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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탈옥했다-200화 (200/237)

# 200

모던 타임즈

뭐, 도시의 모습이 바뀌는 건 한 두 번 보는 광경이 아니다. 용인도 그랬었고, 수원도 그랬었고, 서울도 그랬었고... 차라리 그래서 충격이 좀 덜했을지도 모른다. 충격이 덜해서 지금 딱 이 정도로만 놀란거다. 정신을 차린 나는 고개를 휘휘 저은 다음 서지현을 보며 말했다.

"일단, 병원부터. 어디에 있었더라."

내 말에 서지현이 멍하니 눈 앞의 광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평택성모병원은 세교동에 있어요."

세교동이라. 업계에서는 꽤 유명한 사건이 있었던 곳이라 위치까지 외웠던걸까. 우리는 역 사무실을 뒤져 평택의 지도를 찾아낸 다음, 위치를 확인했다.

"여기에서 그렇게 멀지는 않아."

다행인 일이다. 어디로 이동해야 할 지 대충 정하고 나서 하늘을 쳐다보니, 참으로 기괴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풍선?"

하늘에 풍선들이 둥실둥실 떠 있다. 네 개에서 다섯 개 정도의 풍선이 한 곳에 묶여있는 형식이다. 그리고, 그 풍선들 아래에는 옛날 옛적 광부들 석탄 캐고 방직공들 공장에서 일할 적에나 쓰였을 법한 영사기가 하나씩 달려 있었다. 영사기는 이따끔 푸슈, 푸슈 하는 소리와 함께 증기를 뿜어내며, 그 추진력을 이용해 이리저리 옮겨다니고, 영사기의 방향을 조정하는 중이다.

"..."

힘든 와중에도 문화생활을 잊지 말라는 뜻에서 영화 틀어주려고 띄워놓은 건 아닐테고. 딱 봐도 저거 영사기의 형태를 한 정찰기 같은데.

"포격이라고 했죠? 평택의 이상현상이."

그래, 진입하면서 눈 앞에 떠올랐던 미션은 분명히 평택에서 일어나는 이상 현상을 포격이라고 규정했었다. 저 하늘을 떠다니는 영사기들이 포격과 관련이 없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모텔을 대실한 남녀가 정말로 모텔 안에서 술 깰때까지 쉬기만 하고 나올 확률과 비슷할 것 같은데.

"걸리지 말자."

괜히 걸렸다가 하늘에서 포라도 떨어지기 시작하면 여러가지로 일이 꼬인다. 어떤 식으로 포격이 떨어지는 건지 궁금하기는 하지만, 궁금한 거 다 알려고 하다가는 단명하기 십상이지. 우리는 최대한 하늘을 날아다니는 영사기들에게 걸리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평택성모병원으로의 이동을 서둘렀다.

"저건."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저 멀리 평택성모병원 앞에 걸려있는 사람들을 응시했다. 기둥 위에 팻말이 박혀 있다.

"공납의무 소홀이라."

팻말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고, 서지현이 옆에서 작게 한숨소리를 냈다.

"이런 말 하는 것도 웃기지만, 그게 죽을 이유가 될 수 있을가요."

서지현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안 죽었어, 살아있어."

"얼씨구. 그래도 죽는 건 아깝다 그건가요."

그렇겠지, 병원 안의 생존자들이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병원의 우두머리 입장에서도 공납의무 소홀이라는 사소한 명목으로 사람 모가지를 따서 걸어버리는 건 아까웠던 모양이다.

"협조적일 것 같지는 않겠어."

"그렇겠죠? 그나저나, 간만에 만나보는 포악한 친구들이네요."

그래, 요즘 우리가 접촉한 사람들이 썩 이런 세상에서는 보기 드문 인격자들이긴 했지. 원래 끼리끼리 모인다고, 서울에 모인 녀석들은 어딘지 모르게 하나같이 순둥이들이었다.

하지만 역시 망한 세상이라면 이런 사람들이 자리잡고 있는게 더 정상적이잖아.

일단, 밖을 돌아다니는 풍선 달린 영사기들을 피해 안전히 쉬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평택 성모병원이 필요하다. 그러니 별 수 있나. 별로 그러고 싶지 않다고 해도 들어가는 수 밖에.

"일단, 우리에게 적대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는 않아요.

우리는 정의와 올바름에 미친 사람들이 아니다. 평택에 온 것은 포인트를 벌기 위해서니까. 녀석들이 우리에게 순순히 협조해서 머무를 장소를 제공해주고, 우리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발 벗고 나서서 녀석들을 두들겨 팰 생각은 없다.

"멈춰."

