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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탈옥했다-210화 (210/237)

# 210

황동 요새

문의 위치를 확인한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그 문에 달려들었다.

지금 내 눈과 귀가 듣고 보는 광경이 몇 초 전의 광경인지는 모르지만, 어차피 문은 움직이는 물건이 아니다. 나는 격벽 주변의 지지대를 검으로 때려 부숴 무너뜨리고 뒤로 물러나 짐승의 시간을 해제했다.

[짐승의 시간 해제.]

숨이 턱 막히는 느낌과 함께 탈진이 찾아온다. 감각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온다. 나는 왼손을 바라보다가, 오른손으로 접어두었던 목걸이의 감각을 다시 원래대로 회복시켰다. 몸이 느끼는 통증이 돌아오자 정신이 아득해진다.

"허윽."

나는 그런 소리를 내며 몸을 한 번 떨었다. 망할, 뒤집어 쓴 포션이 화상을 회복시켜 준 건 좋았는데. 왼팔에 작살이 박힌 채로 회복시켜 버렸다. 이거, 뽑아내고 나서 다시 회복해야 할 것 같은데. 그것보다. 짐승의 시간 후유증에서 벗어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서지현 쪽으로 향했다.

오른 손을 뻗어 서지현의 손을 잡아봤다. 맥이 뛴다. 작살 때문에 몸에 뚫렸던 빵구도 다행히 매꿔진 모양이다. 잡고 있는 서지현의 손이 내 손을 마주잡는다. 그제서야 안심이 된다. 나는 희미하게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설마 지쳤어?"

서지현이 잠깐 내 얼굴을 보다가 대답했다.

"당연히 지쳤죠. 근데, 아직 안 끝났으니까."

서지현은 그렇게 말하고 나를 훑어보다가 왼팔을 보고 눈을 크게 뜨고 침을 삼켰다.

"그 사이 부러진 왼팔에 내고정 시술을 받은 거에요?"

나는 그 말에 중얼거렸다.

"내고정 시술이 뭐야."

내 말에 서지현이 후우, 하고 숨을 내쉰 다음 말했다.

"있어요, 뼈에다가 나사나 못 같은거 박아넣는 수술."

나는 그 말에 한숨을 쉬고 왼팔을 바라보며 말했다.

"의사가 영 돌팔이였어. 오히려 수술 받기 전이 훨씬 더 멀쩡했던 것 같네."

이래서 아직은 기계한테 수술을 맡기면 안된다니까. 서지현이 낮게 웃음을 흘렸다.

"그거, 빨리 뽑아버려야겠는데요."

억지로 몸을 일으킨 서지현이 잠깐 몸을 비틀거리다가 자기 싸대기를 한 번 후려치고 입에 사탕을 하나 물고 아그작거리며 씹어먹으며 내 왼팔에 박힌 작살에 손을 가져간다.

"조금 따끔 할 수 있어요."

조금? 따끔? 그럴리가 없잖아. 나는 그 소리에 곧바로 오른팔로 목걸이의 감각을 접었다. 아픈 거 싫어.

서지현이 양 팔로 작살을 꽉 붙잡고 그대로 뽑아냈다. 몸에서 으드득거리는 이상한 소리와 함께 작살이 하나씩 뽑혀나온다. 뽑혀나온 작살을 보고 눈쌀을 한 번 찌푸린 서지현이 내 상처에 포션을 들이붓는다. 그 광경을 보던 나는 나도 모르게 한 마디 했다.

"포션 엄청 썼네."

4개나 써버렸어. 내 말에 서지현이 대답했다.

"그래도, 제가 아직 스킬 사고 남은 포인트가 있었기에 다행이죠."

작살을 다 뽑아내고, 포션으로 회복하는 사이 무너뜨린 문 너머에서 뭔가가 쿵쾅거리며 때려부수는 소리가 들린다. 그새를 못 참고 또 친구들이 문 열라고 노크하는 모양이다.

"서두르죠. 요새의 심장은 멈추고 나서 상대해야 할 거 아니에요."

나는 서지현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가며 말했다.

"괜찮아. 심장이랑 뇌가 한 자리에 있는 걸로 보였으니까. 또 싸울 일은 없을거야."

지열을 퍼올리는 시설과, 해석기관은 같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저 기계들에게 명령을 내리는게 뭔지는 뻔하다. 그걸 박살내고 나면 자연스럽게 저 기계들도 움직임을 멈출거다. 우리는 서둘러 중심으로 향하는 길을 막고 있는 격벽을 때리기 시작했다.

더럽게 지친데다가 컨디션도 정상은 아니어서 속도는 조금 더뎠지만, 최선을 다한 보람이 있었다.

