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
혹한기
나는 서지현과 함께 정체 불명의 괴물이 있는 곳으로 추정되는 곳 바로 위의 지상에 도착했다. 후웅, 하고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서지현이 발꿈치로 툭 하고 땅을 찬 다음에 말했다.
"여기에요?"
"그래."
천장을 박살내서 들어간다고 하는 꽤나 과격한 방법이지만, 이 편이 차라리 편하다. 저기 마련된 입구로 들어가려고 한다면 또 마마 델리 떄 처럼 온갖 귀찮은 것들이 달려들어 귀찮게 굴 테니까. 서지현이 바닥에 손을 가져간 다음에 가볍게 심호흡을 한 번 했다.
나는 약간 물러나서, 그 광경을 지켜본다.
콰쾅, 하는 격렬한 폭음과 함께, 포장된 도로에 금이 쩍쩍 가면서 그 틈새로 화염이 치솟는다. 충격이 얼마나 강렬한지, 주변에 있던 건물들도 덩달에 덩실덩실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이런, 두 번 정도는 더 해야겠네요."
폭발로 인해 일어난 먼지 속에서, 서지현이 중얼거리고는 금이 쩍쩍 간 도로 위에 다시 손을 올렸다. 이어지는 폭음과 함께 이번에는 박살난 포장재가 하늘로 치솟는다.
"아마, 한 번 더 하면 무너질거에요. 준비 하세요!"
서지현의 외침, 나는 안으로 들어갈 준비를 마치고 서지현에게 외쳤다.
"터뜨려."
이어진 폭음. 땅에 싱크홀이라도 생긴 것처럼 우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구멍이 뚫린다. 나는 곧장 무너진 천장을 통해 서지현과 함꼐 지하로 진입했다.
***
새빨갛게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두들겨지는 철을 보고 있으면, 숭고함까지 느껴진다. 땀을 흘리면서 망치를 두들기면 선명하게 불똥이 튀었다가 다시 사라진다. 그렇게, 한 번 한 번의 망치질에 최대한의 정성을 쏟아 넣어 두들기고 나면, 이내 모양이 완성된 빨간 쇳덩이를 붉은 액체 속에 밀어넣는다.
울룩불룩하게 꿈틀거리는 근육이 그 동안 이 괴물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만들었고, 앞으로도 만들 수 있는지를 자랑하는 것 같다.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달궈진 쇠가 피를 머금은채 식는다. 원래라면, 달궈진 쇠를 피로 담금질 하는 행위는 금속을 망치는 일이지만, 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일이다.
"나쁘지 않군."
5m는 될 것 같은 크기의 거대한 외눈박이 괴물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꺼내든 금속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턱을 쓰다듬는다. 이제 남은 건, 모양이 잡힌 검을 잘 갈아서 날을 세우면 된다. 완성된 아이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천장에서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돌가루가 부스스 떨어진다.
"응? 뭐야."
한창 쭈그리고 앉아서 칼을 갈고 있다가 고개를 들자, 천장에 생겨난 잔금이 보인다. 갑자기 천장에 왠 금이 생긴거지. 라는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다시 한 번 쿠웅, 하는 둔중한 소리가 울렸다. 천장에 생겨난 잔금이 쫙쫙 퍼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갈라진 틈으로 달궈진 공기가 희미한 불꽃들과 뒤섞여 확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이게... 무슨..."
그리고 마침내, 우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천장이 박살나 무너졌다.
"FBI OPEN UP!"
돌가루와 먼지가 쏟아져 눈 앞을 가린 와중에, 그 먼지 속에서 누군가의 장난치는 것 같은 외침이 들렸다. 서서히, 먼지가 가라앉기 시작한다. 그리고, 쏟아진 돌덩이로 인해 무너진 용광로와, 바닥을 적시며 식어가는 쇳물이 눈에 들어온다. 작업장이 박살났다. 오랜 시간에 걸친 조정 끝에 마침내 쓸만한 장소로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다시 처음부터 해야 한다니.
곧바로, 외눈박이 거인의 거대한 눈동자에 핏발이 선다. 아닌 밤 중에 날벼락이라는게 바로 이런 상황이 아닐까.
"네 놈들!"
그는 그렇게 외치며 거대한 망치를 들어올리고 숨을 격하게 몰아쉬었다. 남의 작업장을 이렇게 박살내는 경우가, 세상에 어디있단 말인가. 말로는 차마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한 분노가 그의 몸을 휘감았다.
