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래서 나는 탈옥했다-183화 (183/237)

# 183

혹한기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군부대에 대한 나의 감상은 참 간단했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해야 하는 일을 한다.

딱 한 문장으로 표현되는 일이기는 하지만, 한 조직이 그 경지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던한 노력이 필요하다. 분명히 파주에 자리잡고 있는 이 군부대 내의 생존자들은 그 삶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물자는 부족하고, 밖에 비해서 따뜻하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혹한 날씨. 조금이라도 몸을 녹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뭔가를 불살라야만 하는 이 긴 시간 속에서도, 어떻게든 생존자들은 자신들의 인간성까지 땔감으로 태우지 않는데 성공했다.

"민둥산이 따로 없네."

당연한 말이지만, 나무는 불이 붙으면 탄다. 불이 붙어서 타면 열이 나온다. 본래 군부대의 풍경이라고 하면 구불구불한 지형에, 순찰을 할 때 마다 눈에 띄는, 시퍼렇게 우거진 나무들인 법이지. 하지만 지금은 사람들의 몸을 덥히기 위해서 잘려나가, 드럼통 안에 담긴채 타닥타닥 타오르는 비명을 지르는 중이다.

"그나저나, 점호는 처음 해봤어요. 신기하네요."

서지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지현이 군대를 갈 일은 없으니까.

일단, 주둔지 안의 생활 자체는 군대와 비슷하게 돌아간다. 아침이 되면 점호를 하고, 오늘 해야 하는 일에 대해서 점검을 한다. 그리고, 일과가 시작되면 각자 하기로 한 일을 진행한다. 그리고, 아침 점호는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민혁은 성정이 딱딱한 성격이기는 해서, 어지간해서는 예외를 두고 싶어하지 않는 편이다.

"우리도 할 일을 해야지."

서지현이 병영 식당에서 식사하는 사람들을 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냉동식품 천지라서 식사는 괜찮게 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네요."

그러게, 재료 신선하게 보관하는 것 중에 최고는 역시 냉동이잖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공되는 식량은 그렇게까지 풍족한 편이 아니다.

"먹는 입이 많으니까."

"아낄 수 있을 때 아껴두는게 좋죠."

그래, 어차피 얼어있다는 건 상할 우려가 없다는 거고, 그럼 아낀 식재료는 썩는게 아니라 그대로 보존 할 수 있으니까. 지금 조금 검소하게 살아야 나중에 배를 안 곯지.

"아니면 이미 식량도 거의 다 먹었을 수도 있고."

이 추위에 나가서 불을 피울 수 없으니, 체온이 완전히 나가서 저체온증에 걸려 죽은 다음, 꽝꽝 얼어서 시차로 되살아나고 싶지 않다면 어쩔 수 없이 주둔지에서 일정 거리 이상을 벗어날 수 없다. 이미 손이 닿는 곳에 있는 물자들은 죄다 빨아냈다고 봐야한다.

"우리가 썩 좋은 타이밍에 찾아온 모양이네요. 뭐, 민혁이라는 소령도 썩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고."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할 정도가 아니지."

세상이 이렇게 망하고 나서 조심해야 하는 사람들 참 많다고 하지만 군인만큼 위험한 존재가 또 있을까. 총 들고 있고, 갇혀서 생활하느라 여자는 보지도 못해서 미칠 것 같고. 밖에 나가면 총에 대항 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민간인들이 한 가득 있고.

국가 수호의 신성한 의무를 다하던 용맹한 장병들이 산적집단으로 변모하는건 순식간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기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이게 단순히 부대 안의 구성원들이 다들 천사표라서 가능한 일이었을까. 나는 아니라고 보는데.

"조금 먹고, 조금 자고, 많이 일하다니."

"저승 빨리 가려고 콜택시 불러놓은 격이지 뭐."

지금도 일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간단하게 말해서 일일 간담회 같은 거다. 병사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세상이 망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부대 주둔지 안에 묶여있어야 한다는 것은 어지간히 부담되는 일이다. 당장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만 해도 가족들의 안위부터 시작해서 별의 별 생각이 다 들 테니까.

그건 민혁 소령 또한 마찬가지일텐데, 자기도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와중에 남을 독려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까딱 잘못하면 누구 신세가 더 구차한가 비교하는 콘테스트가 열리기 십상이거든.

