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
다시 서울로
내 말에 서지현이 대답했다.
"아니요. 그럴 수는 없어요."
서지현의 단호한 한 마디에 나는 약간 당황했다.
"저기."
"제가 서울에 남지 않는다면 당신을 제외한 한국의 모두가 죽는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서울에 남아요."
"안동에서는 문제 없었잖아."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젓는다.
"제가 당신을 바라보는 눈은 원주 이전과 이후로 나뉘죠. 그 전이었다면야 제가 먼저 떠올렸을 생각이지만, 지금은 받아들일 수 없어요."
서지현의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서지현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알고 계시겠지만, 우리는 지금 둘이 헤어지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서 전세계 인구가 더 행복해지는 길을 방해하려는 거잖아요?"
그건 그렇지. 인류 전체를 놓고 본다면 그 멕시코의 여자가 성공해서 이 모든 일이 일어나기 전으로 세상을 되감아 버리는 편이 훨씬 더 행복할 것이다. 죽었던 사람들도 돌아오고, 무너졌던 문명도 다시 원래의 모습을 되찾겠지.
"제가 없어서 당신이 위험에 처할 확률이 백만분의 일이라고 해도, 서울에 생존자 전원의 확실한 죽음과 기꺼히 맞바꾸겠어요."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둘 생각이 없다. 그러면 나와 서지현이 불행해지니까. 75억에 달하는 사람들보다 두 명을 택하기로 마음먹은거다. 애초에, 입장 바꿔서 서지현이 나에게 저런 제안을 했다고 하면 내가 받아들였을까?
그럴리가 있나.
"그래, 방금 전 말은 없던걸로 하자."
내 대답을 들은 서지현의 입에 그제서야 안도의 미소가 떠올랐다.
"다행이다. 이런 일로 당신과 싸우는 건 싫었거든요."
뭐, 이런 건 싸웠다고 할 것도 아니지. 파주에서 서울로 가기 위해서는 고양시를 거쳐 은평구로 진입해야 한다. 어차피 고양시의 안전은 이미 인천에서 파주로 향하며 확인했으니,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다소 쌀쌀하네요."
파주만큼은 아니었지만, 고양시도 제법 추웠다. 어쩔 수 없지. 파주라는 거대한 얼음창고가 이제 막 문이 열림 참이니까. 근처에 붙어있는 고양시도 파주에서 흘러나오는 냉기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서울로 향하는 와중에, 서지현이 배낭에서 뭔가를 꺼내들었다.
"그건, 권총이잖아."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낭에 냉동식품을 쓸어넣는 과정에서 짐을 정리하는데 튀어나온거에요. 기억하세요? 거울로 이루어진 미로에서."
나는 그 말에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맞아, 그러고 보니 그때는 권총을 사용했던 기억이 있다. 너무 오래 전 일이고, 이제는 딱히 쓸 일도 없어서 그냥 배낭 안에 넣어놓고 완전히 까먹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걸 꺼낸 이유가 뭐야?"
내 말에 서지현이 히죽 웃으면서 뭔가를 꺼내들었다. 9mm 권총탄이다.
"이제와서?"
내 말에 서지현이 쉿, 하는 소리를 내고는 총알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총알 탄두에 콩알만한 크기의 작은 문양이 새겨졌다.
"마력도 별로 안 소모되네요."
서지현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벽을 향해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하는 총성과 함께 날아간 총알이 그대로 벽을 때리고, 이내 강렬한 폭음과 함께 건물 한 쪽에 큼지막한 구멍이 뻥 하고 뚫렸다.
"역시."
서지현의 말에 나는 허허허, 하고 웃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어?"
내 말에 서지현이 대답했다.
"의표를 찌르는 거죠. 저기, 이거 장전 어떻게 하는 거에요?"
서지현이 질문과 함께 나에게 권총을 내밀었다. 간단하게 방법을 알려주자. 서지현이 탄창 맨 아래에 아까처럼 문양을 새겨넣은 총알을 밀어넣고, 그 위에 문양을 새기지 않은 총알을 두 발 채워넣었다.
"처음에 한 발 맞아보면, 이런 건 굳이 방어 할 필요도 없다고 느낄거에요."
그렇겠지. 맞는다고 해도 팅, 하는 소리와 함께 튕겨져 나갈테니.
"두 발 정도 쏴서 맞춘 다음에 별거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발사하면."
