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
모던 타임즈
나는 멍하니 건네받은 물건들을 바라보다가 깊은 한숨과 함께 의자에 주저앉아 중얼거렸다.
"이제는 너에게 달라붙는 남자 뿐이 아니라 여자까지 걱정해야 하는 신세라니. 기구한 내 팔자야."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야. 서지현이 내 말에 대답했다.
"기구한 팔자라. 레즈가 아닌데 여자에게 구애받는 제 팔자가 더 기구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세요?"
그것도 그렇지 사실, 생각해보면 지금 내 머리 속에 휘물아치는 복잡한 감정은 서지현에게 비교해보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을까.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열어 질문을 던졌다.
"어떤 기분이야?"
내 질문에 서지현이 대답했다.
"당신 좋다고 달라붙는 남자가 있으면 기분이 어떨 것 같아요?"
... 대충 알 것 같다. 절대 좋은 기분은 아니겠구나. 나는 살짝 놀리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한 마디 했다.
"그러지마, 성적 소수자를 존중해야지."
서지현이 내 말에 곧장 대답을 돌려줬다.
"당연히 존중하죠. 어디보자, 당신이 싫어하는 스프밥을 예로 들어볼까요. 제가 스프밥을 먹는 행위를 존중하는 거랑, 제가 당신에게 스프밥을 먹이려고 강요하는 걸 억지로 받아들이는 건 차이가 있잖아요?"
그건 그렇지. 성적 소수자의 취향을 존중한다고 해서 자신도 그 성적 소수자의 취향에 억지로 동참해야 할 필요는 없다. 카페 한 쪽에서 남자랑 남자가 키스하고 있는 걸 억지로 떼어놓는 녀석도 이상한 놈이지만, 마찬가지로 멀쩡히 커피 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입술을 들이미는 동성애자도 정상이 아니잖아.
"어쨌든, 너무 속단하지는 말자. 혹시 모르잖아? 네가 옛날 옛적에 떠나보낸 자기 딸이나 여동생과 굉장히 닮아서 잘해주는 걸 지도 모르고."
서지현이 내 말에 하하, 하고 찬바람나는 비웃음을 날렸다.
"차라리 드라마를 쓰지 그러세요? 하지만, 뭐... 그렇네요. 대놓고 사람한테 대고 물어보는 것도 좀 그렇고."
아직은 잘 모른다. 일단 순조롭게 머무를 장소를 확정받았다는 건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상황이니까. 조금 더 지켜보자. 괜히 그냥 뭔가 다른 목적이 있어서 잘 대해주는 사람에게 '실례지만 혹시 레즈세요?' 같은 이야기를 했다가는 상대가 어떻게 반응 할 지 알 수 없으니까.
"아니면, 한 번 직접 확인해 보는 방법도 있겠지."
내 말에 서지현이 오호, 하는 감탄사를 작게 냈다.
"마침내 그 능력을 사생활 침해에 사용하시는 군요. 참고로 저는 오늘 검은 팬티 입었어요. 말해드렸으니 훔쳐보지는 마세요."
나는 서지현의 말에 대답했다.
"알고 있어. 오늘 아침에 봤잖아."
나 끌어안고 알몸으로 자다가 일어나서 속옷 챙겨 입은 사람이 누군데. 그리고, 누가 그런 소리 들으면 크게 오해할거다. 나는 결코 내 사적인 흥미를 충족하기 위해 남의 사생활을 염탄하는게 아니다.
서지현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어떻게 알았어요? 이불 아래에서 갈아입었는데."
나는 서지현의 말에 대단히 놀란 표정을 지어주며 말했다.
"세상에, 팬티 색을 숨기고 싶었으면 잠자리 옆에 갈아입을 속옷을 두지 않는 편이 어떨까."
내 말에 서지현이 침묵했다. 그 사이 나는 목걸이를 활용해 감각을 접고, 평택성모병원 안을 샅샅이 확인하기 시작했다.
"..."
그리고 3분 뒤, 나는 접어두었던 목걸이를 다시 펴고 눈가를 엄지로 꾹꾹 누르다가 약간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레즈 맞아. 그것도, 약간 하드한 레즈야."
내 말에 서지현이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레즈면 레즈지, 하드한 레즈는 또 뭐에요."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나는 후우, 하고 숨을 내쉰 다음에 중얼거렸다.