무너뜨려 틀어막은 입구가 터져나가며 온갖 기계들이 진입에 성공했을 때는, 우리도 격벽을 때려부수는데 성공한 참이었다. 나는 손목시계를 확인하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고철 친구들. 벌써 깊은 새벽이다."

이제 자라. 녀석들이 우리를 향해 뭔가를 쏘아낼 준비를 하기 시작했지만 우리는 재빠르게 격벽 너머로 들어가 그 공격을 피했다. 곧장 눈 앞에 보이는 거대한 기계 덩어리를 향해 수확자를 휘둘렀다. 심장과 뇌, 둘 중 먼저 부숴야 하는게 있다면 역시 뇌지.

- 시스템 경보. 긴급 상황. 대처 방안을 모색 중입니다.

모색하지마. 이쯤 했으면 많이 했어. 인정한다. 오랫동안 엿 먹인 녀석으로 치면 최현우가 제일 오래 엿먹였지만, 단기간에 먹인 엿의 개수로 생각하면 니가 최고다. 이제 그만 좀 뒤져.

수확자는 착실하게 이 거대한 요새의 두뇌를 때려부수기 시작했고, 마침내 무너진 입구를 뚫고 들어온 녀석들이 우리가 있는 곳에 도착하기 전에 요새의 두뇌는 완전히 작동을 중지했다. 지친 표정을 짓고 있던 서지현이 반쯤 탄식에 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쉴까요."

서지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휘적휘적 거대한 공간을 나섰다. 몰려왔던 기계들은 그대로 동작을 중지한 채, 무슨 인테리어 장식처럼 서 있다. 나는 녀석들을 툭하고 쳤다.

"이제 진짜 그냥 고철이구만."

[랜드 클리어]

내 말을 증명해주는 것처럼 떠오른 문자. 이제서야 안심이 된다. 1만에 달하는 포인트가 입수되고, 바닥에 장비가 떨어진다.

"제발."

이렇게 개고생을 했는데 도움되지 않는 물건이 튀어나오기만 해봐. 동서남북으로 펑펑 울어제낄 자신이 있다. 나는 긴장한 표정으로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살펴봤다. 작은 버클러였다.

[이성의 보루 : 위대한 기술의 아버지 모르텐바스가 발견한 이 물질은 극소량이었지만, 그 전까지 세상을 지배하고 있던 대부분의 미신을 막아내는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술의 아버지가 순결의 여신을 모시는 성녀와 동침하고(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은 강간이었다는 식의 모함을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이로 인해 소위 신이라 이름붙은 것의 진노를 받게 되었지만 무사했던 일화는 유명합니다. 발견된 물질은 극소량이기에 양산 될 수 없었지만,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양산 가능하고, 충분한 상업성이 있는 유사한 종류의 합금의 생산이 가능해졌습니다. 이후, 우리는 위대한 기술의 모태가 된 이 물질을 전세계에서 긁어모아 기념품으로서 방패를 제작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눈물이 다 날 지경이네. 이거면 저주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멍하니 방패를 바라보다가 깊게 숨을 몰아쉰 다음 손동작을 취해봤다.

"역시, 전혀 안 써지네."

그 대가로 핸디 매직은 봉인되었다. 아마, 마력을 사용해야 하는 기술은 전부 막혔겠지. 괜찮아. 서지현이 마력을 쓰지 못하는 것에 비해서 내가 마력을 쓰지 못하면서 발생하는 전력 약화는 미미한 편이다.

문제는 이게 과연 참령의 발동까지 막을 수 있느냐겠지만. 그렇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참령은 대놓고 규격 외의 물건이니까. 애초에, 생명도 아닌 기계도 조건만 맞으면 이유 불문하고 골로 보내버리는 물건인데.

조금 걱정이긴 하니. 한 번 시험은 해봐야겠지만. 그렇다고 이걸로 자해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서울에 돌아가게 되면 이 방패를 들고도 참령을 쓸 수 있는지 실험을 해봐야겠다.

"어쨌든, 이제 평택에 볼 일은 없어."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머리가 맛이 갔으니 포격도 멈출 것이고, 그 동안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던 영사기들도 모두 동작을 멈췄겠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냐고 우리에게 바락바락 대들던 녀석들도 이제 나름대로 자기 살 길을 찾아 갈 수 있을테고.

우리는 필요한 걸 다 구했으니 서울로 돌아가서 카피라의 공습을 밀어내며 인천에 도착해서, 준비를 마치고 카피라가 머무르는 인천 앞바다로 향하면 된다.

"그리고 모아놓은 포인트도 써야지."

저주에 대한 대항책도 포인트를 소모하지 않고 구하는데 성공했다. 여태동안 박박 긁어모았던 2만 포인트가 공중에 붕 떠버린거다. 전세집 보증금으로 쓰려고 열심히 돈 모으고 있었는데 갑자기 유산으로 집 한 채가 뚝 떨어져서 모아놓은 돈이 자유를 되찾은 기분이군.