전혀 대비하지 않고 있던 와중에 총알을 얻어맞고 강력한 폭발에 휩쓸린다. 방심하던 녀석에게 꽤나 강렬한 피해를 줄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한 번 당하고 나면 절대로 당하지 않을 일회성 방법이기는 하지만, 한 번 당하고 나면 날아오는 권총탄에 신경을 쓸 수 밖에 없다.
혹시라도 또 이전에 맞았던 것처럼 펑 하고 터지기라도 하면 당한 입장에서는 큰 피해를 입을테니. 결국 쓸데없이 권총탄을 막기 위해서 방벽을 강화하거나, 날아오는 총알 하나하나를 일일히 신경써서 피해야 하는 상황이 되겠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효과가 있다고 칠 수 있겠네. 서지현이 으윽, 하는 소리와 함께 기지개를 켠 다음 말했다.
"식사 하죠. 마음 같아서는 쓸어담은 고기로 식사를 하고 싶지만."
"알잖아? 시간."
여기에서 태평하게 고기 구워서 먹고 있는 동안 서울에 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서울에 도착하기 전까지 식사는 간단하게 해결해야 한다. 서지현은 아쉬운 표정을 지은 채 물을 꺼내, 미숫가루를 타서 흔들었다.
"이걸로 때우죠."
그래, 그 편이 좋을 것 같다. 순식간에 만들어낸 미숫가루로 식사를 때우며, 우리는 참 부지런히도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고양시를 넘고 은평구를 넘어 도착한 남산 어귀.
"이럴 줄 알았으면 고기를 구워먹을걸."
서지현은 김용천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남산 타워의 상태를 확인하고 분한 표정을 지었다. 꽤나 멀쩡해보인다.
"우리가 빨리 움직였으니까."
별 일 없어서 다행이지 뭐. 남산으로 진입하는 등산로에는 사람들이 숨어서 경계 중인 모양이다. 굳이 불러낼 필요는 없겠지. 근처로 다가가자 곧바로 우리를 알아본 녀석들이 모습을 드러내고는 말했다.
"두 분. 다행이다."
그들은 그렇게 말하고 안도한 표정으로 우리를 향해 인사를 했다.
"잠시만, 바로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한 녀석이 그렇게 외치고 나서 등산로를 달려 멀어졌다. 거참, 더럽게 반가워 하네. 잠깐 기다리고 있으려니 저 멀리에서 누군가 뛰어오는게 보였다. 김용천과 친구들이다.
"오랜만이네. 뭐 그렇게 피곤해 보여? 일이 바쁜 모양이지."
내 질문에 김용천이 인사를 한 다음 대답했다.
"바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피곤해보이는 표정이야. 서지현이 김용천 옆에 따라온 이시은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픽 웃었다.
"사람 좀 쉬게 두지 그래? 저러다 뼈 삭겠다."
서지현의 말에 이시은이 시선을 옆으로 슬쩍 돌리고 대답했다.
"시끄러."
그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한 성격이군 그래.
"이강현은?"
내 말에 뒤편에 있던 녀석이 인사했다.
"생각보다 일찍 뵙게 되었습니다."
"그러게 말이다. 인천에서 도망쳤다고 들었는데."
내 말에 이강현이 잠깐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두 분 입장에서는 썩 마음에 들지 않는 결정이었겠지만. 거기에서 억지로 버티려 들었다면 지금쯤 저는 살아있지도 못했을테니까요."
뭐, 자기 목숨은 누구나 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법이지. 그걸 가지고 탓할 생각은 없다. 애초에, 우리가 주종 관계에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괴물들이 인천에 상륙해서, 서울로 향하고 있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정확한 숫자는 모르지만, 삼천 정도는 되어 보였습니다."
더럽게 많이도 몰려온다.
"서울은?"
내 말에 김용천이 대답했다.
"인천에서 합류한 생존자와, 인근 지역에서 합류한 생존자 덕분에 약 5500명 정도입니다 하지만, 싸울 수 있는 병력만을 추려낸다면 대충 3500 정도."
숫자는 엇비슷하다. 하지만 개개인의 실력에서 차이가 나니까.
"두 분만 오신 겁니까? 파주로 보낸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김용천의 질문이었다. 우리 둘만 덜렁 온게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서지현이 옆에서 슬픈 표정을 지은채 대답했다.
"파주에 도착하기는 했지만, 도착하자마자 서울이 위급하다는 말만 하고..."
서지현의 말에 김용천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말했다.
"파주의 생존자들을을 통솔하고 있는 사람이 있어. 민혁이라는 군인 아저씨지. 그쪽에서도 도움을 주겠다고 해서, 그 사람들과 함께 오라고 하고 우리만 먼저 오는 길이다."
