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2
공수전환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일단 쉬는거다. 몸이 막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거나 한 건 아니지만, 지친 건 확실하다. 어차피 우리가 맡게 되는 역할은 언제나 그렇듯이 이끄는 역할이라기보다는 난국을 타개하는 병기와 같은 역할이니까.
나설 일이 없는 상황에서는 휴식하며 컨디션과 체력을 회복하는게 우선이다. 지친 몸과 정신을 이끌고 숙소로 안내받은 나와 서지현은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딱 30분만 아무 생각도, 말도 하지 말자."
"찬성."
그 말을 끝으로 우리는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은채 멍하니 30분 정도 시간을 보냈다.
"제르멩이 건네주었던 오르골 틀까?"
내 말에 서지현이 하하, 하고 웃은 다음에 중얼거렸다.
"그럼요, 이 분위기 이 상황에 그 듣기 싫은 음악까지 더해진다니. 파티가 따로 없네요."
"나도 듣고 싶어서 듣는 건 아니야."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이제 다음 목표는 때려죽여도 카피라다. 그리고 그 염소뿔 달린 계집과 얼굴을 맞대고 뭔가를 시도라도 해보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카피라의 저주에 대한 대항책과, 마주보면 온몸을 타고 돌며 압박하려드는 무지막지한 존재감의 극복.
최소한 그 두 가지에 대한 대비책은 세워놔야 그래도 카피라에게 칼질이라도 한 번 시도해 볼 수 있을거다. 이른바 필요최소조건이라는 거지. 저주에 대한 대항책은 마련이 되었으니, 남은 건 존재감을 견딜 수 있도록 훈련하는 거다.
나는 한숨과 함께 배낭에서 제르멩이 건네주었던 오르골을 꺼내 틀었다. 오르골이 띵띵거리는 소리를 내며 우리를 압박해들어가기 시작한다. 제르멩이 건네준 오르골이 낼 수 있는 최대 출력은 여기까지가 한계다.
"으윽."
서지현과 나는 동시에 그런 신음소리를 내고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틈틈히 들어두기는 했지만, 역시 들어도 들어도 사람 숨을 막히게 하는 음악이다. 물 속에서 익사하기 직전이 되면 이런 압박감을 받으려나.
"후우, 후우."
오르골의 음색이 이어지고, 나와 서지현은 크게 숨을 몰아쉬며 호흡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사서, 고생이라니."
서지현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이마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게 말이다. 사서 고생도 이 정도면 열정으로 추위를 극복하겠답시고 상의 탈의한 채로 쌓인 눈에 몸뚱아리를 비벼대는 수준이다.
"젊었을 때 고생하면 골병 든다고 하던데."
내 말에 서지현이 창백하게 질린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인천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틈 날 때 마다 이 달콤한 멜로디를 들어야겠죠?"
생각만해도 즐거워서 정신줄을 놓아 버릴 것 같다.
"상점에서 배울 수 있는 스킬 중에 초장거리 텔레포트 같은 건 없어?"
있으면 그냥 태평양 너머에 있는 그 여자의 숨통을 끊어버리는게 우리의 행복을 쟁취하기 위한 빠르고 편한 길일텐데.
"슬프게도 없어요."
그렇겠지. 그런게 있다면 서지현이 문양을 새겨 마법을 발동시키는 스킬을 배웠을리가 없다. 설사 배웠다고 해도 그게 태평양의 횡단을 가능하게 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스킬일까?
"원래 하나 하나 다 지우고 나면 가장 무식하고 힘든 방법만 남는 법이라고들 하지."
"맞는 말이에요."
우리는 그대로 앓아 누워 끙끙거리면서 오르골의 연주를 버티기 시작했다. 한 15분 정도 지나서, 오르골의 연주가 끝났다. 우리는 질식사 직전에 교수대에서 내려온 사형수 같은 표정을 얼굴에 띄운 채 식은땀을 훔쳤다.
"적응 할 수 있을까요."
"이제 낮은 출력은 버틸 수 있게 되었잖아."
아마 최고 출력도 계속해서 이 고생을 하다보면 충분히 견딜 수 있을거다. 그 뭐냐, 바다 속에서 오랫동안 숨을 참을 수 있는 해녀들처럼 말이지. 아니면 침 맞는 거처럼. 한의원에서 침 맞을 때도 처음 맞을 때는 따끔따끔하지만 주기적으로 통원하면서 맞다보면 안 그러잖아.
"그렇게 될 수 있기를 바래요."