이걸 어떻게 써야 유용하게 썼다고 자랑 할 수 있으려나. 서지현은 스킬 하나를 새로 배우고 남은 포인트는 죄다 포션의 구매에 사용했다. 아마, 그 정도가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벌러덩 드러누운 나는 멍하니 금속질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힘들 줄 알았으면 차라리 미션 클루를 확보하는 식으로 진행 할 걸 그랬나."

내 말에 서지현이 옆에 드러누워 신음소리를 흘리며 한 마디 했다.

"그랬으면 적어도 3-4일은 더 걸렸을 걸요."

사실이다. 다시 무리한 방법이긴 했고, 실제로 상당히 위험한 상황에도 처했지만 어쨌든 랜드 클리어에 필요했던 시간은 확실하게 단축 할 수 있었다. 며칠 걸렸지, 한 3일 걸린건가. 원래 한 일주일 정도 잡고 랜드 클리어를 시도해왔던 걸 고려해보면 자그마치 50%의 시간 단축에 성공한 셈이다.

이 개고생과 고통을 감수할 만한 일이었나? 라고 물어본다면 당연히 그렇다. 지금 당장 인천까지 가기 위해서 도움을 받아야 하는 서울의 생존자들과 보트 운용이 가능한 인력은 카피라가 쏟아낸 괴물들에게 두들겨 맞는 중이고, 저 멀리 태평양 건너에서는 나를 다시 감방으로, 서지현은 다시 빚더미로 보낼 지도 모르는 여자가 신혼여행 가는 길에 죽은 자기 남편 되살리겠다고 고군분투하며 트리거 기어를 모으는 중이니까.

"이동해야겠지?"

내 말에 서지현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도 그렇고 서지현도 그렇고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정확히는, 너무 지치고 탈진해서 움직일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넉넉 잡아서 사흘을 단축했는데. 한두시간 정도 쉬는 건 괜찮지 않을까?"

"좋은 생각이에요. 평택의 안전지대에는 저질러놓은 일이 있으니 가기 좀 그렇고. 여기에서 잠깐 뻗어있을까요."

말을 마친 서지현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몇 분 지나지도 않아 땅이 우르릉 하는 소리를 냈다. 죽었던 사람조차 눈이 번쩍 띄일 정도로 불길한 사운드다. 서지현이 시선을 돌려 어딘가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 빨아올리는 지열을 통제할 뇌가 없다보니 열이 계속 공급되는 모양이네요. 당연히, 열은 증기를 만들어내기 위해 쌓여있는 물을 덥힐테고."

물이 끓어오르며 쌓인 증기에 명령을 내릴 중앙 장치가 맛이 갔으니 당연히 증기는 끝임없이 쌓이는 중일거다.

"그거 그렇게 편안한 표정으로 할 만한 말이 아닌 것 같은데. 사람 몸으로 치면 혈압이 마구 올라서 혈관이 터지기 직전이라는 거 아니야."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지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 터질거라고 생각해요."

일 참 잘 굴러간다.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뛰기 시작했다. 시설이 터진다고 하잖아. 빨리 도망쳐야지. 조금 있으면 저기 지하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지지리도 뜨거운 공기가 이 요새 안으로 줄줄 흘러들거다.

"또 수육이 될 걱정을 해야 한다니!"

오늘 한국에 팔자 사나운 사람이 많겠지만, 우리만큼 사나운 사람이 또 있을까. 나는 재빨리 바닥에 떨어진 버클러를 집어들고, 서지현과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뿜어져 나오는 압력으로 인해 지열을 퍼올리는 파이프의 덮게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와 함께 리벳 같은게 팅, 하고 튕겨나가는 소리와 함께 그 틈새를 통해 증기가 새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엄청나게 거대한 찻주전자가 미친듯이 끓어오르는 소리와 닮았다.

행복해 미치겠네. 사람살려. 달리던 와중 나는 앞서 달리던 서지현의 머리를 꽉 눌렀다. 팅, 하는 소리와 함께 서지현의 머리가 있던 장소로 나사 몇 개가 튀어나오고, 곧바로 스팀이 확 쏟아진다.

"고마워요."

"말할 시간 있으면 달리자."

지금 이 요새 안에 파이프를 통해 보내지는 모든 증기압력이 치솟고 있는 중이라면, 과장 조금 보태서 시간 좀 지나면 요새가 통째로 폭발해서 달나라까지 날아갈거다. 서서히, 요새 안의 온도가 올라가는게 내 피부에도 느껴진다. 아마, 온도 변화에 민감한 서지현이라면 사태의 심각성을 나보다 훨씬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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