외눈박이 거인이 한 손을 옆으로 뻗었다.
***
눈 앞에 서 있는 외눈박이 거인 친구는 우리가 천장을 부수고 들어온게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눈에 핏발을 세운 채 한 손에 망치를 들고, 다른 손을 옆으로 뻗자, 진열장에 걸려 있던 갑옷들이 휙휙 날아와서 녀석의 몸에 철컥거리며 달라붙는다.
순식간에, 아랫도리를 가리는 용도로 입고 있던 거적데기 한 장이 전부던 녀석의 몸이 갑옷으로 완전무장된다. 이야, 저거 아이언 맨에서 본 것 같은데.
"어디에서 뭘 하며 굴러먹다 들어온 자식들인지는 모르겠지만, 너희는 오늘 여기에서 살아 나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러시겠지. 슬쩍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커다란 통 안에 담겨 있는 시뻘건 액체를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피는 저렇게 많이 모아서 어디에 쓰려고?"
내 말에 서지현이 대답했다.
"통 안의 피, 온도가 꽤 높네요. 아마 저걸로 담금질을 한 모양이에요."
피로? 그게 가능한 일인가. 천장을 무너뜨려 도착한 공간 안은 꽤 후덥지근했다. 안 그래도 영어마을에 도착하면서 추위에서 벗어나, 위에 껴입고 있던 옷을 벗어던진 서지현이 손부채질을 몇 번 한다. 입고 있는 군복 상의의 지퍼는 명치 정도까지만 올려져 있고, 그 위로는 군복 안에 입은 하얀 셔츠가 훤히 드러나 있다.
"그렇게 입고 있으면 영창 갈 걸."
서지현은 내 말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지퍼가 안 올라가는 걸 어떡해요? 이건 내 잘못 아니에요."
그런 대화를 하고 있으려니, 옆에서 성이 잔뜩 난 외침이 들린다.
"이 놈들!"
잠깐 고민하는 사이 내 머리 위로 녀석이 들고 있던 거대한 망치가 휘둘러졌다.
"마음 같아서는 적당히 놀아주고 싶지만."
나는 휘둘러지는 망치를 보고 있다가 손을 뻗어, 휘둘러진 망치를 받아냈다. 두웅, 하는 울림과 함께 충격이 몸을 타고 퍼진다. 엄청 화가 난 상태에서 전력으로 휘두른 힘이 이 정도라면, 가여울 정도다.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면 싱겁게 마무리 지을 수 있겠는데.
"후우, 야. 니 윗 녀석 어디에 있냐."
망치를 받아낸 나는 팔에 힘을 꽉 준 채로 녀석을 노려봤다. 녀석이 눈동자에 경악을 담은 채 입을 쩍 벌린다. 거참 눈깔은 하나 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 표현은 참 자유자재군 그래.
"빨리 말하면 그만큼 빨리 편해질 거에요."
그리고 이어지는 기침소리.
"이런 망할...!"
녀석이 다시금 망치를 들어올려, 나를 향해 휘둘렀다. 나는 그 꼴을 보고 있다, 어깨에서 단검을 뽑아 쇼크를 걸고 망치를 잡고 휘두르는 팔에 박아넣었다. 입고 있는 갑옷에서 파팍 하고 스파크가 튀며 녀석이 괴로운 신음을 흘린다.
"빨리 말해. 이 새끼야. 시간 없어."
뻐억,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발이 녀석의 정강이를 후려찼다. 으직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이 바닥에 주저 앉았다.
"망할, 망할 자식들! 아아아아악!"
뭐라고 말을 이어가던 녀석이 갑자기 양 손을 들어 자신의 눈알을 가린채 고통에 찬 비명과 함께 몸을 덜덜 떤다.
"질문을 했잖아요, 그럼 대답을 돌려 줘야 할 거 아니야."
서지현은 크흡, 하는 소리와 함께 코를 잠깐 훌쩍이고는 녀석을 노려봤다. 그 사이, 무너진 작업장을 살펴보던 나는 벽에 걸려 있는 종이를 발견했다. 이건, 지도? 아래에 뭐라고 말이 적혀 있기는 한데, 내가 해석 할 수는 없는 글자들이다.
"이거, 확인해줄래?"
서지현이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지도를 확인한 다음 대답했다.