"모조 성기가 달려있는 팬티를 입고, 사슬로 묶어놓고 고무공을 입에 물린 여자 위에 올라타서 허리를 흔들며 목을 조르고 있으면, 하드 한 편 아닐까?"
혹시 이게 소프트하다고 생각한다면 너와 나 사이에 이루어지는 잠자리는 너에게 있어서는 너무 밍숭맹숭한 잠자리였던 거라고 밝혀지는 건데. 내 말에 서지현의 안색이 약간 질렸다.
"약간 하드? 대놓고 하드한데요. 아래에 있는 여자는 어때요, 즐기는 중이에요?"
그게 말이지... 차라리 즐기는 중이라고 한다면, 하하하 과격한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구나 하하하 하고 넘어갈텐데.
"전혀 아닌 것 같았어."
서지현의 질문을 받은 나는 이내 생각을 바꿔먹었다. 저 김수빈이라는 여자는 하드한 레즈 같은게 아니다.
사실, 방금 전에 내가 목걸이를 활용해 느끼게 된 상황을 생각해보면... 거기에 하드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건 그냥 강간이라고 볼 수 밖에 없는 방식의 성행위였다. 김수빈이라고 하는 중년 아가씨는 레즈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명백한 강간범이다. 확언 할 수 있다. 다 떠나서, 그냥 쓰레기라는 뜻이다.
그런 여자가 우리에게 이렇게까지 잘해준다는 건, 결국 그 여자의 목적은 방금 전에 내가 본 것과 같은 장면을 서지현을 통해 연출하고 싶다는 뜻이니까.
"랜드 클리어는 이 병원부터 개운하게 쓸어낸 다음에 진행하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당장 대우가 나쁘지 않으니 그냥 지켜보자. 라고 하기에는 뒤통수가 지나치게 근질거리는 상황이다. 서지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라면 참을 수 있어도, 오늘 처음 본 여자가 저를 사슬에 묶어놓고 고무공 물린 다음에 목 조르면서 허리 흔드는 꼴은 용납 못하죠."
서지현의 대답을 들은 나는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나는 되는거야?"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까지나, 꾹 참는 거겠지만요."
그럼 하지 말라는 소리네.
"괜찮아, 어차피 그런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내 말에 서지현이 놀리는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맞아요. 어차피 포도나무 위에 걸린 포도는 신포도였어요."
이솝우화라, 사람을 놀리는 데에는 참 재능이 출중하다니까.
"언제 시작할까."
서지현이 내 말에 대답했다.
"딱 봐도, 저녁 식사 즈음 해서 우리를 부를 생각인 모양인데. 그때로 할까요?"
그래, 괜히 지금 소란 피워봤자 빠르게 제압하지는 못할거다. 차라리 얼굴 맞대고 있을 때 확 덮쳐들어서 후딱 제압하는게 좋겠지.
"식사에 이상한 걸 타 놓았을 가능성도 있어."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시간을 확인했다.
"어차피 저녁식사 시간이 지나기 전에 목걸이를 다시 사용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 그리고 음식에 장난질을 쳤으면 목걸이를 통해서 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음식에 손을 대지 않으면, 너도 손 대지마."
위험하다는 뜻이니까.
"아, 설마 목걸이로 그 여자의 은밀한 사생활만 구경한 건 아니겠죠."
그럴리가 있냐. 한 시간 마다 딱 한 번, 그것도 3분 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귀중한 골든타임인데 가능한 많은 것들을 파악해야지.
"대충 이 안전지대의 구조도 알아두었어."
지하 1층에 물자가 쌓여있다. 그리고 김수빈이 방금 전까지 강간을 범하고 있던 장소는 2층의 산부인과에 비치된 분만대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하 2층의 대강당에서 생활하는 모양이다.
우리가 있는 9층은 특실들이 있고, 이 중 하나가 김수빈이 평상시에 사용하는 방이겠지. 특실 중 우리의 방을 제외하고 난 나머지 방은 여자들이 머무르는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나머지 입원실들은 나름대로 간부나 그 아래에서 일하는 충성스러운 친구들이 머무르고 있다.
머무르는 생존자의 숫자도 제법 되는 편이다. 생존자는 전부 함해서 대충 600명 정도는 되어 보였다. 파주에 비하면 다소 많은 편인 이유는 역시 그 강간범이 치료와 회복에 특화된 스킬을 배웠기 때문이겠지. 죽을 것처럼 아파도 어쟀든 돌아오는데 성공하면 다시 김수빈이 목숨줄을 붙여놓는다.
