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
혹한기
땅굴로 들어가는 입구를 틀어막고 있던 얼음벽이 무너지자 화아아아, 하고 땅굴 안쪽에 쌓어있던 공기가 밖으로 쏟아져 나온다. 찬 공기와 더운 공기가 서로 맞닿아 아지랑이가 일렁거리는 가운데, 우리는 불빛 한 조각 없는 어두컴컴한 통로를 응시했다.
이 안은 미로다, 통과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원래 땅굴은 1자로 쭉 나아가는 형식이었겠지만, 지금 저 안은 완전 꼬이고 뒤엉킨 개미굴과도 같은 구조로 변해 있었다.
"버티는 건 한 달도 문제 없어."
여태동안 배낭 안에 차곡차곡 밀어넣은 물자가 얼마나 많은데. 내 말에 서지현이 대답했다.
"물자는 충분하지만, 한 달이나 걸리면 큰일이에요."
그래, 당장의 목표가 랜드 클리어이기는 하지만 우리에게는 시간 제한이 있다. 한 달이나 여기에 발목이 붙잡혀 있다가는 멕시코의 그 여자가 우리와의 격차를 좁히게 될 거다. 조금 더 심각할 경우, 오히려 우리가 뒤쳐질 수도 있지.
우리가 뒤쳐지고 난 다음에도 제르멩이 우리를 적극적으로 도와줄까?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제르멩이 우리에게 협조해주는 건 현재 우리가 마르골리스에게 닿을 수 있는 유력한 1순위 후보이기 때문이다.
순위가 바뀌면, 우리에게 기울이던 관심은 자연스럽게 멕시코의 여자에게로 쏠릴거다.
빨리 해결해야 한다. 우리는 박살난 얼음을 옆으로 치운 다음, 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 내 기억과는 확실히 다르군."
이전에 왔을 때는 이렇지 않았다. 이건, 그냥 이름만 내가 알고 있던 제3땅굴이고, 완전히 다른 곳이라고 보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다. 손전등을 통해 불을 밝히자 눈에 들어오는 건 눈이 시릴정도로 투명한 얼음이 다이아몬드 원석처럼 덕지덕지 달라붙어있는 어두운 공간이다.
주변의 온도가 올라가면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광경을 보지 못했다면, 얼음인지 확신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함정."
나는 그렇게 말한 다음에 주변을 훑어본 다음 한 발 앞으로 내딛었다. 파작, 하는 소리와 함께 발이 닿은 얼음이 박살나고, 주변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저 멀리 정면에서 굴러오는 거대한 눈덩이.
"씹어먹을까, 녹여먹을까."
내 말에 서지현이 대답했다.
"녹여 먹다가, 적당히 작아지면 씹어먹죠."
좋아. 내가 살짝 옆으로 비키자, 우르릉 거리는 소리와 함께 굴러오는 눈덩이를 향해 서지현이 화염을 뿜어내기 시작한다. 데굴데굴 굴러오던 눈덩이가 녹아내리며 서서히 크기가 줄어들고, 마침내 내 앞에 왔을 때는 아까처럼 거대하지는 않았다.
빠르게 수확자를 휘두르자 허공에 무수한 궤적들이 남는다. 하나, 둘. 박자 맞춰 검집에 수확자를 집어넣자, 쌓여있던 궤적들이 눈덩이를 향해 쇄도한다.
"좋아."
퍼퍼퍽, 하는 소리와 함께 궤적과 부딪친 눈덩이가 마침내 자기 힘을 견디지 못하고 박살났다. 부서진 눈덩이가 남아있던 힘으로 내 쪽으로 쏟아지지만, 이 정도는 어렵지 않게 견딜 수 있다. 팔꿈치로 얼굴을 가리자, 퍼퍼퍽, 하는 소리와 함께 눈덩이들이 몸을 두들기는 느낌이 전해진다.
그걸로 끝이었다. 그 뒤로도 별별 함정들이 다 이어졌다. 발을 딛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바닥에서 자라나는 날카로운 얼음 송곳. 자라나는 속도보다 서지현이 녹이는 속도가 더 빨랐다. 정면에서 쏟아지는 날카로운 얼음 조각들, 닿기 전에 내가 다 쳐낼 수 있었다.
머리 위에서 갑자기 쏟아진 액체 질소도 무사히 피하는데 성공했다. 저건 맞았으면 좀 위험할 뻔했네.
"함정 위주네."
"어쩔 수 없죠. 이제는 아주 대놓고 영하 60도는 우습게 넘나드는데, 제 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가 있어도 이 온도에서 멀쩡하게 움직일 수 있는 괴물이 얼마나 있을까요."
없지 않을까. 그정도면 거의 남극점 수준이잖아. 하다못해 남극에 살고 있는 펭귄도 그나마 온도가 높은 해안가에 살지, 절대로 바람 씽씽 부는 영하 60도의 남극점을 돌아다니는게 아니지. 과장 조금 보태서, 심호흡 한 번 크게 하면 폐가 얼어버릴지도 모른다.
