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
다시 서울로
파주의 지긋지긋한 추위의 근원을 처리하는데는 성공했으나, 그토록 차갑게 식었던 땅이 순식간에 다시 따뜻해지지는 않았다. 아마, 한동안 파주는 서늘한 상태를 유지할 것이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않겠지. 오래가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다.
"무조건 챙겨야 해요."
그 얼음땡 녀석을 처리하고 나서 우리가 바로 시도한 것은 주둔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파주의 얼음땡 사태는 완전히 풀리고 다시 영상의 온도를 되찾게 될 것이다. 그 전에 우리가 미친듯이 상점을 뒤져서 찾아내기 시작한 건 다름아닌 냉동식품과 고기였다.
"괜찮아요, 카피라와 싸우기 전까지는 내가 어떻게든 온도를 유지해 볼게요."
서지현은 그렇게 호언장담하고는 배낭 안으로 냉동식품들을 밀어넣는 중이었다. 이전까지는 그닥 소중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식재료였지만, 지금 이 순간, 우리 입장에서는 단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 귀중한 식재료였다.
냉동 볶음밥, 만두, 너겟이나 떡갈비 같은 것들이 우리의 배낭 안으로 차곡차곡 밀려들어간다. 마치 아귀의 주둥아리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다.
"유지 할 수는 있는거야?"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기회에, 상점에서 스킬을 새로 배웠어요. 제 최대 마력의 일정량을 깎으면서, 제가 가지고 있는 스킬 중 하나를 반영구적으로 유지시키는 거에요."
서지현은 이미 저주에 대항 할 수 있는 장비를 얻는데 성공했다. 고로, 현재까지 끌어모으고 있던 포인트는 장비 구매가 아니라, 뭔가 다른 일에 사용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서지현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자신의 배낭을 열더니 음, 하는 소리와 함께 배낭의 지퍼 안쪽 천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그리고, 잠시 뒤에 배낭 안쪽에 뭔가 문양이 새겨진다. 그러니까, 저 문양이 남아있는 동안은 저 배낭 안은 냉동고가 되는 거다.
"좋아, 제가 사용 할 수 있는 마력의 20% 정도를 깎아버리네요. 감당 할 만한 출혈이에요."
"확신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에요. 당연히 확신하죠. 가치가 있는 일이에요."
20%나 날아가는 건데? 저 냉동 식품들이 네 마력의 20%를 털어갈 만한 가치가 정말로 있는 걸까. 나는 그런 질문이 앞서기는 했지만, 이미 맛있는 음식이라는 욕구에 눈이 돌아가버린 서지현에게 차마 그런 질문을 던질 수는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단순히 냉동 식품을 보존하기 위해서 서지현이 저 스킬을 배운 건 아니다. 그녀의 무기인 에노테르에도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내 장비 몇 가지에도 서지현이 박아넣은 문양이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쉽게 말해서, 최대 마력을 일정량 깎는 대가로 사용하는 장비에 기능 한 가지를 더 추가 할 수 있게 해주는 거다. 배워서 나쁜 기술은 절대 아니다.
그렇게, 나는 서지현의 지시에 따라 부지런히 아직 파주가 땡땡 얼어있는 동안 슈퍼나 마트 따위에 놓인 얼어붙은 고기와 야채, 냉동 식품 따위를 차곡차곡 서지현의 배낭 안에 밀어넣었다.
"완벽해."
그렇게 4시간 정도 이어진 폭풍같은 보급 작전이 종료되고, 나는 애매한 표정으로 서지현을 바라봤다. 서지현이 슬쩍 나를 보고 말했다.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냉동육이라고 해도 지금 상황에서 스테이크나 로스 구이를 먹을 기회는 좀처럼 없잖아요. 맛있는 걸 먹는 일은 사기 진작에 큰 도움이 될 거에요."
말이야 틀린 말이 아니지만. 그래, 어차피 저런 눈을 하고 있는 서지현을 말릴 엄두는 나지 않는다.
그렇게, 작업을 전부 마치고 나서 다시 주둔지로 돌아온 우리는 민혁 소령을 대면했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지?"
서지현의 말에 민혁 소령이 대답했다.