'그게 다행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네요."
"다행인 일이지."
죽는 것 보다는 어쨌든 사는 편이 좋다. 살아있으면 어쨌든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가능성이 남아있다는 소리니까.
"지금만 해도 생각해봐. 결국 여기에 우리가 왔잖아."
평택의 생존자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우리는 김수빈을 제거 할 것이다. 그리고 그건 여기에서 포격의 미끼가 되던 사람들과, 김수빈의 노리개로 쓰이고 있던 여자들에게는 나름대로 새 삶이 시작되는 신호탄으로 생각 될 수 있지 않을까.
"그건 그렇네요."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려니 다시 노크 소리와 함께 사람 몇 명이 커다란 나무통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김이 올라오는 걸 보니 목욕물인 모양이다.
"지극 정성이네."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꼭 잡아먹으려고 열심히 양을 살찌우는 양치기를 보는 기분이에요."
"문제는 양이 사실은 양이 아니라 양의 가죽을 뒤집어 쓴 호랑이라는 점이지만."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인 다음 목욕물에 잠깐 손을 담궈서 온도를 확인한 다음에 나를 쳐다봤다.
"먼저 씻을래요?"
"먼저 씻어. 따뜻한 목욕물을 받을 수 있었던게 너 덕분이잖아?"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가리켰다.
"그럼, 잠시 나가서 기다려 주실래요? 다 씻고 나서 부를게요."
서지현의 부탁에 나는 군말 없이 나가주었다. 나가서 기다리고 있으려니, 희미하게 말소리가 들려온다.
"네 생각에는 어떠냐?"
"뭐가, 저 여자?"
아, 서지현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다. 나는 이야기를 흠쳐듣기 시작했다.
"겉보기에는 굶은 것 같지도 않고, 옆에 남자도 끼고 있잖아. 거절하겠지."
그 대답을 들은 다른 녀석이 큭큭거리며 웃는다.
"꼭 좀 그래줬으면 좋겠단 말이지. 그 년 가슴 봤냐? 내가 봤을 때는 F컵은 되어 보였어. 씨발 젖 짜면 분당 3L는 나오겠더라."
"미친 새끼."
그래, 너 말 한 번 잘 했다. 저 미친 새끼. 이야기를 해도 어쩜 저렇게 저질스럽게 할까. 어차피 싸우는 와중에 꽤 많은 숫자가 죽을텐데 어차피 죽을 놈 지금 죽여버릴까. 그리고 F컵 아니야. 하나 더 커 임마.
"얼씨구, 어차피 너도 기대하고 있잖아? 대부분 계집들이 처음에 싫네 어쩌네 하다가 잡혀가서 일주일 정도 들입다 박히고 나면 김수빈에게 엎드려서 제발 따먹어 달라고 애원하는거."
대충 어떤 식으로 일이 돌아가는지는 알 것 같다. 순순히 음식이고 물이고 다 주고, 좋은 대우 해주며 권유한다. 거기에서 상대방이 오케이 싸인을 내리면 그 이후로 이런 것들을 제공해주면서 노리개로 삼고, 거절하면 남자들 사이에 던져놓고 방치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가 스스로 항복하면 노리개로 삼는다.
그럼 음식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지만. 혹시 모르니까.
"뭐, 남자 새끼만 불쌍하지."
그 말에 다른 녀석이 웃음을 흘렸다.
"남자한테 빼앗기는 것도 아니고, 여자한테 자기 여자 빼앗기면 기분이 어떨까."
어떻기는 좆같겠지. 알면서 물어보는 건 뭐하자는 수작일까. 쓸데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문이 열리고 서지현이 머리를 수건으로 비비면서 말했다.
"다 씻었어요."
둘 다 샤워를 마친 다음, 나는 서지현에게 내가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다방면으로 대단히 미친 여자네요."
서지현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자기 손을 이리저리 바라보다가 말했다.
"아무리 힐러라고 해도, 굳이 살려 둘 이유는 없겠죠?"
당연하지. 폭력적인 성취향을 가진 강간범 힐러 같은 건 우리에게 필요없어. 마조히스트가 아니라면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을걸.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1시간 정도 더 기다리고 있으려니 문이 열렸다.
"식사를 하러 오라고 하신다. 예의를 차려서, 실수하는 일이 없도록."
우리는 미리 예상했던 것처럼 김수빈의 저녁 식사에 초대되었다. 그럼, 가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