말을 마친 서지현이 내 앞으로 다가와서는 그대로 벌렁 앞으로 취침 자세를 취한 채 드러누웠다.
"...?"
내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자 서지현이 발로 바닥을 몇 번 치며 말했다.
"안마 해준다고 했잖아요? 설마 사람이 죽을 각오하고 몸뚱아리에 작살침을 몇 방이나 맞았는데. 했던 말을 취소하지는 않겠죠."
그래, 그런 약속을 했었지. 안마라. 나는 엎드려 있는 서지현을 바라보다가 그 위에 올라가 등과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프면 말해."
어차피 전문성은 제로인 야매 안마다. 서지현이 내 말에 대답했다.
"어깨도 부탁해요."
시키면 해야지. 그러기로 했으니까. 나는 별 다른 군말 없이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하, 좋다."
서지현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눈을 감은 채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
"와 좋겠다. 나도 졸고 싶은데."
내 말에 서지현이 눈을 감은채 대답했다.
"있다가, 저도 해드릴테니 그때 졸면 될 거에요."
그리고 약 한 시간 뒤 교대가 이루어졌다. 별 다른 문제 없이 조용하게 진행되었다. 안마를 마친 다음 목욕을 마치고 나오니, 얼마 지나지 않아 김용천을 비롯한 사람들이 우리가 머무르는 숙소로 들어왔다.
"차후 계획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보트를 조종 할 수 있는 사람은 여전히 살아있다. 이시은이 차를 한 모금 마신 다음에 나와 서지현을 바라봤다.
"어차피 게릴라는 힘들다는게 모두의 생각이야."
그렇지. 천 단위가 넘는 숫자가 이동해야 하고, 단순히 숫자를 줄이는 것에는 의미가 없다. 어차피 카피라는 계속해서 괴물을 만들어 우리를 공격할 거다. 최현우처럼 따로 괴물을 만들어내는 고치가 있어서, 그 공급을 끊을 수 있다면 게릴라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겠지만.
"양천구 신월동과 그리고 강서구 개화동에 병력을 주둔시키고, 신월동에서는 경인고속도로를 통해 나아가고, 개화동에서는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를 활용해 나아갈 생각이다."
두 쪽으로 나눠질 생각인 모양이다.
"괜찮겠어? 그렇게 많은 병력이 아닌데, 쪼개지기까지 하다니."
내 말에 이시은이 대답했다.
"개화동에는 상대적으로 적은 병력을 동원할 생각이야. 개화산 쪽에 둥지를 틀어버리면 공격에 실패해서 길을 뚫지 못하고 빠진다고 해도 산을 끼고 방어 할 수 있거든."
"숫자가 적으면, 상대도 개화동 쪽에 병력 수를 줄일 수 있잖아요."
서지현의 말에 민혁 소령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의 목적은 적의 격멸이 아니라, 두 사람을 어떻게든 인천 앞바다로 빼내는 거다. 상대가 개화동의 방어병력을 축소한다면 아라뱃길을 이용해 단번에 황해까지 나아 갈 수 있어."
적이 그 사실을 모르고 병력을 축소한다면 대번에 아라뱃길에서 배 타고 쭉 황해로 빠지면 된다. 만약, 그걸 눈치채고 개화동에 일정 숫자 이상의 병력을 상주시킨다면... 상대적으로 대량의 병력과 장비를 동원 할 수 있는 신월동 쪽의 병력이 나아가는게 수월해질 거다. 신월동에서 경인고속도로 통해 보급을 받으며 나아간다면 결국 청라도 아니면 월미도로 빠질 수 있게 된다.
김용천이 손가락으로 지도를 슥 타고 움직이며 말했다.
"신월동 쪽의 병력이 적의 방어를 뚫고 인천 삼정동 인근까지만 도달해도 충분합니다. 삼산동에는 경인고속도로와 외곽순환도로가 교차합니다. 또한, 개화동에서 공항고속도로를 타고 나아간다면 마찬가지로, 인천 귤현동 인근의 공항고속도로와 외곽순환도로가 교차하는 장소에 도착하게 됩니다."
두 교차점 사이의 거리는 꼴랑 5km 정도다. 그러면, 귤현동의 교차점을 지키는 카피라의 괴물들은 개화동에서 진격하는 병력과 삼산동에서 북으로 올라오는 병력을 동시에 막아야 하는 상황에 봉착한다.
"즉, 개화동에서는 언제든지 아라뱃길을 통해 황해로 나아갈 수 있다는 신호를 줘서 병력을 묶어두는 걸로도 충분하다는 겁니다."
