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래서 나는 탈옥했다-215화 (215/237)

# 215

공수전환

괴물들에 대한 보고를 전달 받은 한 대위가 달려와서 입을 열었다.

"우리 예상보다 조금 더 많은 편입니다. 아마, 실제 이 길목을 지키는 괴물의 숫자는 저거보다 더 많겠지요."

민혁 소령이 예상했던 것 보다 숫자가 조금 더 많다면, 우리가 이 장소에 산을 끼고 주저앉은 의도를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다. 지금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병력은 실제로 이 길목을 지키는 괴물들 중 일부다. 나머지괴물들은 방어 성공 후 역공을 가하는 우리를 막아낼 태세를 갖춘 상황이겠지.

"그럼 아라뱃길은 못 이용하겠네."

배를 타고 가지는 못하기에 아쉽지만, 여기에 이 만큼 몰려왔다면 상대적으로 신월동의 병력들은 수월하게 공격을 막아내고 진격 할 수 있을거다. 뭐, 실제로 민혁 소령이 의도했던 것도 이런 식의 전개이긴 하지.

"철조망 고정은 방어 이후로 미룬다. 전원 위치로 이동해!"

우리가 적에게 대항 할 수 있는 거리는 사실 상 500m 정도부터다. 그 이전까지는 박격포 정도나 쓸 수 있을까. 그래도 나름대로 긁어모아놓은 물자와 장비가 있어서 그런지 흔히 볼 수 있는 60mm 말고 81mm나, 심지어 4.2인치 같은 것도 배치되어 있는 상황이다.

숫자가 적으면 장비라도 좋아야 마음이 조금 든든해지는 법이니까. 잠시 뒤, 쏘아올린 박격포가 녀석들의 머리 위로 정의를 선사하기 위해 떨어져내리기 시작한다.

그것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녀석들의 머리 위에 만들어지는 거대한 보호막.

"그럼 그렇지."

녀석들도 박격포는 여러번 당해봤을 것이다. 대비를 하지 않았을리가 없다.

"거리가 좀 멀긴 하지만."

서지현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인상을 팍 쓰고 손을 뻗었다. 하늘을 향해 드리워져있던 반구형의 방벽에 숭숭 구멍이 뚫리고, 그 구멍을 통과한 포탄이 대지를 때린다. 콰캉, 하는 소리와 함께 땅이 떨리고, 폭발로 인해 솟구친 흙기둥 사이 사이로 날아다니는 팔다리.

"국방부가 그렇게 포에 미치고 환장하는 이유가 있었어."

지금 이 광경을 보면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저 멀리에서 다가오는 병력들의 머리 위에 떨어지는 정의. 저 정도 거리는 우리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거리다.

실제로 박격포 같은 걸 사용해서 싸우는 건 처음본다. 제 아무리 군생활 세상 없어도 살과 피로 이루어진 생명체 머리 위에 박격포가 떨어지는 광경을 보는 경우는 거의 없잖아. 뭐, 그런 점은 총도 마찬가지지만, 총알 맞고 죽은 시체와 폭탄 맞고 죽은 시체 사이에는 명확한 차이가 존재한다.

"하늘."

박격포는 땅에 있는 괴물들을 갈아버리는 용도지, 하늘을 날아다니는 녀석들을 공략하기 위한 물건이 아니다. 서지현이 아하핳, 하는 소리를 내고 배낭에서 K2 소총을 꺼내들었다. 저거 특제품이었지. 평택에서 싸울 때는 긴급상황이라 원래 새겨놨었던 문양까지 다 취소시켰었지만 그 사이에 또 다시 문양을 새겨두었던 모양이다.

"조준도 필요 없었군."

연발로 드르르르르 하면서 순식간에 발사된 20발의 총알은 그대로 유탄과 같은 힘을 가지고 날아오는 녀석들의 주변에서 마구 폭발하고, 녀석들의 날개가 걸레짝으로 변해 바닥으로 추락한다. 그 잠깐 사이에 탄창 두 개에 꽉 채워져 있던 총알 모양의 유탄이 싹 비워지고, 그와 동시에 하늘을 날아다니던 날벌레들도 싹 지워졌다.

꺠끗한 하늘이 드러난 가운데, 땅에서는 여전히 괴물들이 몰려오는 중이다. 산을 쭉 미끄러져 내려간 나는 정면에 보이는 거대한 돌덩이 인간을 보고 말했다.

"내가 지금 뭐 좀 시험해 보고 싶은게 두 가지 있어서 말이야. 협조 좀 해주라."

왼손에 방패, 다른 손에는 수확자. 이번에 확인해봐야 할 두 가지는 간단하다. 첫번째, 잔설을 구매한 건 호구짓이었을까 아니었을까? 두번쨰, 이 방패를 들고도 참령의 효과는 여전할까?

