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
다시 서울로
카피라의 분신을 마주한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아까까지와의 싸움과는 다르다. 어렴풋이, 내가 우위에 있다고 생각해도 좋은 싸움이었지만 지금 마주하고 있는 존재는 절대로 싸움에서 내가 우위를 점한다고 확신할 수 없다.
"왜 그렇게 얌전해?"
카피라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손을 뻗어 자기 옆에 서 있는 소나무를 쓰다듬었다. 땅을 타고 기어오른 장미덩굴이 소나무를 휘감고, 이내 싱싱하던 소나무는 그대로 바짝 말라 죽어버린다. 너 같으면 너 같은 년을 마주하고 어떻게 행동하겠냐. 어지간한 페도필리아 강간범 새끼도 너를 보면 거시기가 팍 풀이 죽을 걸.
여기에 찾아왔다는 건 싸우겠다는 뜻이다. 카피라는 살짝 허리를 앞으로 숙이며 말했다.
"우선은, 눈이 흐려질거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야가 뿌옇게 변한다.
"손에서 힘이 빠질거고."
설마.
이야기를 듣자마자 나는 마찰을 조절해 검을 손에 붙였다. 역시, 카피라가 말한 것이 이루어졌다. 손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다. 계속해서 카피라가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호흡이 가빠지고, 몸에서 열이 펄펄 끓어오르는데도 불구하고 지독한 오한이 들어. 심장은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고통스럽고, 머리가 어지러워 구역질이 올라오겠지."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끝날 때 마다 점점 몸 상태가 나빠진다. 몸 상태가 나빠진다기보다는 원래 몸 상태가 안좋았었는데 그 전까지 내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빠르게 증상들이 찾아온다. 나는 억지로 숨을 몰아쉬면서 카피라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래도, 분신 따위랑은 충분히 싸울 수 있어."
땅에서 솟구친 장미 덩굴이 내 공격을 막아냈다. 어딜, 나는 곧장 옆으로 크게 돌아 덩굴을 피한 다음, 카피라를 향해 쇼크를 뿌렸다. 카피라의 몸에서 창백한 스파크가 파파팍, 하고 튄다. 카피라가 까야아, 하는 성의 없는 소리를 내며 몸을 덜덜 떠는 시늉을 한다.
"..."
큰 효과는 없는 모양이다. 상관 없다. 나는 녀석을 향해 한 발 다가서 다시 한 번 수확자를 크게 휘둘렀다. 카피라가 휘둘러진 수확자를 피하며 입을 열었다.
"입고 있는 옷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무겁게 느껴질거야. 피부는 약해져서, 옷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짓무르겠지."
"아... 윽."
나는 그런 소리를 내고 나도 모르게 휘청거렸다.
"짓무른 피부가 곪아. 너의 정신은 고통을 견디기 힘들 정도로 약해져. 울고 싶을 정도로 아파서, 항복하고 싶어져. 몸을 타고 흐르는 피가 독이라도 된 것처럼, 심장이 한 번 뛸 때마다 아찔거려."
몸이 앞으로 엎어지려고 한다. 바닥에 칼을 박아넣은 나는 억지로 거기에 몸을 지탱한채로 서있는데 성공했다. 카피라는, 그런 내 앞으로 다가와서 나와 눈을 마주쳤다.
"너무 아파. 괴로워. 물러터진 피부는 지나치게 고통에 민감해졌어. 바늘에 살짝 찔리는 것만으로도 달궈진 쇠꼬챙이가 쑤셔박히는 듯한 고통이 느껴져."
"아아아아악!"
바닥에서 자라나는 장미 덩굴이 신발을 타고, 바지 속으로 들어와 다리를 휘감고 올라가기 시작한다. 그 때마다 느껴지는 고통에 내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 믿을 수 없는 비명소리가 튀어나온다. 뭘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아니, 이 상황에서는 뭘 해도 안될 것 같다. 입에 저절로 개거품이 물리고, 눈깔이 돌아가버리는 고통.
비명을 지르고 있는 나를 보던 카피라가 손을 뻗어 내 턱을 살짝 들어올렸다.
"오빠, 나랑 계약하지 않을래? 그럼 더 이상 아프지 않을텐데."
아찔한 고통 속에서, 나는 힘겹게 중얼거렸다.
"흐윽, 허억... 지랄하지마."