"이 지도에 표시된 위치에 있어요. 하지만, 지도 자체가 그렇게 크지 않아서... 위치는 잘 모르겠네요."
"민혁 소령이라면 알 것 같은데."
소령 아저씨, 원래는 작전과장이라고 했었지. 그럼 이 정도로 작은 지도를 보고도 어딘지 알 수 있을 확률이 높다.
위치도 찾았겠다. 더 이상 이 녀석은 쓸모가 없다. 나는 아직도 눈을 감싸쥐고 신음하는 녀석의 목덜미를 향해 수확자를 힘껏 휘둘렀다. 터억, 하며 손에 걸리는 느낌과 함께 녀석의 모가지가 바닥을 구른다. 머리가 떨어져 나간 몸통에서 피가 확 솟구치고, 나는 쏟아지는 피를 피해 뒤로 물러났다.
[미션 클리어]
이런 식으로 클리어하라고 만들어냈던 미션은 아니겠지만. 뭐 어때. 어디로 가도 목적지에 도착하면 되는 거잖아.
"랜드 클리어도 이런 식으로 수월하게 진행되었으면 좋겠지만."
그럴리는 없겠지. 카피라의 눈 밖에 난 덕분에 우리의 랜드 클리어는 한층 난이도가 올라갔으니까. 지도를 챙긴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후끈하다.
"원인이 뭘까."
내 말에 서지현이 턱짓으로 박살난 용광로 쪽으로 다가갔다.
"이 안에 있을 것 같은데."
서지현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시뻘겋게 달궈져 있는 잔해들을 맨 손으로 뒤적거리기 시작한다. 불티가 사방으로 날리는 와중에, 서지현이 아, 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를 찾아내 손에 들었다. 새빨간 보석이다. 안에는 주황색의 화염이 일렁거리고 있는게 보인다.
[아르도르 : 화염, 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끝을 알 수 없는 화염을 간직한 이 보석은 어지간한 사람들은 손을 가져가는 것 만으로도 손이 숯으로 변해버릴 정도로 뜨겁습니다.]
손이 숯으로 변해버릴 수도 있다는 살벌한 설명과는 다르게, 서지현은 별 다른 문제 없이 주먹만한 크기의 저 보석을 손에 들고 있었다.
"어디보자. 이러면..."
서지현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잠깐, 보석 주변에 푸른 기운이 일어나나 싶더니 보석이 공중에 떠올라 서지현의 옆에 자리잡는다. 바로 옆에 떠오른 보석을 바라보던 서지현이 벽 쪽으로 시선을 더졌다. 두두두두, 하는 소리와 함꼐 보석에서 자그마한 화염들이 기관총처럼 쏟아져 나와 벽을 후려갈긴다.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속도다. 물론, 전에도 비슷한 숫자의 화염을 만들어내서 같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었겠지만, 이 정도로 빠르지는 않았다.
"좋네요. 예상대로, 마력도 훨씬 적게 사용하게 되었고."
서지현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스펙 업이라, 언제나 환영할 만한 일이지.
"정작, 저주를 막아낼 만한 장비를 찾아내지는 못했네."
내 말에 서지현이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죠. 정 못찾겠다 싶으면 포인트를 쏟아넣어서 상점에서 구매를 하는 수 밖에."
적은 포인트를 들일 수는 없다. 기왕에 상점에서 마련해야 한다면, 상점을 통해서 구매할 수 있는 장비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좋은 녀석이 필요하다. 당연히, 그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물론 싸게 구하려고 한다면 바람개비를 샀을 때 정도의 저렴한 가격으로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지만. 그게 과연 카피라에게 먹힐까?
물론 먹힐 수도 있겠지.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신이다.
하지만 그런 저렴한 장비로 어떤 저주든지 막아낼 수 있다면 뭐하러 떡하니 2만 포인트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가격을 자랑하는 장비가 목록에 자리잡고 있는 건데. 저 정도 가격이라고 한다면 반사 신경 계열의 스킬 하나를 새로 구매해서 두 번 정도는 강화해도 남는 포인트가 있을 정도로 막대한 금액이다.
그리고, 내가 구매할 장비 후보기도 하지. 그럴 가치가 있기를 바란다.
"돌아가야 하니까, 옷 다시 챙겨 입자."
우리는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온 몸에 다시 옷을 덕지덕지 껴입었다. 그리고, 나는 서지현을 다시 안아 올린채 영어마을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