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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탈옥했다-207화 (207/237)

# 207

황동 요새

그날 밤 바로 우리는 우리가 준비한 계획을 실행했다.

요새 근처에 도착한 우리는 꾸물거리며 천천히 움직이는 중이었다. 걸리면 조진다. 어두운 밤이고, 어차피 조명이라고 할 만한 건 영사기들이 돌아다니며 뿜어내는 빛 말고는 없으니까. 어떻게든 숨어서 이동 할 수 있긴 하지만.

걸리면 영사기들이 따라붙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이 녀석들은 기계라서 그런지 절대로 포기하고 도망치는 법이 없다. 천 마리를 죽이면 천 마리가 새로 날아온다고 해도 놀라울 것이 없을 정도다. 한 번 추적 받기 시작하면 따돌리기 위해서는 건물이라도 하나 또 무너뜨려야 할 판이고, 그렇게 시선을 따돌린다고 해도 이미 경계태세로 전환된 영사기들을 피하는 건 더 어려워 질 것이다.

그러다보면 녀석들도 자연스럽게 우리의 이동경로를 알게 되겠지. 우리가 자기들의 요새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뒤에는 뻔하지."

나는 벽에 서지현과 함께 바짝 붙어서 영사기가 지나가는 걸 기다리고, 다시 빠르게 이동하기를 반복했다.

"예상했던데로, 시간이 오래 걸리네요."

서지현의 속삭임에 동의한다. 원래라면 요새까지 도착하는데 30분도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거의 5시간에 걸친 이동 끝에 요새 근처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조심해야 하는 만큼, 이동 속도는 느려질 수 밖에 없다. 때로는 멀리 돌아가야만 하는 상황도 있었고, 때로는 영사기가 지나갈 때까지 몇 분이고 한 곳에 가만히 머물러야 하는 시간도 있었으니까.

"그래도 도착했어."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된다. 고층 건물들이 사라지고, 논이 펼쳐진 평야지대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 평야 너머에 위치한, 밤 중에도 조명을 받아 누런 색으로 빛나는 금속 요새가 보인다.

우리는 바닥에 엎드린 채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땅에 엎드리니, 둔중한 진동음과 요새에서 솟구치는 증기가 지르는 비명이 몸을 타고 전해진다.

"정 상황이 안된다면. 여기부터는..."

내 말에 서지현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에서 들키면 곧바로 전력 질주해서 요새를 타고 올라가야 해요."

물론, 그 와중에 기관총이나 대포들의 공격을 받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여기에서 어영부영 있는 것 보다는 훨씬 가능성이 높다. 바닥에 엎드려서 걸어가는 와중, 요새에서 뻗어져 나온 탐조등 불빛들이 평야 지대를 이리저리 살피는게 보인다.

저 빛에 걸리면 100% 재미없을거다. 그러니까, 저 빛에 걸리지 않는 장소를 골라 돌아가야 하는데.

"탐조등으로 비추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지."

벌판 위에 세워져 있는 요새에는 지뢰가 매설되어 있다. 그리고 저 탐조등들이 비추지 않는 장소는 지뢰가 잔뜩 매설되어있다. 이미 목걸이를 통해 확인한 사실이다.

"피할 자신 있어요?"

서지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걸이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도 지뢰 정도는 어떻게든 높은 감각으로 찾아낼 수 있다. 제 아무리 보통 사람들의 감각으로는 탐지 할 수 없다고 해도, 나는 보통 사람도 아니고, 감각도 보통 사람의 수준이 아니니까.

"내가 지나간 곳만 따라서 걸어."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지만, 저는 당신이 휠체어를 타게 되도 사랑할 거에요."

에라이. 안 밟는다니까, 불길한 소리를 하고 있어. 어디 해보자 이거지? 나는 잠깐 서지현을 보다가 한 마디 했다.

"이 일이 끝나고 나면 너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 우리, 꼭 살아서 돌아가자."

내 말에 서지현이 쯔, 하는 소리를 냈다.

"저승사자가 들으면 눈이 돌아가서 낫 들고 달려올 소리를 하시네요."

지친 정신을 회복시키기 위한 살벌하고 불길한 농담 시간이 지나가고, 우리는 부지런히 지뢰밭 위를 조심스럽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서서히, 착실하게 우리는 요새에 접근하고 있었다. 마침내, 요새의 첫번째 외벽에 도착했다.

뚜껑이 덮혀 있는 작은 구멍들이 보인다. 아마, 우리가 걸렸다면 이 구멍들이 열리고 기관총 같은 것들이 튀어나왔겠지.

"아직 완전히 끝난게 아니야."

여전히 허공을 돌아다니는 영사기들이 보인다. 서지현이 후우, 하고 숨을 내쉰 다음에 말했다.