내 말에 카피라가 아, 하는 소리를 내고 서운한 표정을 지은 다음, 이내 활짝 웃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모처럼 용기내서 말했는데. 이렇게 짓밟다니. 하지만 괜찮아. 더 마음에 드네. 응, 튕기는 건 싫지 않아. 그럼, 우리 조금 더 놀까? 오빠 입에서 제발 계약하게 해주세요, 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말을 마친 카피라가 내 얼굴을 양 손으로 감싼채 이마를 맞대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자세만 보면 무슨 안수기도라도 해주는 성녀 같은 꼴이다.
"점점 더 아파져. 곪은 상처에 불이 붙은 것 같아. 숨을 쉬어도, 숨을 쉬는 것 같지 않은 질식감이 느껴져. 이대로는 안될 것 같아. 도망치고 싶어. 두려워, 괴롭고 힘들고 지쳤어. 3일 정도 잠을 못 잔 것처럼 머리가 몽롱해. 근육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약해지고, 뼈는 바짝 마른 나무가지처럼..."
하얗게 이를 드러내고 웃으면서 말을 이어가던 카피라는 갑자기 뒤로 훌쩍 물러났다. 카피라가 서 있던 자리에서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몸과 정신이 함께 무너지는 와중에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서지현.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
서지현이 죽일 것 같은 표정을 지은 채 카피라를 노려보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카피라가 살짝 눈웃음을 짓고는 서지현을 바라봤다.
"언니, 간만에 봤는데. 서로 인사를 나누는게 순서 아닐까?"
"닥쳐. 무슨 짓을 한 거야."
서지현의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오현석이 거의 죽을 것 같은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아무것도, 덩굴에 휘감기면 좀 아프겠지만 그것뿐이야. 봐, 몸은 멀쩡한걸."
카피라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오현석에게 다가가서 그의 머리를 손으로 들어올렸다. 그것만으로도 오현석의 입에서 다시 고통에 찬 비명소리가 흘러나온다.
"손 때!"
서지현의 등 뒤에 떠 있던 아르도르에서 카피라를 향해 화염이 기관총처럼 쏟아진다. 카피라는 웃음을 흘리며 한 손을 들어올리고, 바닥에서 확 솟구친 가시덩굴들이 쏟아지는 화염을 막아낸다. 하지만, 오래 버티지는 못했다.
"아, 역시.'
카피라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언니는, 머리가 아파."
서지현은 별 다른 표정 변화 없이 카피라에게 달려들어 화염을 휘감은 에노테르를 휘둘렀다. 카피라는 그 공격을 피한 다음, 순간적으로 검게 변해 뒤로 쭉 빠진 다음에 다시 형체를 갖추며 고개를 갸웃했다.
"어라?"
카피라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짓고 서지현을 바라봤다.
"언니, 멀쩡하네."
말하는 카피라의 시선은 서지현의 귀고리 쪽으로 향해 있었다.
"언니랑 오빠는 재수가 참 좋구나. 파주에 가서 얻은 모양이구나? 그래, 그렇게 고정되어버리면 저주는 쓸모가 없지. 근데, 나는 저주면 충분 할 것 같아서 분신을 만들 때 거기에만 집중했는데. 난감해졌다."
대답 대신, 이글거리는 화염의 파도가 카피라에게 쏟아진다. 방어를 위해 카피라는 자신의 몸에 방어막을 둘렀다.
"후우윽."
카피라는 꽤 버거운 표정으로 눈쌀을 찌푸리고 있다 입을 열었다.
"언니, 이게 전부는 아니잖아? 내가 도와줄게. 오빠는 발 끝부터 서서히 갉아 먹혀."
다시 오현석의 몸이 덜덜 떨리고, 뿌득 하고 이 가는 소리가 들린다.
"당신...!"
서지현이 오현석의 모습을 보고 더 거세게 카피라를 몰아붙인다. 화염을 막아내고 있던 카피라의 검은 방벽 위로 수십번의 폭발이 일어나고, 마침내 방벽이 박살난 카피라가 뒤로 튕겨져 나가 바닥을 구른다.
"아파라. 역시 전력은 아니었구나."
카피라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입에 흐르는 피를 슥 훔쳤다. 카피라가 입가를 닦는 동안, 머리 위로 에노테르가 떨어져내린다. 카피라가 재빠르게 바닥을 굴러 피하는데 성공했지만, 이어지는 폭발에 휩쓸리는 건 피하지 못했다.
"아하핫. 언니, 이거 봐. 달랑달랑 거린다."
카피라는 재미있다는 듯이 충격으로 부러지고, 화상을 입은 자신의 오른팔을 왼쪽 팔로 집어들어 이리저리 흔들며 웃음을 터뜨린다. 그 꼴을 보고 있던 서지현이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친년."
