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
모던 타임즈
김수빈의 죽음은 병원에 머무르는 생존자들에게 알려야 한다.
우리는 타버린 김수빈의 시체를 챙겨서 병원 주차장에 내려놓고, 생존자들에게 지금 일어난 일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그리고, 이야기를 하던 와중 갑자기 누군가가 크게 외쳤다.
"당신들이 다 망쳤어!"
우리가 김수빈을 처리하고 나서 다른 생존자들 중 하나에게 제일 처음 들은 말이다. 꽤나 강렬한 인상을 주는 한 마디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녀석을 바라봤다.
물론, 딱히 칭찬 받고 싶어서 한 일은 아니지만. 설마하니 우리가 다 망쳤다는 식의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망쳤다니, 뭘?"
이야기나 한 번 들어보자. 혹시 몰래 김수빈을 사랑했던 사람이기라도 한 거냐. 내 말에 녀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이제 어떡할거야. 식량은 어떻게 구해오고, 다치면 누가 치료해주고!"
"김수빈 씨는, 어쨌거나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 주던 사람이었다!"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대충 이해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또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 어쨌든 마음대로 날뛰던 폭군이라고 해도 안전과 보급을 책임져주던 자기들의 왕이 죽어서 굉장히 화들이 나신 모양이다. 실제로 김수빈이 없다면 이 친구들은 포격을 피할 가능성이 없고, 그렇다면 평택을 빠져나가지 못하는 이 사람들은 죽는 거 말고 방법이 없으니까.
이거 참, 큰 실수를 해버렸군 그래. 서지현이 녀석들의 대답을 들은 다음, 픽 웃고는 대답했다.
"맞아요,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당신들을 위해서 제가 가만히 꾹 참을 걸 그랬어요. 그 여자가 남자들을 시켜서 저를 일주일 정도 강간시킨 다음, 그 다음에 끌고 가서 분만대에 눕혀놓고 강제로 범하는 걸 꾹 침고 있었어야 하는데. 손 한 번 휘두르면 싹 쓸려나갈 녀석들인데도 불구하고. 그렇죠?"
니들 미쳤냐? 니들이 뭐라고 우리가 그런 일들을 감수해가면서까지 그런 식으로 행동해야 하는데? 서지현의 빈정거림에 사람들이 어금니를 꽉 물고 서지현을 응시한다. 그 장면을 보던 나는 허허허 하고 웃은 다음에 말했다.
"우리가 니들을 뭐하러 책임져? 혹시 예전에 나 본 적 있는 사람 있나?"
내 말에 녀석들의 시선이 더욱 더 사납게 변했다. 서지현은 모여있는 생존자들과 눈을 마주치고 있다가 말했다.
"김수빈 씨가 죽었으니, 다치면 치료해 줄 사람이 없군요. 슬퍼라. 그럼 제가 여기에 있는 사람들을 다 조져놓으려 들면, 그대로 꼼짝없이 죽게 되겠네요. 제가 이해한게 맞나요?"
서지현의 말에 곧바로 사납게 변했던 녀석들의 눈빛이 조금 떨리기 시작한다. 이거 완전 바보들 아니야. 서지현은 그런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이내 쯔, 하고 혀를 차고 말했다.
"그냥 입 닥치고, 얌전히 찌그러져 계세요. 여태동안 그래왔듯이. 왜 이제와서 유난을 피우는 거에요?"
나는 날이 바짝 서 있는 서지현의 말을 받았다.
"맞아, 그게 댁들 특기잖아.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이해가 잘 안 되네."
어제까지 옆에 있었던 여자가 병원 2층 산부인과로 끌려가서 김수빈에게 강간당해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잖아. 멀쩡한 사람 뽑아내서 포격을 유도하는 미끼로 쓸 데도 침묵했었잖아. 그렇게 침묵을 금처럼 여기던 사람들이 왜 이제와서 갑자기 말문들이 트인걸까.
뭐, 내가 이 사람들을 질책하고 싶어서 그런 말을 꺼낸게 아니다. 애초에, 오래 살고 싶다면 자기보다 강해보이는 사람에게는 함부로 굴지 않는게 정석이다. 많은 책들에서 인생의 주인공은 당신이라고 써져 있지만, 실제로는 아닌 경우가 너무 많으니까. 이 사람들이 한심한 것도 아니고, 충분히 그렇게 살아왔던 건 이해 할 수 있기 때문에 경멸할 일도 아니다.
