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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탈옥했다-182화 (182/237)

# 182

혹한기

얼어붙은 나체의 시체들을 제거하며, 우리는 마침내 금촌에 도착했다. 그 와중에는 별의 별 녀석들이 다 달려들었다. 온 몸에 북실거리는 털을 한 가득 품고 있는 설인도 있었고, 둥둥 떠서 돌아다니는 얼음 덩어리 같은 것도 있었다. 강하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안동에서 처리했던 살점 덩어리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녀석들을 처리하는 데에는 이제 나와 서지현은 힘을 크게 들일 필요도 없는 수준까지 강해져 있었으니까.

"경험치도 별로 주지 않네요."

그리고 약한 만큼 주는 경험치도 형편없었다.

"어쩔 수 없지."

이제 어지간한 괴물들을 잡아서 받게 되는 경험치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클리어를 통해서 벌어들이는 포인트가 주력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

나는 길 근처에 방치된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봉지 하나를 꺼내 흔들었다. 소위 말하는 냉동식품이다. 꽝꽝 얼어있다. 전기가 나가면 냉동 상태를 유지 할 수 없어서 죄다 상하기 마련이지만, 얼어붙은 도시인 파주는 예외다. 냉동 식품 뿐이 아니라, 식품이라는 식품은 죄다 꽝꽝 얼어붙어 있다. 해동시키면 맛은 보장 할 수 없어도, 일단 먹을 수 있는 식재료로 쓸 수 있는 것들이 꽤 있겠지.

"냉동이라."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안전지대로 군부대로 잡은게 뭐 추운 겨울 군부대의 컨셉이라도 잡아보려는 속셈이었을까.

우리는 그렇게 별로 영양가도 없는 괴물들의 습격을 상대하면서 차근차근 나아가 금촌에 도착하는데 성공했다.

"굳이 찾아볼 필요도 없겠네요."

서지현은 그렇게 말하고는 어딘가를 가리켰다. 검은 연기 줄기가 하늘로 퍼지고 있었다. 연기가 난다는 소리는 불이 피워졌다는 뜻인데. 파주에서는 스킬을 사용한게 아니라면 불을 피울 수 없다. 그 말은, 저 연기가 올라오는 곳이 안전지대로 설정된 군부대라는 뜻이지.

그리고, 아직 생존자들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우리는 연기를 확인하면서 그 쪽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의외로 시내에 자리잡고 있네요."

그러게. 군부대는 보통 외진 곳에 있기 마련인데 이 군부대는 시내라고 할 수 있는 금촌역 부근에서 별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뭐, 우리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다. 주둔지 안으로 들어가는 위병소. 그 앞에는 사람들이 옷을 두껍게 차려입은 채 K-2를 들고 경계를 서는 중이었다.

저기부터는 안전지대인 모양이다. 당연히, 총알은 격발 되겠지. 위병소로 다가오는 우리를 발견한 녀석들이 총을 겨누며 말했다.

"정지, 정지, 정지. 손들어."

뭔데 이건 또. 나는 녀석들을 보다가 한숨 섞인 한 마디를 던졌다.

"움직이면 쏜다?"

이거 왜 이래.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나는 녀석들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 엄동설한에 개고생해가며 안전지대로 왔더니 총 겨누고 수하질을 하겠다고?"

내 말을 들은 녀석들은 별 다른 대꾸를 하지 않는다. 눈빛에는 경계심이 한 가득이다.

"기다려라."

정상적인 상황에서의 군부대라면 당연히 민간인에게는 친절하게 존대를 쓰기 마련이지만, 현 상황에서 그렇게까지 해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녀석들의 눈에서 불안감이 느껴진다. 또 다른 생존자를 발견했다는 기쁨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잠시 뒤에, 저 멀리 보이는 언덕에서 누군가가 내려오는게 보였다. 앞에서 경계를 서던 녀석들과는 다르게 군복을 차려입고 있다. 쓰고 있는 베레모에 떡 하니 박혀있는 말똥 한 개.

"너희들 뭐야. 그 복장으로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내려온 소령이 우리를 경계하면서 질문을 던진다. 그 말에 우리는 우리의 복장을 살펴보고는 실소했다. 그래, 대놓고 경계 할 만 하네. 이 추위에 입고 있는 옷이 이렇게 가볍다니. 지나치게 이상하잖아. 서지현이 음, 하는 소리를 내고는 고민하다가 웃으며 대답했다.

"파주 밖에서 오는 길이에요."

"그 정도는 짐작 할 수 있다. 바깥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여기에 도착하지 않고 밖에서 버틸 수 있는 민간인들이 있을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우니."

그는 말을 마치고 나서 우리를 슥 훑어봤다.

"선택을 잘못했군. 다른 곳 다 버려두고 하필이면 파주로 오다니."

글쎄다. 물론 여기도 굉장히 빡센 상황이기는 하지만. 어디고 다 이 정도로 빡세기는 했었거든.

"소령 아저씨, 당신이 이 주둔지를 통제하고 있는 건가?"

내 말에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부대 안에 잔류 중인 간부와 기간병, 민간인은 내가 관리하고 있다."