녀석이 나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다가오는 주먹을 향해 나도 검을 휘둘렀다. 주먹과 검이 부딪치며 충격이 발생하고, 곧바로 잔설을 발동시켰다. 다시 한 번 투쿵,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의 주먹에 충격이 가해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키이이잉, 하는 날카롭고 높은 소리.

"기똥차네."

서로 부딪쳐 있던 돌주먹과 수확자. 하지만 잔설이 발동되며 수확자의 칼날이 말랑한 버터를 가르는 것처럼 부드럽게 돌주먹을 가르고 들어간다. 절삭 능력 합격. 다음은 참령의 효과 발동인데.

거대한 돌덩이 인간은 그대로 그 자리에 굳어버리더니, 서서히 모래로 변해 흩어진다. 참령도 정상적으로 발동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구나. 싸락눈을 찍길 잘했어.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면 카피라와의 싸움도 해 볼 만하지 않을까?"

공격이 안 막힌다면 파백이 발동하고, 공격이 막힌다면 절혼이 발동한다. 새로 배운 스킬 때문에 마침내 파백과 절혼 어떤게 발동하더라도 순식간에 상대를 요리 할 수 있게 되었다. 거기에 더해서 방패도 챙겼고, 배낭 안에는 아직도 3만마리의 유령 병사를 불러낼 수 있는 문서가 떡하니 남아있다.

잠깐 그런 생각을 하던 나는 눈 앞에 달려드는 괴물 몇 놈을 제거한 다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스스로 뺨을 한 번 때렸다.

"서울에서 카피라한테 걸려 다 뒤져가다가 서지현 도움 받아 살아난지 얼마나 지났다고."

방심하면 안된다. 일단 눈 앞의 상황에 집중하자. 이제 박격포의 지원을 받기에는 너무 가까운 거리까지 녀석들이 접근했다. 여기부터는 포격 지원을 받기 힘들다. 잘못해서 우리 머리 위로 떨어지면 큰일나니까. 녀석들은 설치된 철조망에 온 몸이 찢겨 나가면서 비명을 지르고, 더 열이 받아 우리에게 무기를 들이대며 달려들었다.

"그렇게 죽였는데도 아직 잔뜩 남아있는 것 같네."

하지만, 녀석들은 공세를 중단하고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것은 확실히 눈치챈 모양이고, 밀어낼 자신도 없다 이거지."

어차피 녀석들이 우리를 잡아먹지 못해서 이를 갈 이유는 없다. 차라리, 더 큰 피해를 입어 방어에도 지장이 생기기 전에 뒤로 빠지자는 생각은 썩 나쁘지 않다.

이 길로 온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자신 있으면 우리보고 오라는 거다. 물러나는 녀석들의 병력을 보며, 곧바로 한 대위가 외쳤다.

"월평동 쪽은 어떤지 확인해봐!"

잠시 뒤, 무전을 받은 병사가 되돌려준 대답은 우리의 예상 외의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다 빠지는 중이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너 임마 무전 잚못 들은거 아니야?!"

한 대위의 외침에 무전을 담당하던 병사가 아닙니다! 라는 대답을 돌려주었다. 철수라니.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그 와중에 서지현이 잠시 물러가는 괴물들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그럴 수도 있어. 어차피, 카피라가 머무르는 곳에는 우리 둘 말고는 못 가잖아."

나와 서지현은 멜로디로 적응해서 카피라의 존재감에서도 어느정도 몸을 추스릴 수 있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다. 어디 그 뿐이랴. 이 많은 사람들을 옮길 만큼 큰 배나, 많은 숫자의 배는 운용 할 수 없다. 카피라도 알고 있을거다.

어차피 카피라가 시간 벌이를 해야 하는 이유는 전혀 없으니까.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 해도 우리가 인천 앞바다까지 전진하는 데에는 성공할 것이라고 보고, 쓸데없이 괴물들을 희생하지 않고 그냥 전부 자신의 거처로 불러들인거다.

그렇게 된다면.

"카피라의 거처에 도착하면 무수히 많은 괴물들의 악수 요청이 기다리고 있겠지."

그 녀석들을 다 잡아 족치는 건 어떻게든 성공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다음에는 진짜 난관인 카피라가 기다리고 있다.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한 상태로 전력을 다해 들이받아도 승산을 장담하기 힘든 괴물인데, 도착하기 전에 힘까지 빼야 한다니.

"하지만 우리에게는 도장과 칙령이 있잖아요."

그래. 우리는 딱 한 번, 삼만 오천명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그거지."