"어쨌든, 일이 끝나고 나면 서울의 생존자들을 소개시켜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민혁 소령은 작전과장으로 있는 사람이다. 군인, 이라고 하면 인식이 별로 좋지 않은게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령까지 단 군 장교라는 건 분명히 전문 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의 생존자들과 합류하게 된다면 분명히 민혁 소령은 자신의 전문 분야를 통해 기여할 수 있는 점이 있겠지.

"끝나고 나서 생각하자."

지금 집중해야 하는 건 그런게 아니잖아. 물론, 랜드 클리어를 실패할 가능성이 그렇게 높지는 않다고 해도 선결 과제도 끝내지 않고 다음을 생각하는 건 엄연한 방심이다. 지금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해야지.

"금촌 주변은 절대로 아니야."

만약에 이 주변에 랜드 마크가 있었다면 민혁 소령은 구조 작전은 커녕 이 안에서 몸 건사하는 것도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꾸준히 민간인 구조 작전을 진행한 것을 미루어 생각해보면, 랜드 마크가 이 주변에 있었을 시 모르고 있을리가 없다.

"정찰은 목걸이의 도움을 조금 받아야겠네."

1시간이 지날 때마다 3분이라는 제한 시간이 있기는 하지만, 그 3분 사이에 커버 할 수 있는 범위는 굉장히 넓다. 돌아다니며 조사하는 와중에 1시간이 지날 때마다 꼬박꼬박 사용하는 걸로 충분하다.

"깔깔이."

정식 명칭 신형 방한복 상의 내피. 너무나도 익숙한 갈색의 무언가를 살펴보는 내 입에서 절로 한숨이 흘러나온다.

물론 보온 대책은 전적으로 서지현에게 의존해도 상관은 없다. 영상 10도 정도로 유지해 준다면 사실 늦가을 정도의 날씨에 산책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하지만, 랜드 마크 찾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 지도 확실하지 않은 판국에 서지현의 마력을 쪽쪽 빨아먹을 수는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옷을 두껍게 입어야 했고, 당연하게도 군부대에서 껴입을 수 있는 방한용품이라고 하는 것들은 한정되어있었다. 깔깔이에서 눈을 돌리면 보이는 건 더 끔찍한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물건들이 눈에 들어온다.

"스키 파카라니."

죽어버리고 싶네.

에라이, 집어 치우자. 없는 것 보다는 나을 거 아니야. 주섬주섬, 입을 수 있는 것들을 다 낑겨 입은 다음, 서지현이 나를 슬쩍 보더니 안면 마스크를 살짝 내린 다음 말했다.

"굴러다니는게 빠르지 않을까요?"

"그러게 말이다."

이 상태로 싸울 수는 있을까? 싶어서 수확자를 뽑아들고 휘둘러본 나는 허허허 웃었다. 둔해지기는 했지만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 정말로 즐겁기 짝이 없는 옛날 추억이 녹아든 복장을 한 나는 서지현과 함께 안전지대를 벗어났다.

후웅, 하고 불어닥치는 매서운 바람. 거기에 더해서 온도는 최소 영하 35도. 산책하기에 딱 좋은 날씨다.

"날씨 하고는. 정 상황이 좋지 않다 싶으면 부탁할게."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금촌을 뒤져 볼 필요는 없으니, 우리는 곧바로 금촌을 나섰다.

"운정부터 가봐야 하나."

이미 지나쳐오기는 했지만, 조사를 제대로 하지는 않았으니까.

"운정의 중심부 근처에 아파트가 있어요.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살펴보면 어떨... 악."

말을 하던 서지현이 갑자기 그대로 쭉 미끄러질 뻔했다. 손을 뻗어 뒤로 넘어가는 서지현을 잡은 나는 다시 자세를 바로잡게 도와줬다.

"조심해야지."

-

서지현이 내 말에 머쓱하게 웃었다.

"쌓인게, 눈이 아니라 얼음이라고 해야겠는걸요."

온도가 온도다보니 쌓인 눈은 거의 녹지 않는다. 물론 녹지 않는다고 해도 얼음에서 바로 기체로 변하는 현상이 일어나기는 하지만, 녹아내리는 것에 비할 속도는 아니지. 쌓여있는 눈은 녹아내리는 대신, 사람의 발에 밟혀 꾹꾹 눌려 그대로 얼음과 다를 바 없이 미끄럽게 변했다. 나는 괜찮지만, 아무래도 서지현은 걸음이 불편한 모양이다.

우리는 조심하면서 계속 이동하기 시작했다.

"저건..."

