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
모던 타임즈
천공카드는 또 뭐야. 나는 탑승구를 살펴보다가 단말기를 확인하고는 중얼거렸다.
"이거, 영화에서나 보던 건데."
옛날 공장 직원들이 단말기에 카드 같은 걸 밀어넣어서 출근 시간과 퇴근 시간을 입력하곤 하잖아. 그 뭐지, 찰리 채플린의 영화에서 한 번 본 것 같은데. 지금 이 단말기가 딱 그런 용도로 보인다.
박물관으로 가야 할 물건이 왜 버젓이 현역으로 뛰고 있는거지. 하긴, 지금 눈 앞에 떡 하니 서 있는 증기기관차를 보면 저 단말기가 현역이라는 걸로 놀랄 이유는 없어 보인다.
- 천공카드를 제시해 주세요! 미제시 시, 규정에 의거 현장에서 처리합니다!
다시 한 번 황동상이 우리를 향해 크게 외친다. 동시에 끼리릭, 하는 소리와 함께 기차에 달려있던 기관총과 대포가 우리를 향한다. 좋아, 이게 또 이렇게 사람 엿을 먹이는구나. 곱게 기차 타고 평택까지 향하면 된다고는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개같네 진짜."
사람을 엿을 먹여도 어떻게 이딴 식으로 먹이냐. 화약도 불이 붙어야 발사되는 거다. 이미 파주에서 한 번 경험해 봐서 알고 있다.
"화약을 발화하지 못하게 할 수도 없어?"
내 말에 서지현이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카드를 내놓으라고 꽥꽥거리던 기계가 마침내 입으로 호루라기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좋아, 이렇게 된 이상 싸움이다."
기차에 설치되어있던 기관총과 대포들이 우리를 향해 불을 뿜기 시작했다.
문제는, 게틀링과 포격에서 몸을 보호하기 위해 보호막을 만들었던 서지현에게서 발생했다. 표정이 안 좋다. 아니, 창백하게 변해서 몸을 비틀거리고 있다.
공격의 위력을 생각해보면 서지현이 저럴 이유가 없는데. 나는 살짝 당황한 모습으로 그녀를 부축해 재빠르게 쏟아지는 사격의 범위에서 벗어났다. 억지로 보호벽을 유지하고 있던 서지현이 그제서야 긴 숨을 내쉬었다.
"왜 그래."
내 말에 서지현이 대답했다.
"막아내는게 너무 힘들어요.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서지현은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끼릭거리는 소리와 함께 내 쪽으로 포신을 돌리는 화기들을 응시하다가, 손을 뻗었다. 서지현의 손에서 맹렬하게 타오르는 화염구가 만들어지고, 이내 쏘아져 나가 기차를 후려갈긴다.
"이건."
하지만, 그 맹렬했던 기세에도 불구하고 이 잘나신 구식 증기기관차께서는 약간 흔들거린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물론, 그것도 분명히 피해라고 불릴 만한 수준이기는 하지만, 이전까지 서지현이 뿜어냈던 압도적인 화력을 생각해보면 저 기관차에 입힌 피해는 없는거나 마찬가지다.
"환장하겠네."
"... 괜찮아요. 화력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다면 육체 강화 쪽으로 마력을 돌려서 싸우면 되니까."
서지현은 빠르게 냉정을 되찾은 다음, 배낭 안으로 손을 집어넣다가 잠깐 멈칫하고 에노테르 대신 K-2 소총을 꺼내들었다. 방아쇠를 당기자 귀를 찢는 총성과 함께 날아간 몇 발의 총알이 게틀링건에 박혀들었다. 그리고, 톱니바퀴가 헛도는 소리와 함께 총알을 맞은 게틀링은 완전히 무력화 되어 더 이상 총알을 쏟아내지 않는다.
방금 전에 서지현이 뿜어낸, 어지간한 포격 수준에 해당하는 위력의 공격에는 꿈쩍도 않았던 주제에. 그 모습을 확인한 나는 포격과 총알을 피하며 기차 위로 기어올라가 수확자를 휘둘렀다. 까각거리는 감촉과 함께 게틀링과 대포의 포신이 작살나기 시작한다.
"대충 이해했어."
물리 공격은 먹히지만, 마력을 이용한 공격은 제대로 통하지 않는 모양이다.
"임자 만났군."
마력을 활용해 상대를 공격하던 서지현의 입장에서는 곤란하기 그지 없는 상황이다. 차라리 평택 말고 북한으로 갈 걸 그랬나.
"설마 참령도?"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기차의 본체를 향해 참령을 힘껏 휘둘렀다. 서걱하는 느낌과 함께 기차의 외벽에 금이 생겨난다. 한 대로는 확인 할 수 없지. 나는 계속해서 수확자를 휘둘러 참령의 발동 조건인 12번의 유효타를 채워보았다.
이따금 증기 뿜어내는 소리를 내고 있던 기차가 기괴한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기차 안에서 녹음된 목소리가 희미하게 흘러나온다.