가능하기만 하다면야 마르골리스와 싸울 때까지 수원의 해골바가지에게서 얻은 장비는 아껴두고 싶었지만, 그렇게 해서 이길 상대가 아니다. 당장 장판파에서 소리치는 장비도 못 죽이고 있는데 유비 잡을 생각으로 병력을 아낄 수는 없잖아. 마르골리스는 카피라를 잡고 나서 생각하자.

"녀석들이 물러갔다는 건 다행이지만..."

그리고 무전병이 나를 보고 말했다.

"작전과장님이 찾으십니다."

그 말에 나는 무전기 쪽으로 다가갔다.

- 나는 반대한다.

"그래, 대놓고 우리가 바로 자기 근거지로 와줬으면 하는 느낌이지."

내 말에 무전기 너머에서 민혁 소령의 말이 들렸다.

- 알고 있으니 다행이군. 분명히 나름대로 준비를 해두었을 것이다. 의도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당해주는 건 현명하지 못해.

"달리 방법도 없잖아."

카피라는 판이 우리에게 너무 유리하게 짜여졌다는 느낌을 받자마자, 아예 판을 엎어버렸다.

나 안해! 라니.

어린애 같은 괴물년. 꼭 하는 꼬라지가 부루마블 하다가 빈정 상해서 우는 네 살짜리 어린애 같다. 남이 신경 써서 짜놓은 판이 깨졌을 때 얼마나 서운해 할 지는 생각도 안하지.

결국, 인천으로 향하는 길에 예정되어있던 공방전은 없던 일이 되었다. 그리고, 카피라가 빚어낸 모든 괴물들은 카피라의 거처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거다. 아마, 이 이후에 몇 년의 시간이 지난다고 해도 마찬가지겠지.

제르멩과의 대화를 생각해보면, 저 녀석들에게 있어 몇 년이라는 세월은 오랜 시간 축에도 들지 못하니까. 결론적으로 카피라에게는 시간이 많고, 우리는 시간이 부족하다.

- 문제 될 거 없지 않나. 시간이라고 하면 우리에게도 많다. 어차피 두 사람은 그 괴물을 죽이고 한국을 해방 할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있다. 6개월이고 1년이고, 기다리면서 기회를 노리면 될 거야.

그래, 민혁 소령이 저런 주장을 하는 건 이해를 한다. 우리는 다른 나라에서 트리거 기어를 모으고 있는 여자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으니까. 사실, 이야기 할 자신이 없다. 다른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들으면 무슨 생각을 할까.

이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유일한 희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괴물들에게서 벗어 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가 우리라고 믿기 떄문에 협력하고 있는거다.

하지만, 사실은 더 좋은 길이 남아있고 그 길로 향하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은 그저 아무것도 안하고 현 상황을 유지하는 것 뿐이라면? 그런 상황에서도 우리를 도울까? 다시 땅 아래에는 지하철이, 땅 위에는 자동차가 달리고, 전기와 인터넷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풍족한 생활을 버리고?

그럴리 없다. 서지현도 나와 같은 생각이다. 그녀가 무전기에 대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우리는 이미 결정했어요. 카피라가 자기 섬 안에 괴물을 드글드글하게 채워놨어도 상관없어요."

- 어리석은 선택 하지 말게. 이렇게 서두를 이유가 없어.

이유는 있어. 말하지 못할 뿐이야. 대신 그럴듯한 다른 변명을 가져다 붙여야겠지.

"우리가 수원의 랜드 클리어를 끝내고 확보한 물건이 있어. 그거라면 카피라가 자신의 거처로 불러들인 괴물들을 충분히 무력화 시키고, 더 나아가 카피라 자신에게도 큰 피해를 줄 수 있을거야."

- ... 말해보게, 이야기를 들어보지.

그리고 우리는 수원에서 확보한 물건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 바로 동원 할 수 있는 삼만의 병력이라. 우리에게까지 감출 필요는 없었을 것 같은데.

"숨긴게 아니라 굳이 말해줘야 하는 상황이 없었을 뿐이야. 게다가, 어차피 사용처는 정해져 있었고. 이걸로 서울을 방어했으면 지금 막막했을걸."

어차피 이런 상황에서 쓰려고 여기로 보트를 챙겨온거잖아? 아라뱃길을 타고 황해로 빠져나가, 곧장 카피라에게로 향할거다.

"내일 오전 8시에 출발하겠어요."

중간에 끼어들어 무전기에 대고 던진 서지현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하고 서지현을 바라봤다. 아직 해가 중천이다. 충분히 지금 출발하면 해 질 무렵에는 카피라의 거처로 갈 수 있는데 왜 내일 아침에 출발하겠다고 하는거지. 나를 마주보는 서지현의 눈에 고집이 서려있다.

나는 별 다른 말 없이 무전기를 향해 말했다.

"그래, 내일 아침."

- 그럼, 그렇게 알고 있겠다.

그걸로 무전은 끝나고, 상황이 종료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