서지현이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거대한 눈더미를 가리켰다. 사실, 눈더미라는 표현보다는 산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쌓인 눈을 주변에서 박박 긁어 모아서, 뭔가가 산을 쌓아놓았다.

"구멍이 스펀지처럼 숭숭 뚫려있는데."

그리고 그 구멍 너머의 어두운 부분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는게 보인다. 안에 뭔가가 있다. 그것도 많다. 둥지 같은 건가? 분명한 건 저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눈더미 안에 뭔가가 살아서 움직이는 중이라는 거다.

"저 구멍 안에 있는 녀석들, 우리를 보고 있어."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구멍에서 뭔가가 타타탁, 하는 소리와 함께 튀어나왔다. 그걸 본 서지현이 눈을 깜박이다가 말했다.

"여우?"

그것도 하얀 여우다. 왜, 소위 말하는 북극여우라고 하는 엄청 귀엽게 생긴 여우를 닮았는데, 그게 한 무더기 튀어 나와서 지들이 쌓아놓은 거대한 눈산 위에 곱게 자리잡고 우리를 바라본다.

"불길하죠?"

하지만 슬프게도 우리는 귀여운 동물을 보고 귀엽다고 까르륵 거리며 다가가기에는 너무나도 감성이 메마른 인생들이다. 파주 한 복판에 북극여우? 그것도 그냥 북극 여우도 아니고 눈을 끌어모아 집을 짓고 그 안에서 단체 생활을 하고 있는 북극 여우라.

그게 괴물이 아닐리가 없잖아. 그리고, 그런 나름의 추측에 확신을 더해주는 문자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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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 : 주거박살죄

목표 : 작은 동물 친구들이 쌓아올린 눈더미. 저 작은 몸으로 전력을 다해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만들었을 동물 친구들의 노고를 생각해보면 안쓰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보이는게 전부는 아닌 법이다. 녀석들이 만들어 낸 둥지를 파괴해야 한다.

보상 : 1300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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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던 녀석들이 갑자기 캉캉, 하는 소리를 내고는 양 손으로 부지런히 지들이 쌓아놓았음이 분명한 눈산을 엄청난 속도로 파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파낸 눈은 물리 법칙을 무시하고, 녀석들의 몸에 덕지덕지 달라붙기 시작한다.

"이런 씨팔."

정확히 말하면 그냥 눈덩이가 아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창백하게 얼어붙은 팔이나 다리, 심지어 머리통이나 얼어붙은 내장 따위도 녀석들의 몸에 달라붙는 중이다. 씹어먹은 흔적 같은게 보이는 걸로 봐서는, 저게 집 재료 겸 식량이었던 모양이다.

녀석들의 몸을 감싸는 눈과 시체의 덩어리가 점점 커진다. 설마 뭐, 저걸로 깔아 뭉개서 죽이기라도 한 건가. 서지현이 그걸 보다가 말했다.

"지켜 볼 수는 없죠?"

당연하지. 저 여우들이 자기 몸을 눈덩이로 감싼 이유가 우리에게 재롱 피우려고 그러는 건 절대로 아니잖아. 냉랭하기 그지 없던 파주 한 복판, 마침내 순간적으로 봄이 찾아오는 것처럼 공기가 달궈지기 시작한다. 물론, 내가 느끼는 건 아니다. 내가 느끼는 온도는 기껏해야 영상 15도 정도. 하지만 바깥의 세상은 그렇지 않다.

녀석들이 부지런히 쌓아올린 눈덩이가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눈덩이 속에 숨어있던 사람들의 얼어붙은 시체도 해동되기 시작한다.

그 사이 녀석들에게 달려든 나는 요망하기 짝이 없는 포즈로 나를 올려다 보는 녀석의 목을 움켜쥔채 들어올리고 어깨를 으쓱했다.

"동물보호단체가 슬퍼하겠네."

미안하지만 귀엽게 생겼다고 만사가 해결되는게 아니야. 으둑, 하는 소리와 함께 손에 잡힌 녀석의 목이 팍 꺾인다. 그 사이에 녀석들이 나름대로 최대한 사납은 표정으로 가르르륵, 하는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걸 어쩌나.

"니들 오늘 사람 잘못 만났어."

우리가 포인트가 좀 필요하고, 너희를 잡아 족치면 필요로 하는 것을 얻을 수 있거든. 잘 가라.

열기로 녹아내려 축축해진 대지 위에서, 눈덩이를 굴려 사람들을 파묻는 취미를 가지고 있던 유사 북극 여우들의 최후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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