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래서 나는 탈옥했다-193화 (193/237)

# 193

다시 서울로

저 멀리, 괴물들이 다가오는게 보인다. 가장 최근 발견한게 부천이었다고 햇으니. 이즈음 되었으면 얼굴을 비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과연 예상이 들어맞았다. 우리와 만날 약속을 잡은 괴물들의 행렬은 마침내 남산 근처에 도착했다.

"더럽게 많군."

문자 그대로 바글바글하게 몰려온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서지현이 하아, 하는 소리를 냈다.

"이 정도라면, 최현우와 싸웠을 때 보다 더 많은 것 같은데요."

그러게 말이다. 과연, 노예 놈과는 다르게 월드 앵커이신 카피라는 한 번에 동원 할 수 있는 병력의 양도 짱짱하게 많은 모양이다.

"삼천이라. 거의 이 정도면 아이돌이라고 해도 되겠는데요."

"그러게, 평생 살면서 나 좋다고 삼천명이나 달려드는 꼴을 보게 될 줄이야."

내 말에 서지현이 하하, 하고 웃었다.

"특별히 마음에 드는 괴물이 있나요?"

서지현의 말에 나는 턱짓으로 저 멀리에서 다가오는 녀석을 가리켰다.

"글쎄, 저런 건 어때?"

내가 가리킨 녀석은 부처님과 같은 자세를 하고 둥둥 떠 있는 염소머리 인간이었다. 등 뒤에는 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박쥐 날개 한 쌍이 달려있고, 가부좌를 튼 다리는 염소다리다. 머리를 제외한 상반신은 여자의 몸을 하고 있었는데, 훤하게 드러낸 상반신에는 자그마치 애기 밥통이 네 개나 달려있다. 염소는 젖꼭지가 두 개인 걸로 알았는데. 저 녀석은 왜 젖이 네 개지, 유전자 개조라도 당한 건가.

딱 자태를 보아하니 카피라가 보내 온 괴물들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게 저 녀석들인 모양이다.

"왜요, 싸우다 목마르면 짜서 마시게? 당신 그런 거 좋아하잖아요. 네 개나 있으니 부족하지는 않겠네요."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그런 외설적인 상상을 한 적은 없어."

애초에, 먹고 싶은 건 따로 있으니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몰려오는 녀석들을 바라봤다. 잠시 뒤, 공중에 가부좌를 튼 채 떠 있던 염소들이 뭔가를 손에 들었다.

"나팔?"

무슨 나팔이지. 라는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녀석들이 주둥아리로 나팔의 꽁무니를 물고 힘껏 분다.

- ♪♩♩♬♪♪♬♪

여태동안 살면서, 들어본 적도 없고 들을 생각도 없는 기괴하고 섬뜩한 소리가 녀석들이 쥐고 있는 나팔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쫘악, 하고 소름이 돋으며 몸의 털이 빳빳하게 서고, 닭살이 돋는다. 그래,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지.

"그 퍼레이드."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정도로 심각한 수준은 아니다. 오히려, 퍼레이드가 연주하던 음악과는 다른 구석이 있다. 그래, 마치 카피라의 분신을 마주했을 때와 비슷한 압박감이 느껴진다. 물론, 그 정도로 강력하지는 않지만.

"크... 윽..."

피리를 듣고 있던 녀석들 대부분이 신음소리와 함께 몸을 덜덜 떤다. 이미 몇 번이나 제르멩이 건네주었던 오르골을 통해 적응한 우리는 소름이 돋는 정도의 피해만을 입고 피리 연주를 감상 할 수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연주 만으로도 상당한 부담이 되는 모양이다. 전투를 준비하고 있던 김용천의 안색에서 핏기가 약간 빠진게 보인다.

"야, 정신 차려!"

니가 거기에서 그렇게 빌빌거리고 있으면 어떡하냐. 나는 녀석에게 다가가서 뺨을 한 대 때렸다. 녀석이 떨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오현석 씨."

그래, 사람 얼굴 알아 볼 정도의 정신머리는 있는 모양이군. 녀석의 입에서 크으, 하는 소리가 다시 한 번 나오더니, 이내 머리를 휘휘 흔들고는 잠깐 비틀거리다가 몸을 바로잡았다. 내가 김용천의 정신을 돌아오게 하는 동안 서지현도 이시은에게 가서 그녀의 정신을 차리게 하는데 성공했다.

"다들, 뭐 하고 있어!"

이내 이시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리고, 서지현이 다가오는 녀석들을 보며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우리라고 저 친구들이 오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놀고 있었던 건 아니다. 나름대로 준비를 해두었다. 쿵,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들의 진군으로 인해 땅이 울리는 소리가 들린다. 5분 정도, 서지현은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다가 웃었다.