- 기체 손상 원인 확인... 미신. 미신 카테고리 확인 중. 저주, 해당 없음. 마력, 해당 없음. 신앙, 해당 없음. 미지의 미신에 의한 기체 손상. 요새에 전보... 송신... 중.
"다행이다."
그래도 참령은 통하는 모양이구나. 그래, 아무리 그래도 이게 어떤 물건인데 저런 고철덩어리 하나 처리하지 못하겠어.
참령이 저 고철 덩어리에게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 건지, 무슨 원리로 작살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먹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참령의 효과가 발동해 작살난 건 증기 기관차의 본체 뿐이다. 그 위에 설치되어있는 기관총과 대포 따위는 멀쩡하게 작동하는 중이다. 저것들은 독립된 개체로 치는 건가.
"통하는 걸 알면 충분해."
원리 따위는 궁금하지 않다. 내가 무슨 괴물학 교수를 할 것도 아니고. 정육점 주인이 푸줏칼에 대해 신경써야 하는 점은 만드는 방법이나 과정이 아니라, 칼이 잘 드나 안 드나 뿐이다. 날만 잘 들고 그립감만 좋다면 푸줏칼이 캔디를 녹여서 만들었건, 종이를 겹쳐서 만들었건 신경 쓸 문제가 아니다.
"우와아아악."
한 번 마력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서지현은 이전과는 다른 방법으로 마력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마력을 활용한 직접 공격이 먹히지 않는다고 해도 폭발을 이용해 에노테르의 가속에는 얼마든지 사용 할 수 있으니까. 게틀링 건의 총열에 낫을 걸어놓고 당기면서 폭발을 일으키자, 시원스러운 소리와 함께 게틀링 건의 곧게 뻗은 굵고 단단한 총열이 그대로 동강난다.
"어딜!"
마찬가지로, 방어 또한 단순히 마력을 통해 방어벽을 만들어내는 식의 방어가 아니라, 그냥 공격이 날아온다 싶으면 근처의 땅을 폭발시켜 시야를 가리고, 날아오던 포탄이나 총알을 폭발하듯 솟구치는 흙으로 방어해버린다. 물론, 마력의 낭비는 꽤 심하고 꽤나 무식한 방법이라 생각하지만...
순수하게 마력으로 빚어낸 방어벽으로 공격을 막았을 때 변했던 서지현의 표정을 생각해보면 차라리 저 편이 나은 것 같다. 계속해서 싸우다보니 어느 순간 서로 등을 맞대고 기차에 달려있는 온갖 종류의 무기들을 응시한다. 한 60% 정도는 무력화 된 것 같다.
"나름대로 방법을 찾아낸 것 같아서 참 기쁘네."
서지현이 코웃음을 한 번 친 다음 말했다.
"그래봤자 고철덩이들인걸요. 파이리가 꼬부기랑 싸워도 엄청 쎄면 이길 수 있는 법이죠."
그건 또 그렇지. 그 사이, 서지현은 허공에 에노테르를 던지고 유심히 바라보다가, 그대로 에노테르를 향해 폭발을 일으켰다. 폭발을 얻어맞은 에노테르가 날아가 기차 옆면에 튀어나와 있는 야포를 향해 날아가 퍽 하고 박혔다.
서지현이 손을 살짝 더 움직이자, 끝이 박혀든 낫의 뒤통수에 몇 번 더 폭발이 일어나, 마침내 꽤 큼지막해 보이던 야포를 에노테르가 작살내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서지현은 다시 폭발과 함께 허공으로 날아오른 에노테르를 받아들었다. 잘 싸우네.
"어때요?"
살짝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턱을 살짝 치켜올리는 서지현. 지금 도발하는 건가? 나는 입맛을 다시다가 쏟아지는 총알과 포격을 피하며 한 마디 했다.
"지현아, 난 기차 때려잡았어."
내 말에 서지현이 윽, 하는 소리를 내고 이내 대답했다.
"기차도 하나고 대포도 하나니까 동점 아닐까요?"
얼씨구.
"그래, 비겼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데에 내기 걸지 말고 집중하자."
서지현이 빠르게 지금 상황에 적응한 건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기차를 해체하는데 필요한 시간은 서지현이 마력을 제대로 쓸 수 있을 때 보다 확연히 오래 걸렸다. 이 고철덩이가 서지현이 만들어낸 화염으로 인한 피해를 고스란히 받았다면, 장담하는데 10분도 걸리지 않았을거다.
"끝. 더럽게 크네, 망할 놈의 기차."
나는 숨을 크게 한 번 몰아쉬고 이마를 닦았다. 마지막 기관총까지 작살내는데 걸린 시간은 50분이었다.
[미션 종료]
좋아, 어떻게든 포인트를 획득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바닥에 툭 하고 떨어진 건 은빛의 너클 한 개와 서양식 쥘부채. 자연스럽게 나의 손은 너클로 향했고, 서지현의 손은 쥘부채 쪽으로 향했다.