그리고, 문 앞에 서 있는 녀석들이 우리에게 활을 겨누었다. 활이라. 나는 입맛을 다신 다음 말했다.

"안에 들어가고 싶은데."

내 말에 녀석들 중 하나가 우리를 겨누고 있던 활시위를 거두며 대답했다.

"밖에서 흘러들어온 생존자인가."

그는 그렇게 말하고 우리를 슥 훑어본 다음에 말했다.

"장비는 전부 반납해. 그러지 않으면 안으로 들일 수 없다."

허허허, 나는 그 말에 녀석들을 바라보다가 문 앞에 세워져 있는 기둥에 걸린 녀석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친구들은 덕장에 걸린 황태 꼴로 있는거지?"

내 말에 녀석이 대답했다.

"팻말 보면 모르나. 공납의무 위반이다. 매주 할당된 양을 채우지 못하면 응당한 벌을 받지."

그 와중에 기둥에 매달린 녀석이 힘겹게 한 마디 중얼거렸다.

"물..."

목소리를 들은 녀석이 귀찮다는 듯한 표정으로 기둥에 묶인 녀석에게 한 마디 했다.

"아, 목이 마르셔? 그럼 기둥형 말고 다른 걸 시켜줄까. 안 그래도 자리가 하나 비어있던 참인데."

그의 말에 기둥에 묶여서 가늘게 숨을 할딱거리고 있던 녀석이 중얼거렸다.

"제발, 그건..."

기둥에 묶인 녀석의 말을 들은 녀석이 얼굴을 잠깐 구겼다.

"무슨 일인데."

내 말에 경비가 나를 슥 보고는 대답했다.

"간단해, 안전지대 밖에 싸돌아다니는 그 풍선달린 영사기는 너희들도 봤겠지."

그래, 봤지.

"그거랑 관련 있는 일인가요?"

서지현의 말에 남자가 히죽 웃고는 어깨 동무라도 하려는 기세로 서지현에게 다가와 손을 뻗고, 서지현은 슥 하고 녀석이 뻗은 손을 피했다. 잠깐 자기 손을 이리저리 보던 경비가 이내 픽 웃고는 대답했다.

"영사기에 모습이 잡히면, 평택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는 대포가 포격을 시작하거든. 들어오면서 떠오른 문자 읽었잖아?"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은 하품을 한 번 하고 나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포격이라는게 한 번 끝내고 나면 20분 정도는 기다려야 다음 포격을 시작한단 말이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포격이 끝나고 나서 20분 정도는 안전하다는 뜻이야."

그러니까, 일부러 사람 한 명을 미끼로 영사기에 잡히게 해서 포격을 유도한 다음, 20분 사이에 재빠르게 물자를 챙겨나온다는 건가. 나는 이야기를 듣고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노동력 낭비인데. 포격이 떨어지면 그 자리에 있던 녀석은 죽잖아."

내 말에 녀석이 대답했다.

"괜찮아. 미션은 정밀포격이라고 써져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까지 정밀하지 않거든. 뭐, 최소한 중상이지만 죽는 경우는 드물어."

"중상이나 죽음이나."

멀쩡한 한 사람 분의 노동력을 포격 구덩이에 던져버려 못쓰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를 거도 없어 보인다.

"중상과 죽음은 다르지."

뒤편에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곧바로 경비를 서고 있던 녀석들이 확 하고 자세를 바로잡은 다음 뒤로 돌아 깍듯히 인사를 한다.

"김수빈 씨."

김수빈이라. 나는 녀석들이 인사를 건네는 중년 여성을 바라봤다. 한 40대 정도 되었으려나. 몸에는 비싸보이는 모피코트를 입고 있는 여성이 슥 우리를 보다가 서지현에게 시선을 던진다. 잠깐 서지현을 위아래로 바라보던 김수빈이 이내 굉장히 자애로운 미소를 지은 채 말을 건넨다.

"어머, 예쁘기도 해라. 여기까지는 어떻게 왔니?"

서지현이 김수빈의 말에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물어보시는 이유가 뭘까요."

서지현의 말에 김수빈이 웃으며 대답했다.

"혹시, 다친 곳은 없어? 내가 봐줄까?"

말을 하고 있는 김수빈의 눈이 서지현의 몸으로 향해있다. 눈빛이 상당히... 뭐라고 해야 할 지 모르겠다. 그리고, 서지현이 그런 김수빈과 시선을 마주치고 있다 입을 열었다.

"당신이 이 병원을 통제하고 있는 사람인 모양이네요."

"그래."

김수빈이 선선히 동의하고 나서 시선을 경비들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저 둘에게 씻을 물을 덥히고, 잠자리를 마련해줘. 최대한 편안히 쉴 수 있도록."

