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1
공수전환
나가는 입구는 많다. 우리가 선택한 장소는 밖에서도 싸워본 기억이 있는 그 증기 전차들이 요새에서 밖으로 나가는 통로였다. 당연히 격벽이 닫혀 잇었고, 안 그래도 지친 정신으로 그 격벽을 때려부수기 위해서 나와 서지현인 무진장 애를 썼다. 그 사이에도 요새 안의 온도는 차근차근 올라 이제는 거의 습식 사우나를 방불케하는 습기와 온도를 자랑하는 중이었다.
"거의 다 된 것 같은...데!"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우그러진 격벽이 마침내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뜯어져 넘어갔다. 허겁지겁 밖으로 나오자, 깊은 새벽이 되며 서늘하게 식은 공기와 맑은 밤하늘이 우리 얼굴을 감싼다.
날씨 한 번 좋네. 감상 끝. 나는 서지현을 끌어안고 그대로 강철 요새의 경사면을 타고 빠른 속도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끄러지는 와중에 바닥에 닿은 엉덩이를 타고 느껴지는 진동은 참으로 불안하다. 지금 당장 내 똥구멍에 스팀이 비데처럼 뿜어져 나온다고 해도 아프긴 하겠지만 놀라지는 않을 정도다. 이 거대한 언덕이 진동모드 핸드폰처럼 덜덜 떨리고 있다.
"좋아!"
턱, 하고 발이 땅에 닿고, 그대로 나는 쉬지 않고 계속해서 속도를 받아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빠르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질주하던 나는 귀청이 터지는 것 같은 소리를 듣고 나도 모르게 시선을 뒤쪽으로 돌렸다.
"참나."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거대한 증기의 기둥. 그리고 그 스팀과 함께 사방으로 뿌려지는 금속의 파편들. 퍼지는 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연기와 습기. 나와 서지현은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솟구치던 증기가 서서히 약해지기 시작한다.
무사히 빠져나오는데 성공한 우리는 논 근처에 있는 민가 안에 자리잡고 조금 쉬었다 가기로 했다. 한 30분 정도 지났을까.
"뭐야 이게."
투툭, 하고 땅에 뭐가 떨어져서 확인해보니 빗방울이다. 나는 황당해서 입을 쩍 벌리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그 맑던 밤하늘에 먹구름이 한 가득이다. 서지현도 나와 마찬가지로 멍하니 하늘을 보다가 중얼거렸다.
"요새 안에 들어있던 수증기가 하늘로 솟구치면서 비가 내리는 것 같은데요."
뭐 이딴 경우가 다 있어? 나는 입을 쩍 벌리고 떨어지기 시작하는 빗방을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들은 적이 있다. 여름에 밀폐된 장소에서 전시회 같은 걸 하고, 사람이 많이 몰리면 흐른 땀이 그대로 천장에 맺혀 떨어질 때가 있다고 하긴 하던데.
그게 한 도시 단위로 펼쳐지다니. 이내, 쏴아아아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도대체 저 요새, 물을 얼마나 보관하고 있었던거야. 이 정도면 우리가 가지 않았던 어딘가에 저수지 하나가 통째로 있었다고 해도 믿을 수 있겠는데.
"자연이 아파하지 않을까? 지열을 퍼올리던 파이프는 그대로 남아있을텐데."
내 말에 서지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화력 발전기 안 돌아가고, 자동차 안 굴러다닌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 정도는 별거 아니지 않을까요?"
그러려나. 우리가 뭐 지구과학 전문가는 아니니까. 서지현이 배낭을 뒤적거려 뭔가를 꺼내들었다. 밀가루, 김치와 얼려 두었던 돼지고기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뒤이어 나온 친구는 소위 곡주라 칭해지는 부침개의 친구.
"마침 비도 오고, 조금 쉴 생각이었으니까. 괜찮겠죠. 금방 그칠 것 같은 느낌도 아니고."
막걸리에 김치전이라. 비오는 날에는 없어서 못 먹는 물건이지. 게다가 오늘 한 개고생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버너와 프라이팬, 식용유 같은 걸 꺼냈다. 옆에서 서지현이 김치전 반죽을 만들기 시작한다. 잠시 뒤, 비 쏟아지는 소리 사이로 기름 두른 프라이 팬에서 반죽이 익어가며 기름 튀는 소리와 함께 고소한 냄새를 풍긴다.
"잘 부쳐졌네."
서지현이 내 말에 대답했다.
"반죽 온도를 차갑게 유지하는게 중요한데. 저한테는 껌이죠."