"저쪽 멀리에, 폭발을 일으켜서 시선을 끌어볼까요."

그래, 그러는 편이 좋겠다.

"할 수 있겠어?"

이 정도로 거대한 요새다. 아마 벌써부터 서지현의 마력 운용에는 차질이 생길 거라고 생각하는데.

"시선을 끄는 정도의 작은 폭발이라면 얼마든지."

"그럼, 부탁 좀 할게."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요새의 벽에 바짝 붙은 채 손을 땅바닥으로 가져가 눈쌀에 힘을 주고 정신을 집중한다. 잠시 뒤, 저 멀리에서 퍼펑. 하는 희미한 폭음이 들렸다.

- 이상 현상 확인. 조사.

그런 소리와 함께 주변을 떠돌던 영사기들 중 상당수가 서지현이 폭발을 일으킨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폭발이 일어난 곳 쪽의 요새 벽면에서 철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뭔가가 튀어나오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 요새 벽 안쪽에 숨겨두고 있던 포대나 기관총 같은 것들이 튀어나온 거겠지.

그리고, 거기에 제공된 동력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뿌웨어으에에에엑 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로 증기가 치솟는다. 영사기들의 숫자가 줄어든 틈을 타 우리는 재빨리 요새 벽면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래도, 벽이 아니라서 다행이네요."

요새는 직각으로 세워놓은 벽이 아니라 능선의 형태를 띄고 있었다. 뭐, 포격 같은 걸 막기 위해서는 이런 식의 구조가 더 좋다는 걸 어디에서 들은 기억이 있다. 덕분에, 벽을 타고 오르는 건 문제가 없었다.

총 다섯 층으로 구성되어 있는 요새였다. 우리의 목적지인 증기 배출구는 요새의 후방 3층 즈음에 위치하고 있다. 요새 벽을 기어올라 3층에 도착한 우리는 천천히 후방으로 돌아갔다.

"찾았다."

30분 정도가 더 지나고 나서, 우리는 거대한 증기 배출구를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바로 시작하죠."

배낭에서 필요한 것들을 꺼낸다. 청백색 금속으로 만들어낸 상자, 그리고 그 위에 덮을 뚜껑까지. 먼저, 상자를 증기가 배출되는 구멍 바로 옆에 아슬아슬하게 두고, 서지현이 먼저 들어갔다. 나는 상자를 덮을 뚜껑을 들고 무게추 역할을 해줄 쇳덩이와 거기에 연결된 긴 쇠사슬을 꺼내들어 상자에 단단히 묶었다.

"준비 되었지?"

내 말에 서지현이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둘.

나는 그대로 무게추 역할을 하게 될 쇳덩이를 힘껏 발로 찼다.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쇳덩이가 증기 배출구 쪽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거기에 연결된 쇠사슬이 차르르르 하는 소리를 내며 쇳덩이가 떨어진 장소 쪽으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한다. 저 쇠사슬의 길이가 다 되고 나면 사슬과 연결된 상자도 증기 배출구 안으로 빨려들어갈 것이다. 그 전에...!

나는 재빠르게 서지현이 먼저 들어가 있는 상자 쪽으로 달려 안에 몸을 밀어넣은 다음 들고 있던 상자 뚜껑을 위에 덮고, 뚜껑 안쪽에 만든 손잡이와 상자 바닥에 만들어 둔 손잡이를 꽉 잡고 당긴 상태로 침을 삼켰다. 서지현도 마찬가지로 상자 바닥의 손잡이와 뚜껑의 손잡이를 양 손으로 꽉 잡고 당겼다.

후욱, 하는 느낌과 함께 우리가 들어간 금속 상자가 증기 배출구 안으로 빨려들어간다.

"으아아아아아아!"

"꺄아아아아아아!"

우리는 무중력 상태에서 자유낙하하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온 몸을 때리는 격렬한 충격. 그리고 뿌와아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뿜어진 증기가 우리가 들어있는 상자를 번쩍 하늘로 들어올렸다가 다시 바닥으로 내동댕이 친다. 아프다.

"지금!"

한 번 뿜어내고 나서 바로 뿜는 경우는 없다. 우리는 곧바로 상자 뚜껑을 열고 나왔다.

"..."

거대한 황동 파이프의 안에서. 나와 서지현으 후우, 하고 숨을 내쉰 다음 곧장 움직였다.

"빨리."

나는 더듬더듬 이전에 목걸이를 통해 확인했던 요새 내부의 구조를 떠올리며 벽을 두들겨 보기 시작했다. 분명히, 이 파이프와 요새 내부가 벽 하나 정도로 막혀있었던 곳이 있다. 몇 번 황동의 파이프 벽을 두들기던 나는 이내 자리를 찾아내고 미친듯이 수확자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난자된 파이프가 잘려나가고, 그 너머의 금속이 나와 서지현의 칼질과 낫질에 잘려나가기 시작한다.