"글쎄, 앞으로의 일은 찬찬히 생각해봐야겠지. 두 사람에게는 정말로 고맙다고 말해두고 싶군."
"서울로 가보지 그래."
한국에서 너무 대우가 나빠서 그렇지 군인은 원래 엄연한 전문직 중 하나다. 게다가 민혁 소령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다소의 마찰이 생길 수는 있어도, 결국은 김용천과 나름대로 죽이 잘 맞을 것 같다. 애초에 고지식한 걸로 따지자면 김용천도 어디가서 유들유들하다는 소리 듣기는 글러먹었으니까. 비슷한 성격인 사람들끼리 잘 지낼 확률이 더 높다고 생각한다.
뭐라고 해야 하나. 소닉이랑 록맨도 서로 만나면 친하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
"서울?"
나는 간단하게 거기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들과, 그 친구들이 모토로 밀고 있는 문구에 대해서 안내를 해줬다.
"생존이 아니라 삶을 원한다. 그렇군."
민혁 소령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턱을 쓰다듬었다.
"강요하는 건 아니야. 만약에 합류하거나, 하다못해 서로 발전적인 관계를 유지해 볼 용의가 있다면 우리 이름을 팔아서 사람을 보내봐. 나쁘지 않은 대답을 들을 수 있을테니."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와중, 병사 한 명이 찾아와서 민혁 소령에게 경례를 한 다음에 말했다.
"작전과장님, 서울에서 온 생존자 몇 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그 말에 응? 하는 소리를 냈다. 아무리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하지만 이건 너무 호랑이잖아.
우리가 랜드 클리어를 마치고 나서 냉동 식품을 끌어모으기 위해서 사용한 시간이 3-4시간 정도 된다. 그 정도라고 한다면 랜드 클리어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파주의 랜드 클리어가 끝나자마자 금촌으로 향했다는 전제 하에, 시간은 얼추 들어맞는다.
문제는, 뭐하러 파주 앞에서 랜드 클리어가 끝나기까지 기다리고 있었냐는거지. 민혁 소령이 우리를 슥 훑어보고 말했다.
"어쩌면, 자네들과 관련이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겠지.
"이야기는 함께 들어보고 싶어."
내 말에 민혁 소령이 고개를 끄덕이고 보고를 한 병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들여보내, 내가 있는 곳 까지 안내하도록."
병사가 경례를 한 다음 돌아갔다. 잠시, 차라도 한 잔 하면서 기다리고 있으려니 문을 열고 사람 몇 명이 들어왔다.
"오현석 씨, 서지현 씨. 다행이다."
녀석들은 꽤나 지친 모습을 하고 들어왔지만, 우리를 보자마자 군대 화장실에서 버려진 맥심 찾아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민혁 소령이 그들과 우리를 번갈아 보고는 말했다.
"아는 사이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 용건은 저 둘에게 있는 건가?"
그의 말에 찾아온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인 다음 민혁 소령의 눈치를 본다.
"저 사람은 괜찮아요, 말씀해 보세요."
서지현의 말에 찾아온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인천에서 이강현이라는 사람이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두 분을 만난 적이 있다고."
투항했다고? 나는 그 말에 살짝 당황했다.
"투항이라니, 이강현이 우리에게 말했던 건 그런 게 아니었는데."
내 말에 그가 대답했다.
"수백은 되는 마물들이 두 분이 떠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인천 바다에서 상륙했다고 합니다. 견딜 수 없다고 판단한 이강현은 그대로 남아있는 생존자를 추려 서울로 향했습니다."
잘 되간다. 인천 바다를 타고 괴물들이 상륙했다니. 그 괴물들은 당연히 카피라가 직접 뽑아낸 수제품들이겠지.
"아주, 대단한 맥아더 나셨군 그래. 서울로 향하는 건 확실해?"
카피라는 우리가 파주에 있다는 사실을 랜드 마크를 강화하면서 알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서울이 아니라 파주로 향할 법도 한데.
"서울로 향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괴물들의 규모와 개체들의 강한 정도가 규격외라고 하던군요. 이강현이라는 자는 두 분이 파주에 있으니, 당장 연락해서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김용천은 그 제안을 받아들여,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파주 쪽으로 사람을 보낸건가.