"지금!"

그리고, 녀석들이 딛고 있는 땅이 굉음과 함께 터져나가기 시작한다. 미리 서지현이 새겨놓은 문양들이 발동한 거다. 온 천지를 뒤흔드는 것 같은 굉음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던 괴물들이 발 아래에서 일어난 폭발을 얻어받고 사지가 분해된 채로 허공을 난다. 그 숫자가 대충 봐도 수백에 달한다.

그리고, 그 굉음과 함께 펼쳐진 파괴적인 장관은 피리 소리로 인해 잠깐 정신줄을 놓고 있던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정신을 차리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만들어낸 대가로 서지현이 잠깐 헛구역질을 한다.

"괜찮아?"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입가를 훔쳤다.

"갑자기 마력이 쫙 빨려나가서 그래요. 잠깐 쉬면서 마력을 회복하면 될 거에요."

서지현이 설치한 함정은 그녀의 마력을 거의 대부분 빼앗아 갔었다. 그러니 저런 결과를 낼 수 있었던거겠지.

"쉬고 있어."

서지현이 다시 마력을 회복할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대뜸 지뢰를 밟고 수백을 날려버린 괴물들이 분노의 고함을 지르며, 양 손의 무기를 높게 치켜든 채 N 타워로 향하는 산길로 밀려든다. 그나마, 평지가 아니라 산이라서 다행이다.

이런 지형적인 이점까지 없었다면 싸움이 막막했을테니까.

"카피라의 졸개들은 전부 염소의 형태를 한 줄 알았더니. 꼭 그런 건 아닌 모양이지?"

프릭션 컨트롤을 이용해 고속으로 산길을 내려간 나는 마주한 괴물을 보고는 히죽 웃었다. 이건 뭐야. 눈깔로 만들어낸 거인인가. 5m는 될 것 같은, 오로지 눈깔 만으로 형태를 구성한 것 같은 거인 괴물의 무수한 눈동자가 나에게로 향한다. 그리고, 그 시선의 응시로 인해 약간의 압박이 느껴진다.

그리고, 녀석은 들고 있던 4m는 되는 것 같은 거대한 대검을 나에게 휘둘렀다.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이 휘두른 검이 내 수확자와 부딪쳤다. 화악, 하고 부딪친 충격으로 인해 만들어진 바람이 사방으로 퍼진다.

힘을 주어, 내려찍은 대검을 밀어낸 나는 녀석에게 바짝 접근해서 수확자를 마구 휘둘렀고, 녀석은 죽었다. 파백의 효과로 죽었는지, 절혼의 효과로 죽었는지는 모르겠다. 일단 죽었으니 그걸로 된 거지. 뒤편에 서 있던 괴물들이 나에게로 활과 석궁을 겨눈다.

"올 거면, 카피라를 데려와 이 새끼들아."

빠르게 손동작을 취한 나는 녀석들을 향해서 팔을 휘둘렀다. 대지 위를 달리던 스파크가 녀석들의 몸을 기어오른다. 화살을 쏴붙이려고 하던 녀석들이 순간적인 쇼크를 못 견디고 몸을 떨고, 그 사이에 세 마리의 모가지가 하늘을 날았다.

그리고, 허리춤에 달고 있던 무전기가 치칙 하는 소리를 냈다.

- 오현석 씨, 남서쪽에 도움이 필요 할 것 같습니다.

우리의 방어작전은 어떻게 보면 작전이라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간단했다.

김용천은 N 타워에서 남산을 내려다보며 상황을 파악한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나름대로 위치를 잡은 채 남산을 기어올라오는 괴물들과 싸운다.

그리고, 나는 그 와중에 뚫릴 것 같은 곳이나 위험한 곳이 생기면 달려가서 지원한다. 하지만, 애초에 군인도 아닌 우리가 그럴듯한 작전을 세우려고 드는 것 자체가 웃긴 일이지. 지킬 수도 없는 계획만 그럴듯하게 세우다가 쥐어 터지느니 좀 조잡한 작전이라도 할 수 있는 선의 작전을 짜는게 최고다.

"남서쪽 어디, 정확하게 말해야 할 거 아니야."

내 말에 김용천이 아, 하는 소리를 내고 다시 위치를 정정해주었다. 무전을 받은 나는 곧장 녀석이 지시한 방향으로 달렸다. 잠시 뒤, 눈에 보이는 건 괴물들과 싸우면서 피칠갑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 그런 녀석들에게 마구 무기를 휘두르는 괴물들이었다.