그건 그렇지. 굳이 얼음 같은 걸 넣지도 않았지만, 부침개 반죽은 차가웠다. 덕분에 넉넉하게 두른 기름에 바싹하게 익은 김치전이 서너 장 만들어졌다. 우리는 접시를 꺼내 잔에 막거리를 따르고 잔을 부딪쳤다. 젓가락으로 김치전을 툭 하고 건드리자 바삭한 테두리에서 만족스러운 감촉이 전해진다.
이건 무조건 맛있다.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이 맛있겠지만. 젓가락으로 전을 뜯어내 입에 넣고 씹자 바삭, 하는 소리와 함께 입맛이 확 돈다. 살짝 간이 센 것 느낌이 있지만, 막걸리랑 함께 먹기에는 이 정도 간이 좋다.
"많이 먹지는 말자."
잘못하면 서울 가려다가 부산까지 내려가 버리는 수가 있어. 내 말에 서지현이 픽 웃고는 그릇 안에 담겨있는 액체를 쭉 비운 다음 입가를 살짝 닦는다.
"원래 먼 길 가던 중 지치면 퍼마시고 술기운으로 걷는게 최고라고 하던데."
말이야 그럴싸하네. 나도 마찬가지로 잔을 비운 다음 대답했다.
"고생했어."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내 잔을 다시 채워주며 대답했다.
"당신도."
전 세 장과 병 세 개에 담겨 있던 액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배부르고 술기운 올라오니 개고생으로 인해 지쳐 쓰러질 것 같던 몸뚱아리가 밀가루와 알콜을 태우며 다시 활력을 찾기 시작한다. 급격하게 찾아오는 졸음에 서지현이 잠깐 얼굴을 돌리고 하품을 한다.
식곤증을 피하고, 술도 깰 겸 차갑게 식힌 커피를 한 잔씩 들이켰다. 그 사이 빗줄기가 많이 약해졌다. 설거지를 마친 나는 서지현을 보며 말했다.
"그럼 술기운으로 가보자고. 몸 상태는 어때?"
서지현이 내 말에 음, 하는 소리를 내고 몸을 이리저리 돌려본 다음 한 마디 했다.
"확실히, 썩 좋지는 않네요."
그야 그럴 만 하지. 작지 않은 크기의 작살을 몸으로 몇 개를 받아낸 거야. 어지간한 사람들은 쇼크사 하고도 남을 정도의 작살을 몸으로 받아낸 채 어떻게든 머리에 박히는 건 피하려고 이리저리 몸을 돌리던게 불과 몇 시간 전 일인데. 그게 김치전에 막걸리 몇 잔 마셨다고 싹 가실리가 없다.
"마사지라도 해줄까?"
"당신도 정상은 아닐텐데요."
부러진 채 작살을 받아낸 왼팔에 불쾌한 느낌이 달리기는 한다. 아마, 서지현도 비슷한 느낌을 받고 있겠지. 다만, 나는 왼팔에 한정해 그 느낌을 받고 있다면 서지현은 지금 전신이 다 이렇게 쑤실거다.
"미안해서 그러는거지."
내 말에 서지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일단 서울에 도착한 다음에 받아볼까요. 할 일이 남아있으면 마음 편히 쉬지도 못해요."
이야기를 마친 우리는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굳이 평택에 들를 이유는 없다. 어차피 오늘 중으로 승부를 낼 생각이었기에 짐도 전부 챙겨왔었으니까. 바로 서울로 향하면 되겠지. 짐을 다 싼 우리는 서울로 향하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지금부터 쉬지 않고 빠르게 이동하면 해 밝아오기 전에는 남산 똥구멍으로 올라오는 태양을 구경 할 수 있을거다.
서울로 향하는 길에 괴물 몇 마리와 마주치기도 하고, 지나가던 와중에 우리를 발견한 포악한 생존자들이 서지현과 가진 걸 다 내놓고 떠나라는 식의 협박을 하기도 했지만, 다 좋게 몸의 대화로 해결했다.
그렇게 쭉쭉 달리고 달려 마침내 도착한 서울은 저 멀리에서도 피어오르는 연기가 보일 지경이다.
"참 열심히도 싸웠나보네."
"연기가 올라오는 건 좋은 신호에요."
아직 싸우고 있다는 뜻이다. 긍정적인 일이다. 이미 남산이 함락되었다면 저런 연기가 올라올 이유가 없으니까. 아직 남산에 김용천이 올린 가드가 뚫리지 않았다. 서둘렀던 보람이 있어서 다행이네. 개고생 하고 성과 없는 것만큼 김빠지는 일도 드문 법이거든.