"... 우리가 서울로 갈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서지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서울을 버릴 수는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버릴 수야 있겠지만 이렇게 버릴 수는 없지.
"그 잠깐 사이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서지현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말이다. 파주에서 보낸 시간은 그렇게까지 길지는 않다. 그 짧은 시간 사이에 그런 일이 벌어지다니.
"일 잘 되간다."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하긴, 가만히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 민혁 소령이 턱을 쓰다듬다가 말했다.
"우리 쪽에서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민혁 소령의 말에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사람들이 시선을 그에게로 돌렸다.
"파주는 방금 전까지 화기를 사용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지."
그래, 지금은 아니지. 물론 대단한 장비까지 기대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하다못해 총과 박격포 정도만 사용 할 수 있다고 해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화기가 크게 의미 없는 건 우리 정도나 되야 가능한 일이지, 실제로 서울의 생존자 대부분은 그 동안 손에 익은 이런 저런 무기를 버리고 총기로 갈아타는 편이 훨씬 더 전투력이 오를 거다.
게다가, 어지간한 남자들은 총 정도는 쏠 줄 아는게 교양이잖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도, 배우는게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다. 잠깐만 만지작거려도 100m 정도 안에 있는 대상 정도는 누구나 쏴서 맞출 수 있다. 개인 화기를 제외한, 박격포 따위는 물론 제대로 된 교육이 필요하겠지만. 그건 이 주둔지 안에 있는 친구들이 어떻게든 해줄 수 있을테고.
다만.
"탄약은?"
화기의 가장 큰 매력이 바로 소모품이라는 점인데. 탄약이 없는 화기는 그냥 기괴하게 생긴 몽둥이일 뿐이다. 내 말에 민혁 소령이 대답했다.
"금촌 인근에는 대대급 탄약보급소가 자리잡고 있어. 부대 안의 탄약으로는 많이 부족하겠지만, 거기에 보관 중인 탄약까지 활용 할 수 있다면 탄약 걱정은 당분간 할 필요 없어."
나쁘지 않은 생각인 것 같다.
"도움을 주신다면, 잊지 않겠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녀석들도 상황을 파악하고 민혁 소령 쪽에 고개를 숙였다.
"생존자들의 규모는?"
민혁 소령의 질문에 그들이 성실하게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래, 남산 타워 쪽에 자리를 잡았구나. 옮겨야 할 물자가 많다면 굳이 옮기지 않고, 그냥 물자가 있는 곳에 자리를 잡는게 최고지. 게다가 남산은 산이니까, 방어하기도 편할테고. 민혁 소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을 지원하겠다. 하지만, 시간이 필요해."
그렇겠지. 탄약과 화기가 아저씨 아주머니들 등산하러 갈 때 챙겨가는 김밥 한 줄도 아니고. 나는 우리를 찾아 파주까지 온 녀석들을 보고 말햇다.
"여기에 남아서 저 군인 아저씨의 준비를 돕고, 함께 복귀해."
우리가 가서 시간을 벌고, 그 사이에 준비를 마친 민혁 소령이 파주에서 서울로 합류하면 된다. 그 이후에 챙겨 온 현대 화기로 충분히 대항 할 수 있겠다 싶으면 나와 서지현은 다시 포인트를 확보하기 위해 아직 랜드 클리어가 끝나지 않은 다른 지역으로 향한다.
대충 계산을 해보면, 한 번 정도 더 랜드 클리어에 성공하면 나도 상점에서 카피라의 저주에 대항 할 만한 장비를 구매 할 수 있으니까. 그 이후에는 카피라의 공세를 버티고 있던 서울에 합류해서, 인천까지 나아가 바다를 확보하면 된다.
민혁 소령과 헤어저, 파주를 나와 서울로 향하며 고민을 거듭하던 나는 입을 열었다.
"지현아, 상황이 생각보다 쉽지 않으면, 너는 서울에 남고 나 혼자 랜드 클리어로 가야 할 수도 있어."
카피라가 보낸 병력에게 현대 화기가 제대로 통하지 않는다면, 나와 서지현 둘 중 하나는 남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미 장비를 확보한 서지현이 서울을 지키는 동안, 내가 다른 지역으로 가서 랜드 클리어를 성공하고 물자를 확보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