문제는, 여태동안 그렇게 잘 살아왔으면서 이제와서 왜 이러는 걸까? 라는 질문이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한다 싶으면 갑자기 왜 저러나 궁금해지는 것처럼, 나도 그런 정도의 순수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엄청 만만해 보이는 걸까.
"우리는 김수빈 씨에게 저항 할 수 없었다고! 우리라고 그게 좋아서 받아들인 건 줄 아나!"
그래, 우리가 만만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한 녀석의 말에 나는 와, 하는 소리를 내고는 주차장에 방치되어 있던 차 한 대를 발로 힘껏 찼다. 자동차는 구겨진 채 맹렬한 속도로 병원 밖을 향해 쏘아져 나가, 인근의 상가 외벽에 깊숙하게 박혀들었다.
"친구, 잘 생각해봐. 그럼 우리에게는 저항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거야?"
길 가다가 발에 걸린 깡통 차는 것 같은 느낌으로 찬 거지만, 그것만으로도 모두의 입을 닥치게 하는 놀라운 효과를 볼 수 있었다. 다들 그런 생각을 하는 거겠지. 저 녀석이 찬 게 자동차가 아니라 우리 머리였으면 어떤 결과가 도출되었을까.
"저항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확신이 좀 심어졌나? 그럼 이전에 하던 거 마저 하라고."
입 다물고, 지금 상황을 받아들여. 그냥 길 가다가 벼락 한 번 맞았다고 생각하고 털어낸 다음 그냥 살던데로 사는거야. 녀석들을 바라보던 나는 말을 이었다.
"우린 너희들에게 신경 쓰지 않는다. 필요한 건 이 안전지대지, 댁들이 아니야. 어떻게 살 건 너희 알아서 살아."
시간이 없다. 까놓고 말해서, 지금 이 순간에도 서울의 생존자들은 부지런히 카피라의 공세를 막아내고 있을거다. 이 친구들이 자기들이 모시던 폭군의 죽음으로 인해 패닉에 빠졌다고 해도 그걸 다독여 줄 이유도 없고, 다독일 이유도 없다. 그럴 시간 있으면 하루라도 빨리 랜드 클리어를 성공시켜야 한다.
"그런, 무책임한 말이 세상에 어디있습니까..."
우리에게 항변하는 목소리는 풀이 팍 죽었고, 존대말로 바뀌어 있었다. 이제야 녀석들도 우리의 눈치를 보고, 지금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기 시작한 모양이다.
"아, 지켜야 할 규칙이 있긴 하네."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녀석들을 슥 훑어보고 말했다.
"이 안전지대 안에서, 강간하는 새끼는 나한테 뒤진다."
딱히 도덕적인 이유가 있어서 하지 말라는게 아니다. 그냥 내가 보기 싫어서 하지 말라는 거다. 내가 그쪽 분야에는 아주 학을 뗀 사람이거든. 일종의 개인적인 트라우마 같은 거다.
"어쨌든, 우리는 할 말 다 끝냈다. 우리는 평택에 온 목적을 달성하기 전까지 여기에 머무를 거고, 그 동안에 여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건 신경쓰지 않아. 딱 세 가지만 지키라고."
우리 귀찮게 하지 마라. 협조를 요청하면 곱게 협조해라. 그리고 강간 금지. 끝.
나머지는 알아서들 해. 니들끼리 계급놀이를 하건, 이쌰이쌰 힘을 합쳐서 새마을 운동을 펼치건 신경쓰지 않는다. 감방을 나올 때부터 지금까지 나와 서지현은 쭉 지나가는 나그네였을 뿐이다. 이제 와서 갑자기 중세시대 영주처럼 영지 경영하면서 시간을 떼울 생각은 없다.
물론 내가 아니라 김용천이 여기에 왔었다면 이 사람들에게 일말의 책임감 같은 걸 느꼈을지도 모르고, 이 사람들에게 멋들어진 연설을 해서 마음을 사로잡았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런 거 할 줄 모르고, 별로 하고 싶지도 않다.
우리는 평택에 구원자로서 온 게 아니다. 구원자가 필요하다면 차라리 종교에 귀의하는 편이 어떨까 싶은데. 전할 말을 다 전한 우리는 녀석들이 침묵하고 있는 걸 확인한 다음, 다시 병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평택은 베이스 캠프로 쓸 수 있게 되었으니까."