"서두르죠."
나는 서지현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는 없을거야. 저기 보여?"
나는 건물 위를 가리켰다. 서지현이 눈을 살짝 찌푸리고 건물을 바라보다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누가 꾸물거리는게 보이기는 하네요."
이미 누가 우리를 망원경으로 지켜보고 있다. 군복을 입고 있는 걸 보니 민혁 소령이 여기에 배치해 두었던 모양이다. 아마, 무전을 때리고 있겠지. 우리가 얼마 걸어가지 않아 금방 저 멀리에서 소위 말하는 레토나 한 대가 이리로 굴러오기 시작한다. 안에는 김용천과 민혁 소령이 타고 있었다.
"김용천이 직접 오는 걸 보니 아직 싸우는 중은 아닌 모양이지."
"그랬다면 박격포 떨어지는 소리나 총소리 정도는 들렸을걸요."
맞아, 그랬어야 정상이긴 하지. 레토나는 우리 앞에 멈췄고, 김용천이 자리에서 내렸다.
"아이고 내 새끼, 며칠 사이에 아주 그냥 얼굴이 반쪽이네. 팔뚝은 또 어디가서 다치고 온 거야?"
내 말에 김용천이 아, 하는 소리를 내고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그렇게 쉬운 싸움은 아니었습니다. 당장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괴물들이 새벽부터 미친듯이 달려들어서, 막아내느라 고생했습니다. 피해도 이전까지와는 다르게 엄청나서..."
나는 그 말에 저런, 하는 소리를 냈다. 어제 새벽이라. 그렇다면 대충 카피라가 우리가 평택에 도착한 걸 알아채고 랜드마크를 강화했던 시간과 일치하겠는걸. 평택의 랜드마크를 강화한 다음 곧바로 서울을 조지기 위해 달려든건가.
"어떻게 막은거야?"
내 말에 옆에 서 있던 민혁 소령이 대답했다.
"남산 타워에 설치되어있던 발칸을 포함해, 인근 고층 빌딩의 대공포를 미리 뜯어왔었지."
발칸이라.
"탄약이 많지는 않을텐데."
말 그대로 발칸은 탄을 쏟아내는 무기잖아. 기관총 뭐 이런거는 비벼볼 여지도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의 탄을, 그것도 대구경으로 뿌리는 무기다.
"그래서 아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건 최초의 한 번 뿐이니까."
그렇겠지, 최초의 한 번 이후에는 녀석들도 대응을 준비해서 올 것이다.
"언젠가 한 번은 반드시 평상보다 큰 규모의 공세를 시작할 거라 예상했고, 그때 사용하기로 결정했지."
결론적으로, 결국 그 대공포들을 지상에 사용하면서 효과를 거두는데 성공했고. 피해가 크기는 했지만 막아내는데 성공하기는 한 모양이다. 그야, 대공 발칸이잖아. 예상하고 있었다고 해도 그게 회전하면서 총알을 토하기 시작하면 다 버리고 도망가고 싶을텐데, 모르는 상태에서 당했으니 얼마나 놀라고 큰 피해를 입었을까.
덕분에 우리가 오기 전까지 버티는데 성공한 모양이다. 만약 실패했으면 잠깐 쉬고 이리로 향하기로 했던 결정을 엄청나게 후회했을텐데.
"고생들 했네."
"일단, 한 번 큰 병력을 동원하고 큰 피해를 입었으니 금방 다시 밀려오지는 않겠죠."
서지현의 말에 민혁이 대답했다.
"앞으로 습격은 한 번 더 있을거다."
민혁의 말에 나는 그를 바라봤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궁금한데."
"자네들이 서울로 돌아왔다는 걸 알게 되면 적 지휘관도 굳이 공세를 이어갈 이유가 없지. 자네들이 인천으로 향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상대도 알고 있지 않나?"
공수전환이라는 건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걸 얻어내고 서울로 돌아왔다는게 파악되면, 녀석들 입장에서는 공세를 유지 할 필요 없이 인천에 방어를 굳힐 것이다.
"그러면 다음 공세는 없을 수도 있어. 우리가 랜드 클리어를 하자마자 카피라도 우리가 오늘 중으로 서울에 도착할 것을 예상했을테니."
내 말에 민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계 병력을 배치해두고, 최대한 병사들의 체력 및 사기 회복에 집중해야겠군."
자세한 일처리는 맡겨두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괜히 전문가도 아닌 사람들이 감 놔라 배 놔라 하다가는 잘 굴러가던 일도 그르치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