내가 막 도착했을 때, 한 녀석이 쓰러진 채로 자신을 향해 내려찍히는 미늘창을 보며 비명을 지르는 찰나였다. 까앙, 하는 소리와 함께 괴물놈이 내지런 미늘창이 내 검에 튕겨져 나갔다.

"부상자는 뒤로 빠져. 못 걷는 사람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도와. 나머지는 정신 차리고 자리 잡아!"

내가 여기만 커버 칠 수는 없다. 미늘창을 들고 있던 녀석은 내가 방해한게 어지간히 서운했던 모양이다. 화악 하고 콧김을 내뿜고 나를 향해 창을 내질렀다. 순식간에 녀석의 팔뚝이 잘려나가 바닥을 구르고, 목줄기에 칼이 박힌 녀석이 구슬픈 비명과 함께 쓰러진다.

"이런 잡졸 말고."

이 정도는 어떻게든 서울의 생존자들도 상대 할 수 있다. 내가 주로 제거해야 하는 건 생존자들로는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강한 녀석들이다. 휘리릭,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몸 주변에 휘감기는 가느다란 실타래가 보인다.

곧장 허공에 수확자를 휘둘러 궤적을 남긴 나는, 그 궤적을 손으로 잡아 하늘로 튀어나가며 휘감기는 실타래를 피했다.

"그래, 너 같은 거."

내가 보고 있는 건 자그마한 구체관절 인형을 손에 안고 있는, 한쪽 뺨에 문신이 새겨진 여자였다.

"네 녀석이구나. 펠리시아님을 해코지 했다는 녀석이."

이야, 이게 말도 할 줄 아는 녀석이었네. 펠리시아라. 누구였지. 잠깐 고민하던 나는 아하, 하는 소리를 냈다. 용인에서 카피라를 깨우기 위해서 노력하던 마녀 말하는 거지? 녀석이 나를 죽일듯이 노려보다가 말했다.

"곱게 죽을 거라고 생각하지마."

나는 그 말에 허허, 하고 웃은 다음에 수확자로 녀석을 겨누었다.

"너, 펠리시아보다 강하냐?"

내 말에 녀석이 울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펠리시아 님은 나에게 길을 알려준 분이다. 감히 너 같은 녀석이 입에 담을 수 있는 분이 아니야!"

"질문을 못 알아먹는건가."

너 펠리시아보다 강하냐고. 내 말에 여자는 나를 보고 이를 갈며 말했다.

"나 같은 건, 그 분과 비교하면..."

웃긴 녀석이네. 쉽게 말해서 너 펠리시아라는 녀석보다 약하다는 거잖아. 근데 뭐 그렇게 당당하게 서서 나를 죽이겠다고 하는거야. 당장 눈 앞에 있는 내가 펠리시아를 썰어버렸는데. 복수를 하겠다면 하다못해 펠리시아보다는 강해야 할 거 아니야.

그 사이, 녀석이 끌어안고 있던 구체관절인형이 고개와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금 나를 노리고 휘감겨 오는 실타래가 느껴진다. 보자, 내가 펠리시아를 어떻게 죽였더라.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에게로 휘감기는 실타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잡았다! 이제..."

꽉, 하고 내 몸에 휘감긴 실타래들이 조여들기 시작한다. 펠리시아라는 녀석도 이런 일을 하다가 나한테 죽었지. 곧장 몸의 마찰을 제로로 만든 나는 실타래에서 쑥 하고 빠져나와 녀석의 머리통을 수확차로 쳐 날렸다.

"잡긴 뭘 잡아."

그 스승에 그 제자군 그래. 바닥을 구르는 목을 바라보며 말을 던지는 와중에, 다시 무전이 울린다.

- 오현석 씨...!

아 젠장, 더럽게 바쁘네. 김용천에게 향해야 할 곳을 전달받은 나는 다시 남산을 달렸다.

"안녕."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걸음을 멈춰야 했다. 온 몸을 내리누르는 압박감. 기억하고 있는 검은 드레스. 이마에 염소 뿔을 달고 있는 소녀의 분신. 나는 곧바로 무전기를 들고 말했다.

"김용천, 못 가니까 최대한 버텨봐."

무전기가 뭐라고 말을 한다. 나도 급한 건 알아. 근데 지금 내 집에 불이 났어, 남의 집 불 꺼주러 갈 상황이 아니야.

"지현이에게 미안하지만, 이리로 좀 와달라고 전해줘. 카피라가 찾아왔다고 하면 알거야."

나는 김용천에게 내 위치를 말해줬다. 그리고 나서, 나는 카피라를 마주했다.

"또 분신이냐."

뭐, 직접 올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내 말에 카피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하지만 이번에는 저번과는 조금 틀려."

녀석의 양 눈동자에 자리잡은 오각형과 별 모양이 음산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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