김용천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안도의 한숨을 쉬고, 그 옆에 서 있던 이시은이 서지현을 살짝 노려본다.
"어머, 무서워서 장난도 못치겠네. 옆에 붙어있다보니 성격도 닮게 된 모양이야?"
서지현은 그런 말과 함께 이시은의 시선을 태연하게 받아 넘겼다.
"... 와줘서 고마워."
이시은은 눈에 힘을 푼 다음에 서지현을 향해 인사를 했다.
"어디까지 온 거야?"
"마지막으로 위치가 확인된건 부천 인근입니다."
그럼 서울로 오는게 확실하다고 볼 수 있겠네. 인천에서 파주 가는데 부천을 거칠 이유는 없으니까. 게다가, 부천이라면 조만간 서울로 들어온다는 뜻이다.
"아쉽게 되었군."
내 말에 김용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주에서 병력이나 물자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하면... 자리를 옮기는 편이 좋았겠죠."
북한산 쪽에 자리를 잡았으면 파주에서 온 지원병력들이 은평구를 통해 바로 북한산 쪽에 합류 할 수 있었을 거다. 뭐, 몰랐으니 어쩔 수 없지.
"구체적으로, 어떤 지원인지 알 수 있을까."
이시은의 질문에 서지현이 대답했다.
"개인화기와 탄약, 그리고 박격포나 무반동총 따위라고 들었어요."
이시은이 그 말에 잠깐 입을 헤벌렸다.
"그냥 물자와 인원 정도를 지원해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파주의 안전지대는 군부대였어. 덕분에 다른 지역과는 다르게 군용 화기나 탄약 따위가 비교적 멀쩡하게 유지되었던 모양이야. 물론, 안전지대 밖의 물자도 마찬가지로 꽤 멀쩡하게 유지도니 모양이고."
게다가, 랜드 마크가 유지되는 동안은 화기가 쓸모없었으니, 파주의 괴물들도 군용 화기의 파괴에는 크게 신경을 기울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군 주둔지에서 박격포를 쏘아올려도, 안전지대 밖에 떨어지면 불발탄으로 끝나버리니. 거기에 신경을 쓸 이유가 없었던 거겠지.
"도착하면 큰 도움을 받을 수 있겠군요. 대다수의 생존자는... 솔직히 냉병기를 들고 저항하는 것 보다 화기를 들고 싸우는 편이 훨씬 더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여성 분들은 총기를 다룰 줄 모른다고 해도, 알려주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게다가, 파주의 주둔지를 담당하고 있던 군인은 나름대로 작전과장이라는 직책을 꿰차고 있던 양반이니까."
단순히 화력 보강을 넘어서, 해당 분야의 전문적인 도움도 기대 할 수 있을거다.
"우리가 도움을 주는 건, 파주의 지원군이 물자를 챙겨서 여기에 도착하기 전 까지다."
해야 하는 일. 우리는 최현우의 죽음을 확인하고 나서 바로 떠났기 때문에 녀석들에게 제대로 해야 하는 일을 전달할 기회가 없었다. 황해에 자리잡고 있는 카피라의 근거지.
"그렇군요. 그럼, 파주의 지원군이 도착한 이후 다시 두 분을 만나게 되는 건 오현석 씨가 그 월드 앵커의 저주에 대항할 수단을 갖춘 다음입니까."
"그래, 이후에 서울로 돌아오게 되면 인천을 다시 확보해야 하는데. 그때는 너희도 도와줘야 할 거야."
내 이야기를 들은 녀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월드 앵커의 사냥에 성공하면 한국의 안전은 확보되니까. 돕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생존자들 대부분도 이 소식을 전달받으면 굳이 설득할 필요가 없을겁니다."
그렇겠지. 녀석들도 지긋지긋할테니까. 뭐 좀 살만한가 싶으면 괴물들이 밀려오고, 좀 안전해졌다 싶으면 괴물이 몰려오는 상황이니까. 서울의 생존자들도 지긋지긋할 것이다.
"준비는 잘 해뒀을거라고 믿는다."
"물론입니다."
어차피 우리가 오지 않아도 서울의 생존자들은 여기에서 싸워야 했다. 서울의 생존자들이 밀레니엄에 휴거 기다리는 사이비 신자들도 아니고. 그냥 목 빼놓고 우리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지는 않았다.
"그럼, 파주에서 친구들 오기 전까지 또 한 번 부대껴보자고."
김용천이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오신 것 만으로도 든든합니다. 모두 같은 생각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