[야만 분쇄기 : 오랜 연구와 기술의 발전 끝에 발견한 신소재 합금은 가벼우면서도 강성과 탄성이 기가 막힙니다만, 정말 중요한 것은 여태동안 잘 알려져 있던 야만적인 미신들(소위 마법, 기적 따위로 알려진 너절하고 미개한 구시대의 산물들)을 효과적으로 때려부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너클은 옆구리에 다용도로 쓸 수 있는 나이프도 수납되어 있습니다. 힘껏 쥐어보세요! 멋지죠?]
시키는 대로 꽉 쥐어보자, 너클의 옆구리 부분에서 팍 하고 칼날이 튀어나왔다. 기껏해야 단도 정도 되는 길이. 유용하게 쓸 수 있을까? 설명과는 달리 별로 멋지지는 않은데. 그냥 트렌치 나이프잖아.
"야만 분쇄기라."
이름을 한 번 중얼거려본 나는 서지현에게 부탁해서 그녀로 하여금 방어벽을 한 번 만들어 보게 했다. 서지현이 방어벽을 만들고, 나는 그 방어벽을 향해 너클을 낀 손을 휘둘렀다. 너클에 후려맞은 마력 방벽이 예상보다 훨씬 더 크게 떨린다.
"설명을 읽어봤는데, 이 지역에 자리잡은 랜드마크는 대놓고 마력 같은 걸 배척하는 모양이네요. 아쉽게도, 보상으로 나온 부채는 사용 할 수 없는 물건이에요. 정확히 말하자면, 사용 할 수는 있지만 사용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은 물건이네요."
마력을 제한하는 식의 작용을 하는 모양이다. 어쩔 수 없지. 잠깐 생각을 정리한 나는 입을 열었다.
"어쩌면 포인트를 쓰지 않을 수도 있겠어."
"맞아요. 저도 그 생각을 했어요."
미신 중에는 당연히 저주도 포함되어있다. 이 지역의 랜드 클리어를 성공하게 되면 받게 되는 장비가 카피라의 저주를 극복 할 수 있는 수단이 되어주지는 않을까. 컨셉 자체가 그런 기대를 하게 만든다.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플랫폼 천장에서 뭔가 떨어지는게 보인다.
"조심해."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서지현을 감싼채로 뒤로 쭉 빠졌다. 노리고 있던 건, 우리가 아니었다. 하늘에서 휙휙 떨어진 수십 개의 거대한 집게들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방금 전까지 우리가 싸우던 기차에 달라붙는다. 그리고, 그대로 증기기관차를 들어올린다. 그리고, 플랫폼 천장 너머에서 푸화아아악, 하는 증기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리며 기차가 들어올려진다.
나와 서지현은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봤다. 플랫폼의 천장까지 끌어올려진 기차는, 천장에 마련된 레일을 타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이거."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그제서야 바닥에 떨어져 있던 빳빳한 종이 두 장을 집어들었다. 구멍이 뻥뻥 뚫려있는 카드다. 천공 카드인가 뭔가 하는 건가. 고개를 돌려 황동상 쪽을 바라보니, 어느 사이엔가 다시 입간판 상단부에 있는 종이가 팔락거리며 넘어가고 있는 중이다.
종이에 써진 숫자가 0이 되고, 다시금 황동상이 아까와 같은 대사를 뱉는다. 다시 뿌웨에엑 하는 비명소리와 함께 증기기관차가 다가온다. 이번에는 황동상의 지시대로 단말기에 천공 카드를 꽂아넣었다. 그리고, 황동상이 입을 열었다.
- 손님 전원 입장 확인. 평택행 익스프레스, 출발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탄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기차는 땅굴 속으로 파고 들었다. 증기기관차가 지하로 달리다니, 이 땅굴을 그냥 걸어가면 질식해 죽기 딱 좋겠는걸. 컴컴한 땅굴 속을 기차가 얼마나 달렸을까. 다시금 증기기관차는 지상으로 튀어나와 5분 정도를 더 달렸다.
그리고, 새로운 플랫폼이 정차한다. 방금 전까지 클래식 음악이 연주되고 있던 스피커에서 음성이 나온다.
- 평택입니다. 평택입니다.
그리고 푸슈, 하는 소리와 함께 증기기관차의 문이 열렸다.
"평택역이네요."
우리가 도착한 곳은 평택역이었다. 진짜 여객용 증기기관차였던 거냐. 나는 황당한 표정을 지은 채 열린 문을 통해 기차에서 내렸다.
"공기 한 번 기가 막히군."
역에서 내리자마자 우리를 반겨주는 건 눈쌀이 찌푸려질 정도로 지독하고 매케한 냄새였다.
"도시가."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평택역에서 보이는 주변의 광경을 살폈다. 하늘 높이 치솟고 있는 시커먼 연기와 무수한 굴뚝들. 그리고, 원래 서 있던 건물들을 대신하고 있는, 태엽장치가 잔뜩 달라 붙어있는 생소한 양식의 건축물들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