다음으로 진행해야 하는 일은 조사다. 어디에 있을까. 그리고 어떤 구조로 만들어져 있을까. 어떻게 들어가야 할까. 그런 것들을 조사하려면 아무래도 하루로는 부족할거다.
"포탄이 떨어지는 걸 보면 대충 방향을 짐작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 하다못해 방향이라도 알게 된다면 조사 범위를 많이 좁힐 수 있을거다. 어쩔 수 없네.
"지금 바로 외출할까."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미끼가 될 테니. 잘 살펴보세요."
나는 그 말에 움찔했다. 물론, 감각 능력치가 높은 내가 포탄이 떨어지는 걸 보는게 맞기는 한데.
"내가 하는게 어떨까."
서지현이 고개를 저었다.
"걱정해주시는 건 알겠는데, 알잖아요? 제가 확인하는 것보다 당신이 확인하는 편이 더 빨라요."
"분명히 포격도 기관총처럼 네 방어벽이 제대로 먹히지 않을거야."
그게 걱정이다. 녀석들이 쏟아낼 포격은 그냥 포격이 아니다. 하다못해 기관총으로 뿌려대는 총알도 막아내는 걸 힘들어 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력 능력치 만큼은 압도적인 수준을 자랑하는 서지현이. 따라서, 포격도 회피에 실패하게 된다면 꼼짝없이 서지현은 중상을 입게 될 것이다.
"괜찮아요. 어쩔 수 없잖아요. 감수해야 하는 위험이라면 빼려고 들 필요 없죠."
서지현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고, 나는 그런 서지현을 바라보았다.
"안돼요. 바꿔 줄 생각 없어. 제가 포격을 유도하고, 당신은 주변에서 떨어지는 포격을 확인해서 방향을 특정하세요. 이상 끝."
서지현은 단호한 어투로 말을 마치고 나서 주먹으로 테이블을 세 번 크게 두들겼다. 더 이상의 반론을 허용하지 않는 그 근엄한 모습에 나는 복종 할 수 밖에 없었다.
"알았습니다, 판사님."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러가지 일이 있었으니까 오늘 하루 쉬자, 라고 하기에는 서울의 상황이 이제나 저제나 걱정이다.
"저기, 귀 핥아줘요."
서지현의 말에 나는 나서던 걸음을 멈춰야 했다.
"나야 고마운데, 갑자기 왜?"
내 말에 서지현이 대답했다.
"그 여자가 핥았었던 느낌이 남아있어서."
뭐야 그게. 소독이라도 해달라는 건가. 죽은 강간범이 들으면 꽤나 슬퍼할 이야기군. 나는 서지현의 귀를 핥으면서 손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서지현이 내 머리를 양 손으로 끌어안고, 입에서 야릇한 소리를 흘리기 시작한다.
"있다가, 새벽에 갈까?"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학, 그럴 수는 없어요. 으음, 서둘러야 하니까."
나는 서지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허벅지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맨날 만진다고 해도, 과연 김수빈이 한 말처렁 놀라울 정도의 감촉을 자랑하는 허벅지다.
"따지고 보면 김수빈의 말도 틀리지는 않네. 서른 넘은 나에게 너는 많이 과분해."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저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세요. 그런 쓸데없는 소리 할 시간 있으면 빨리 더 해줘요."
나는 그 말에 입을 다물고 다시 서지현의 귀를 입술로 매만지기 시작했다. 귓볼을 빨자 서지현이 다리를 모으고 몸을 흠칫거리는게 재미있어서 몇 번 더 하고, 나는 서지현의 몸에서 떨어졌다.
"이제 괜찮아?"
내 말에 서지현이 배낭에서 물을 꺼내 들이키고는 후우, 하고 숨을 내쉰 다음 침을 꼴깍 삼킨 다음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근데 다른 방식으로 안 괜찮아진 느낌이에요."
참자고 한 건 너야. 자기 말은 자기가 감당해야지. 나는 서지현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함께 병원 밖으로 향했다.
"좋아, 영사기 친구들."
밤과 낮의 구분이 없이 하늘을 떠다니는 영사기들이 눈에 들어온다. 나름대로 조명장치도 달려 있어서, 멀리서 보면 꼭 개똥벌레 무리가 돌아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차이가 있다면, 저 개똥벌레들에게 걸린다면 곧바로 머리 위로 떨어지는 살벌한 포격을 대비해야 하다는 점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