"젠장, 또 올라오고 있어!'

발을 타고 증기가 파이프를 타고 올라오는게 느껴진다. 서두르지 않으면 수육행이다! 나와 서지현이 무기를 휘두르는 속도가 더 빨라졌고, 그 사이 증기가 파이프를 타고 쭉쭉 우리가 있는곳까지 향하는 소리가 들린다. 마침내 지나갈 수 있을 만한 구멍이 뚫리는데 성공하고, 나는 서지현을 그 구멍 안으로 밀어넣고, 그 즉시 그 구멍 안쪽으로 몸을 던졌다.

구멍을 통과한 나와 서지현은 곧바로 구멍 옆의 벽면에 바짝 붙었다.

"... 덥고 축축해."

푸화아아아아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파이프를 타고 올라온 증기의 일부가 우리가 낸 구멍으로 쏟아져 나온다. 습하고 덥다.

"저 파이프 안에 남아있었으면 겪게 될 더위와 축축함에 비하면 별 거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지. 서지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지금 쯤이면 우리의 침입을 알았겠..."

말을 이어가려고 하는 순간 천장 구석에 위치한 영사기가 눈에 들어온다. 아 젠장. 어쩔 수 없다. 목걸이를 활용 할 수 있는 시간은 3분 뿐이었고, 파이프 쪽에서 내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손거울이 필요했는데. 파주에서 깨먹었잖아. 그나마 가장 필요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포기한 건데 이게 이렇게 아쉬울 줄이야.

바람개비때도 그렇고 말이지, 무슨 버려진 장비들이 '감히 날 버려? 엿이나 먹어라!' 하고 외치는 것 같은 상황이 이어진다.

- 요새. 내부 침입자. 확인.

괜찮아. 어차피 걸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요새 안으로 들어온 이상에는 목적은 달성한거다. 요새 외부에 설치된 무식한 주포들을 요새 안에다가 때려박을리는 없잖아. 애초에 설계 자체도 그런 행동이 불가능하게 만들어져 있을거다.

"움직이자."

우리가 도착해야 하는 곳은 지하로 뻗은 파이프를 통해 열을 빨아올리고, 그 열을 통해 증기압을 만들어내는 장소다. 이 거대한 요새의 심장. 거기만 어떻게든 멈추는데 성공하면 된다.

"... 뭐 잊은 거 없어요?'

서지현의 중얼거림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잊지 않았어. 잊었을리가 있냐."

카피라는 왜 조용할 걸까. 우리가 여기에 도착했다는 걸 아직 몰라서 그런 걸까. 보통, 우리가 랜드 마크에 도착하게 되면 신나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랜드 마크를 강화하곤 했는데.

"아 싫어."

극혐이야. 우리가 달리고 있는 복도의 벽면에 뭔가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너무나도 익숙하고, 너무나도 꼴보기 싫은 장미 문양이다.

[카피라가 랜드 마크, 황동요새의 중앙통제장치에 여분의 힘을 불어넣습니다. 중앙통제장치가 세월과 기술의 힘을 뛰어넘습니다.]

뛰어넘지 마 이 새끼들아. 니들 미신 싫어한다면서! 지조 없는 자식들. 강해진다고 하면 그냥 넙죽 받아먹는구나.

하긴, 싫어한다고 해도 카피라의 힘은 거부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긴 하지. 싫어도 거절 할 수 없는 힘쎈 강간범 같은 괴물이다.

[요새의 중앙 해석기관 디렉토르 IV가 자기인식형 해석기관 프로페타 II로 업데이트 되었습니다.]

- 대상 인식이 완료되었습니다. 대상의 완전 격멸까지 내부 보안장치를 가동합니다. 침입자의 예상 경로에 해당되는 장소를 격벽으로 폐쇄합니다.

그리고, 나는 이제 머리가 좋아졌다는 걸 증명하는 것처럼 스피커를 통해 전달되는 목소리가 단어의 나열이 아닌 제대로 된 문장을 말하기 시작한다.

"망할 뿔 달린 꼬맹이 계집. 이거 끝나고 인천 앞바다에서 보자."

여태동안 시킨 개고생을 몇 배로 되돌려주지. 그냥 무릎 위에 엎어놓고 엉덩이 때리는 정도로는 안 끝날 줄 알아라. 나는 이를 갈면서 우리의 진행 경로 바로 앞에 뚝 하고 떨어진 두터운 금속제 격벽을 노려봤다. 더럽게 튼튼해 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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