아, 사실 나눠주기 싫어."
"그렇구나. 어쩔 수 없네. 한 조각 더 먹을게요."
"잠깐만.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 멋대로 가져가지마!"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이 흐른다.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접시는 텅 비었다, 찻주전자에서도 더 이상 찻물이 나오지 않는다.
카피라가 그 테이블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우리에게 시선을 향한 채 말했다.
"식사 끝. 그럼 이제 죽어."
홀 바닥에 깔려 있던 드레스의 밑단이 순식간에 검은 칼날과 가시로 변해 우리를 향해 솟구친다. 딱 1초 전까지만 해도 웃으면서 농담을 주고받던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