뭐야, 이 급작스럽게 협조적인 전개는.

"집이라고 생각하고 푹 쉬어. 여기까지 오는데 많이 힘들었을텐데, 분명히 지쳤겠지."

김수빈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한 손을 살짝 들어올렸다. 서지현의 몸에 희미하게 녹색의 빛이 내려앉는다.

"피로가..."

서지현의 말에 김수빈이 웃었다.

"전부 풀렸지? 내가 이런 쪽에 스킬을 많이 투자했거든. 죽지만 않는다면 시간을 들여서 회복시켜 줄 수 있어."

저 말로 상황을 이해했다. 상처를 치료 할 수 있다면 중상과 죽음은 확실히 다르다. 포격에 맞아 어디 하나가 날아가는 정도의 중상을 입어 와도 이 여자가 다시 고쳐놓으면 되는 일이니까. 물론, 자기 몸 하나가 떨어져나가는 충격과 고통으로 인해 입은 정신적인 피해가 있기는 하지만, 몸이 멀쩡하다면야 다시 훌륭한 노동력으로 사용 할 수 있다.

의문 하나가 해소되고, 새로운 의문이 자리잡는다.

이 중년 여성은 우리에게 이렇게 호의적으로 접근하는 걸까. 세상에 목적 없는 호의는 없다. 그렇다면, 이 여자는 도대체 뭘 목적으로 이런 일을 벌이는 걸까. 김수빈이 내 쪽으로 시선을 잠깐 던졌다가 다시 서지현을 바라본다.

"두 사람은, 무슨 사이인지?"

서지현이 김수빈의 말에 간단하게 대답했다.

"애인."

김수빈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짓고 대답했다.

"그렇구나. 자세한 이야기는 조금 나중에 같이 저녁이라도 먹으면서 나누기로 하고, 일단 쉬고 있으렴. 아직 해야 할 일이 조금 남아있어서."

그녀는 말을 마치고 나서 경비병들에게 뭐라고 속삭인 다음에 다시 돌아가버렸다.

"... 이쪽으로 와라. 머물 곳을 안내해주지."

경비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잠깐 서지현을 바라보다가 쯔, 하고 혀를 차고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얼씨구."

경비가 우리를 안내한 곳은 꽤나 커다란 1인용 병동이었다.

"이 방을 쓰면 된다. 김수빈 씨가 따로 부르기 전까지는 편하게 쉬고 있도록. 혹시, 따로 필요한게 있나?"

서지현이 방 안을 살펴보다가 말했다.

"괜찮아요."

서지현의 말에 경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을 나섰다. 곧바로, 침대에 걸터앉은 서지현이 입을 열었다.

"왜 잘해주는 걸까요?"

"내가 하고 싶은 질문이다."

목적을 물어본 것도 아니고, 우리가 강한지 약한지의 여부도 물어보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기둥에 묶여서 물 달라고 애원하고, 풀려나고 싶으면 나가서 포격을 유도하는 미끼가 되라는 식의 제안을 하던 살벌한 분위기 덕분에 나름대로 마찰을 각오하고 접근했는데 뜬금없이 이런 대접을 받으니 의문만 더 커진다.

"새 옷이다."

잠시 뒤에 문이 열리고, 남자 한 명이 들어와서 옷을 포함한 이런 저런 것들을 내려놓고 나갔다.

"에르메스?"

서지현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제품은 에르메스에서 나온 제품인 모양이다.

"비싼거야?"

내 말에 서지현이 대답했다.

"아마 그럴걸요."

서지현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다른 것들을 살펴보다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대부분 여성용품이네요."

"네가 어지간히 마음에 든 모양인데."

서지현이 그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여자들에게 사랑받는 성격의 소유자는 아니에요. 거기에 더해서, 김수빈이 저에게 호감을 느낄 만한 대화를 나눈 기억도 없고."

확실히 그렇다. 서지현은 잠깐 그 물건들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보통, 처음 보는 여자에게 이렇게 잘 대해주는 경우는 남자들이 많아요. 그리고, 그런 남자들의 경우 여자에게 잘 대해주는 목적은 하나죠."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어떻게든 너를 가성비 좋고 깨끗한 모텔로 데려가서 침대에 눕히고 그 위에 올라타겠어, 라는 뜻이다. 문제는 이 선물의 제공자는 여자라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그리고, 서지현의 발언에 따라 바야흐로 새로운 가능성의 지평선이 우리 앞에 열렸다.

"설마, 레즈라던가."

"에이 그럴리가요. 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차고 넘치는 가능성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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