그 사이 신월동의 병력이 진격해 삼산동을 먹고, 그대로 외곽순환고속도로를 이용해 병력을 위로 올려보내 양면에서 공격 할 수 있으니까.
"이후에는?"
내 말에 민혁 소령이 대답햇다.
"같은 절차를 반복한다. 귤현동의 교차로 바로 옆에는 여전히 아라뱃길이 흐르고 있으니까. 적은 귤현동 쪽을 방어하는 병력을 줄일 수 없어. 그 사이, 삼산동 쪽의 병력이 가정동까지 나아간다."
가정동을 바라보자 바로 눈에 들어오는 건 북쪽으로 곧게 뻗어있는 서곶로. 마찬가지로, 쭉 타고 5km 정도 올라가면 검암역 인근에서 국제공항도로와 교차하게 된다. 귤현동을 점령했을 때처럼 양면 공격을 통해 해당 교차점도 점령하는데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그때부터는 적도 난감하겠죠."
거기부터는 말 그대로 잠깐 한눈 팔면 나와 서지현이 순식간에 배타고 나가서 카피라가 있는 곳으로 향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다.
"멀리 돌아서 서울로 향해버릴 수도 있잖아?"
내 말에 민혁 소령이 고개를 저었다.
"크게 돌아서 서울로 향한다면 인천을 지키는 방어병력의 숫자가 줄어든다. 우리가 눈치채지 못할리가 없지."
그렇겠지, 우리도 눈에 불을 켜고 녀석들의 움직임을 관찰할텐데. 녀석들이 병력을 돌려 서울을 공격하려는 순간, 또다시 아라뱃길로 빠져나가 버릴 수 있다는 가능성이 녀석들의 발목을 잡는다. 이야기를 다 들은 나는 후우, 하고 숨을 내쉰 다음 말했다.
"계획의 핵심은 결국 아라뱃길을 끼고 도는 거네."
그게 안되면 실패다. 하지만, 그게 성공한다면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상황이 잘 풀리면 순식간에 팍 하고 뱃길을 타고 황해로 빠져버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카피라는 적은 숫자의 아군을 많은 괴물로 막아 둘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가능한 계획이다.
2조원이라는 국민 세금을 때려박아 만들어낸 자전거 길이 마침내 유용하게 쓰이는 상황이 오는구나. 물론, 원래 용도랑은 굉장히 거리가 멀지만.
"어쨌든,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리가 향해야 하는 곳은 개화동이겠네요."
숫자가 적고 무장이 빈약하다고 해도, 나와 서지현이 개화동에서의 진격을 담당한다면 전력 부족은 해결된다. 진격까지는 무리라고 해도, 최소한 아라뱃길을 끼고 가드를 올리는 것 만큼은 확실하게 해낼 자신이 있으니까.
언제라도 우리가 아라뱃길을 이용해 배 타고 떠나버릴 수 있기 위해서는 개화동에 있어야 한다. 서지현의 말에 민혁 소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대충 이해했어."
일단 계획 자체는 꽤 그럴싸해 보인다. 실제로 어떻게 일이 굴러갈지는 해봐야 알겠지만. 당장 아라뱃길만 해도 2조원 들여 수로 팔때는 잘 될 거라 생각하고 판거잖아. 결과가 시궁창이라 그런거지. 아, 팔 때도 망할 줄 알았으면서 억지로 판 거라면 그건 그냥 순 나쁜 놈인거고.
어쨌든, 이대로 진행하기로 이야기를 마친 다음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계획이 정해졌으면 바빠지기 마련이지. 게다가, 이런 일은 원래 빠르게 진행할 수록 효과가 좋은 법이기도 하니까. 잠깐 나간 문을 바라보고 있던 서지현이 머뭇거리다가 정말 하기 싫다는 듯한 어투로 한 마디 던졌다.
"심심한데 노래나 들을까요?"
무슨 핸드폰으로 음원 재생하는 것처럼 말하지마. 나는 서지현의 말에 입맛을 다시다가 오르골을 손에 쥐었다.
"그래, 노래나 듣자."
다시금 오르골에서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나는 꽉 막힌 것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여러번 들어도 항상 처음 듣는 것 같은 기분이 들까."
어지가한 불후의 명작도 들을 때 마다 이렇게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오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날 하루 동안, 우리는 도합 열 번이나 오르골의 연주를 견뎌야 했다. 아마, 서울에 주둔하고 있는 생존자들의 준비가 다 끝나기 전까지는 계속 이렇게 시간을 보내야 할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