"두 갈래 길이야."
내 말에 서지현이 두 통로를 가만히 노려보고 있다 대답했다.
"왼쪽 길로 가야 해요."
"이유는?"
그냥 찍은거라고 하기에는 너무 확신에 차 있다.
"오른쪽 통로에서 흘러나오는 공기보다 왼쪽 통로에서 흘러나오는 공기가 더 차가워요."
그렇다면 당연히 더 추운 곳으로 향해야 한다. 설마 이제와서 랜드 마크가 조금이라도 더 따뜻한 곳에 머무르고 있을 가능성은 없으니까. 길을 헤멜 일이 없어서 다행이다.
갈림길이 나올 떄 마다 서지현의 충고를 받아가면서 걸어간지,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엄청 길잖아."
우리가 지금 추위에 벌벌 떨면서 기어가는 것도 아니고, 온도는 아르도르 덕분에 일정 수준 이상으로 유지하면서 빠른 속도로 나아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 망할 놈의 굴은 그 끝을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물을 한 모금 마신 서지현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머, 이럴 거라고 예상했잖아요? 잠깐 쉬었다 가죠."
그래, 그건 그렇지. 마음 같아서는 이 굴에 난 길을 따라가지 않고, 그냥 벽을 떄려 부수면서라도 진격하고 싶은 기분이지만, 그럴 기분이라고 진짜로 저지를 수는 없다. 동굴이니까, 서지현이 일어킨 폭발로 인해 어딘가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답이 없다.
한 15분 정도 쉬고 나서, 우리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15시간 정도는 이동해야 했던 것 같다. 우리가 15시간 정도를 이동해야 했다는 건, 다른 사람들은 거의 3일에서 4일 정도는 이동해야 할 정도의 거리라는 뜻이다.
여기 저기 함정이 잔뜩 깔려 있어서 우리도 함부로 속도를 높힐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이거, 점점 얼음이 많아지는데."
처음에는 동굴 벽에 얼음 덩어리들이 박혀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는데, 이제는 거의 얼음 덩어리 사이에 돌조각이 드문드문 보이는 수준으로 돌과 얼음의 비율이 역전되었다. 좋은 소식이다.
- 아, 아아아아아!
희미한 고함소리가 들린다.
"들었어?"
내 말에 서지현은 고개를 저었다. 못 들은 모양이다.
"비명소리였어."
내 대답을 들은 서지현이 침을 삼켰다.
"그럼 거의 다 도착한 모양이네요."
좀처럼 쓸 일이 없고, 거추장스럽기도 해서 배낭 안에 넣어두었던 에노테르를 꺼내든 서지현이 주변을 둘러보고 말했다.
"대충 영하 70도. 비명을 질렀다는 건 생물이라는 뜻인데."
그래, 분명히 그건 육성이었다. 영하 70도에 살아있을 뿐 아니라, 저렇게 우렁찬 고함을 지를 정도로 쌩쌩한 생물이 있다니. 간헐적으로 계속해서 비명소리가 들린다. 이제는 서지현도 똑똑히 들을 수 있는지 고함 소리가 날 때 마다 조금씩 발걸음이 느려진다.
마침내 작은 쪽문 하나가 동굴의 끝에 자리잡고 있다. 고함은 이 문 너머에서 들려오고 있다. 너무 가까워져서 그런지, 이제는 고함 뿐만 아니라 낮은 신음소리도 들릴 지경이다. 문을 열려고 다가가는 서지현을 멈춘 나는 손거울을 사용해 문 너머를 살펴봤다.
"저게 뭐야."
얇은 거적데기 한 장을 걸친 남자 한 명이, 온 몸에 서리를 뒤집어 쓴 채로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물론, 이 온도에 저런 걸레 대용으로 쓸 법한 거적데기를 걸치고 살아남아 있다는 것도 굉장한 일이지만, 내 눈에 잡히는 건 그의 오른손이다.
시퍼렇게 괴사한 오른팔. 움직일 수는 있는지, 녀석이 그 손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다가 다시 한 번 크게 비명을 지른다. 보고 있기 참 여러가지로 괴롭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녀석의 번들거리는 시선이 우리 쪽으로 향한다. 몰아쉬는 숨소리가 거칠고, 입에서는 허연 서리가 줄줄 흘러내린다.
"미친 이오리 같은 느낌인데."
죄수라도 되는 걸까. 녀석의 목에는 얼음이 마구 엉겨붙은 강철제 개목걸이 비슷한게 걸려 있다. 녀석을 뚱하게 바라보고 있던 나는 자세를 고쳐잡고 수확자를 들어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래. 그냥 이대로 싸우게 둘리는 없다고 생각했어."