카피라는 희미하게 웃음을 흘리고 손을 휘둘렀다. 사방에서 뻗어나온 가시덩굴들이 서지현을 노리고 달려들지만, 접근하기도 전에 불타올라 흩어진다.
"너야말로 이게 전부야? 그럼 죽어."
서지현의 발 아래에서 폭발이 확 일어나더니, 그 폭발의 힘을 받은 서지현이 카피라를 향해 고속으로 튀어나간다. 카피라는 다시 한 번 서지현과 자기 사이에 가시덤불로 벽을 만들고, 검은 장벽을 몸 주변에 둘렀다. 하지만, 솟구쳐 올라온 가시벽은 서지현이 다가가기도 전에 잿더미가 되어 사라지고, 그녀의 몸 주변에 나타난 검은 장벽은 에노테르가 박혀들고, 연속으로 일어난 폭발로 인해 깨져버렸다.
뻗어진 서지현의 왼손이 화염에 휘감긴채 카피라의 머리통을 붙잡았다. 이글거리던 왼 손의 화염이 카피라의 귓구멍과 콧구멍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살이 타는 냄새가 진동한다.
"아하하하핫!"
머리 속이 통째로 익어가면서 입으로 검은 연기를 토하는 카피라는 고통을 느끼지 않기라도 하는 것처럼 깔깔거리며 웃다가, 그대로 머리통이 숯덩이처럼 변해버렸다.
"하아... 하아..."
서지현이 손을 놓자, 그대로 머리가 숯으로 변한 카피라의 몸이 옆으로 쓰러졌다. 툭, 하고 바닥에 닿은 카피라의 머리통이 부스러진다. 서지현은 곧장 가시덤풀에 휘감겨 있던 오현석에게로 향했다.
"크으, 헉."
오현석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흐려진 눈으로 서지현을 보다가 희미하게 웃었다.
"와 줄 거라고 생각했어."
서지현이 오현석의 몸을 휘감은 가시덤불을 태워버리고 그를 부축하며 말했다.
"공주님과 왕자님 역할이 바뀐 것 같지 않아요?"
오현석이 그 말에 고개를 숙인채 지친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오, 나의 백마탄 공주님. 구해주러 오셨군요."
입에서 나오는 말을 보니 괜찮을 것 같다. 서지현은 그런 생각과 함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서지현은 걱정되어서 죽어버릴 것 같은 표정을 지은채로 질문을 던졌다.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피라의 분신이 죽으면서 그 분신이 나에게 걸었던 이런 저런 저주들도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저주가 사라지자 방금 전까지 겪었던 모든 것들이 거짓말이기라도 한 것처럼 씻은듯이 나았다.
"사실 몸이 다친 건 아니니까."
다친 거라고 해봤자 기껏해야 카피라가 내 몸에 휘감았던 가시 덩굴에 쓸린 상처 정도다. 이 정도는 굳이 회복할 필요 없이 어깨걸이의 회복력 만으로도 충분히 낫는다. 물론 정신적으로는 무너지기 직전까지 몰렸던게 사실이지만. 저주가 사라지면서 코너에 몰렸던 정신도 순식간에 회복되었다.
그러고 보면, 카피라가 나에게 걸었던 저주 중에는 정신력에 대한 것도 있었으니까. 그게 사라지면서 함께 나아진게 아닐까.
어쨌든, 오늘 싸우면서 확실하게 경험한 사실이 있다.
"저주를 막을 수 있는 수단이 없이는 카피라 근처에 얼씬도 하면 안될 것 같아."
상상 이상이었다.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다. 서지현이 5분만 더 늦게 왔었더라도, 나는 어쩌면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카피라에게 제발 계약해달라고 애원했을수도 있다. 그냥 바라보면서 몇 마디 말을 하는 것 만으로 사람을 미치게 만들다니.
괜히 월드 앵커 어쩌구 하는 이름이 붙어있었던게 아니다. 그냥 들이 받으면 뭐라도 되겠지 하고 카피라의 근거지인 황해 한 복판으로 향했으면...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나는 주변을 살펴본 다음에 말했다.
"아직 싸움 끝난거 아니야."
카피라의 분신과 싸우느라 붙들려 있었다. 그 사이에 서울의 생존자들은 분명히 힘든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겠지. 무전기로 연락을 해보니, 김용천이 곧장 답을 돌려준다.
- 오현석 씨, 무사하십니까?
목소리가 굉장히 조급하다. 그럴만도 하지.
"그래, 어디로 가야 하는지 말해줘."
무전기 너머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오고, 곧이어 김용천이 가야 하는 곳을 알려줬다. 위치를 들은 나는 곧장 해당 장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