이번에도 어김없이, 카피라가 랜드 마크에게 힘을 주입하기 시작한다. 또 이번에는 꼴에 추운 곳이라고 색감이 어을리는 청장미가 사방에 마구 피어나기 시작한다.
[낙인찍힌 죄수가 짊어진 저주가 카피라의 권능으로 강화됩니다.]
[빙결의 저주가 빙화의 저주로 변합니다.]
저주? 나는 그 말에 녀석의 손을 멍하니 바라봤다. 녀석이 입에 개거품을 문 채로 몸을 덜덜 떨기 시작한다. 허옇게 뒤집힌 눈. 바닥에 풀썩 쓰러진 녀석이 자신의 오른손을 부여잡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다.
동상으로 괴사한 오른팔이, 서서히 얼음 그 자체로 변하기 시작한다.
"어딜."
변신한다고 기다려 줄 것 같냐. 나는 어깨에서 단검을 뽑아내 던지고는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 아아아아!
오른 어깨까지 통째로 얼음으로 변한 녀석이 그 팔을 뻗어 자신에게 던져진 단검을 붙잡았다. 그리고, 녀석의 손에서 박살난 투명한 조각들이 바닥으로 흘러내린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로 빠졌다.
"변했어."
던진 단검이, 저 손에 닿자 그대로 얼음으로 변해버렸다. 나는 슬쩍 수확자를 바라봤다. 저 오른손에 잡히면 설마 이것도?
확실하지는 않다. 어깨에서 뽑아낸 일회용 단검과 수확자는 엄연히 급이 다르니까. 하지만, 그걸 직접 확인해 볼 용기는 없다. 서지현이 곧바로 녀석에게 기관총처럼 화염을 난사한다. 그리고, 그 화염을 향해 녀석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아니, 이건 아니잖아."
그리고 그 결과물은 충격적이었다. 저건 손에 닿은 것들을 얼리는 저주가 아니다. 손에 닿은 게 무엇이건, 얼음으로 변하는 저주다. 비슷한 말이지만, 그 결과는 너무나도 다르다. 뿜어지던 형태 그대로 얼음으로 변한 서지현의 불꽃이 바닥으로 떨어져 박살난다.
저걸 본 나는 확신했다. 저 손에 닿으면 수확자도 얼음으로 변할거다. 참령은 그래도 급이 있으니 얼음으로 변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최소한 수확자는 확실해 보인다.
닿은게 얼음으로 바뀐다니. 마이다스 친구 같은 거냐. 이걸 어쩐담. 랜드 마크 클리어는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런 식으로 어려워 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거 변신도 하는 거냐?"
얼음으로 변한 녀석의 손이 기괴하게 모습을 바꾸더니, 이내 거대한 대포로 변했다. 그리고, 그 대포의 포구에 박혀 있는 건 얼음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작살이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작살포로 변한 녀석의 손에서 작살이 날아온다. 작살의 꽁무니에는 얼음으로 만들어진 사슬이 연결되어있다. 급하게 보호막을 만들었지만, 작살이 닿은 부분이 얇은 얼음판으로 변하고, 그대로 박살난다.
저것도 팔로 치는 건가. 쐐에엑, 하는 소리와 함께 날아온 작살을 급하게 몸을 던져 피하자, 작살이 박힌 곳부터 시작해, 빠르게 얼음으로 변해가는 돌바닥. 작살과 이어진 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지더니, 박혀 있던 작살이 뽑혀나와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간다.
서지현이 발을 한 번 크게 굴렀다. 녀석이 서 있는 바닥이 터져나가며 화염이 치솟았지만, 거대한 방패 모양으로 바뀐 오른팔이 터져나가는 바닥 쪽으로 향하자. 솟구친 폭염이 얼음으로 변해, 형체가 굳어진다.
- 나는, 잘못하지 않았어. 왜 내가 이렇게 고통받아야 하는건데. 어째서! 아파, 추워... 죽을 것 같이 힘든데. 벌써 얼마나 시간이 지난건지도 모를 정도로 아득한 시간이 흘렀는데! 언제 끝나는 거야?
망할 새끼. 니가 여기에 갇힌 게 우리 잘못도 아닌데 왜 우리한테 화를 내는거야. 녀석의 오른손이 석궁으로 변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얼음으로 변한 서지현의 화염이 뜯어져 나가. 석궁에 장전된다. 퉁, 퉁, 퉁. 하는 현을 튀기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얼음으로 만들어진 화살이 나에게 날아온다.
하지만, 녀석이 날린 화살은 내가 급하게 만들어낸 보호막을 얼음으로 바꾸지 못하고 튕겨져 나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화살이 닿은 돌바닥도 멀쩡하게 돌바닥인채로 남아있다.
"그래, 그 팔에 닿지만 않으면 된다는 거지."
화살은 저 팔과 연결점이 없으니까. 아까의 작살포와는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