바쁘겠네. 슬쩍 옆을 바라보니, 위병소 너머에 있는 호수 한 쪽에 도깨비 연대 본부, 라고 적혀 있는 돌덩이가 보인다. 연대 본부라면...

"연대장은 어디가고 당신이 관리하고 있는거야?"

내 말에 곧바로 소령이 대답을 돌려주었다.

"연대장님은 현 상황 발생 당시 업무 차 나가셨다가, 복귀하지 못하셨다."

저런, 그럼 죽었다고 봐야겠네. 슬픈 이야기다. 나는 잠깐 녀석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래서, 국방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하는 소령께서는 민간인을 이렇게 밖에 세워두고는 계속 추궁할 생각인지?"

내 말에 소령이 잠깐 우리를 바라보며 뭔가 생각하는 듯 하다가 경계를 서고 있던 남자를 보고 말했다.

"위병소 안에서 잠깐 쉬게 한 다음 본청으로 보내."

지시를 마친 소령은 그대로 다시 왔던 길을 되밟아 돌아갔다.

"안으로."

지시를 받은 녀석은 우리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다행이네, 서로 얼굴 붉히고 싸울 일이 없어서. 잠깐 위병소 안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으려니, 사람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따라와라."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녀석의 안내를 따라 이동했다. 건물 안은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 차라리 위병소 쪽의 온도가 더 따뜻했던 것 같다. 건물 안은 춥기 짝이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앉아있던 소령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작전과장 민혁이다. 앉도록."

녀석의 말에 자리에 앉은 나는 먼저 입을 열었다.

"건물 안이 싸늘하기 짝이 없네. 난로라도 좀 가져다 놓지 그랬어, 소령 아저씨."

"물자가 부족하니까. 꼭 필요한 곳 위주로 실시 중이다. 약 450명이 머무르고 있어. 꼭 필요한 곳에만 물자를 쓰지 않으면 버틸 수 없지."

"민간인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있을까."

내 말에 민혁이 곧바로 대답했다.

"약 200명 정도가 머무르는 중이다."

"꽤 많잖아. 굳이 받아주지 않아도 문제 없었을텐데."

내 말에 민혁이 잠깐 얼굴을 구겼다. 내 발언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랬다면 자네들 또한 이 안으로 발을 들일 수 없었겠지."

고지식하기는. 사람이 참 딱딱하군 그래. 녀석의 말을 듣고 있던 서지현이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곧바로 방 안의 온도가 올라간다.

"뭐, 대충 이해는 했어요. 하지만 추운 건 질색이라. 잠깐 이렇게 유지할게요."

민혁은 잠깐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다시 표정을 되돌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비슷한 절차가 오갔다. 우리는 여기에 온 목적을 밝혔다. 그리고, 이미 몇 번 랜드 클리어를 성공했다는 말도 전달했다.

"랜드 클리어라."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한숨을 쉬었다.

"안전지대에 머무르면서, 랜드 클리어에 대한 정보도 제법 확보했을 것 같은데."

내 말에 녀석이 고개를 저었다.

"상황 발생 후 우선 목표로 정한 것은 민간인의 구조 및 보호였다. 이후에는 필요한 물자의 확보에 주력했기 때문에, 자네들이 필요로 하는 정보는 따로 확보하지 않은 상황이지."

"민간인 구조 및 보호라. 당장 자기 먹고 살기도 힘든 빡센 상황에서 잘도 그런 생각을 다 했네."

심지어 도착한 사람들만 받아들인게 아니라 자기들이 나서서 주변을 돌아다니며 민간인을 찾아내 이리로 데려온 모양이네. 내 말에 민혁이 다소 굳은 어조로 대답했다.

"당면한 상황에서 군이 해야 하는 일을 한 거다."

감동적인 이야기네. 설마하니 정말로 파주에 머무르는 대한민국 육군이 이 상황에도 불구하고 국가와 국민에 충성을 다하는 강한친구 대한 육군으로 남아있었다니. 뭐, 그거야 이 친구가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겠지.

"주둔지에 온 목적은 이해했다. 랜드 클리어를 하는 과정에서 머무를 장소가 필요했던 거군. 제공해 줄 수 있다. 아니, 도리어 부탁하고 싶다. 현 상황을 유지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으니까. 우리 또한 현 상황을 타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고심 중이었다."

좋아, 협조는 약속받았다.

"다만, 현 상황의 극복을 위해 자네들에게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해도 특별히 보급되는 물품의 양을 늘려준다거나 할 수 없는 점은 양해했으면 좋겠다."

랜드 마크에 관련된 정보는 별로 얻을 수 없다는 점이 가슴 아프지만 일단 전초 기지를 마련했다는 것 만으로도 당장 만족 할 수 있다.

"물자는 따로 줄 필요없어. 챙겨온게 있으니까. 나눠 달라고 하지나 말라고, 소령 나으리."

"고맙군. 또한, 상황이 상황인지라 민간인에게 총을 겨눈 점 또한 사과하고 싶다. 이해해줬으면 한다."

서지현이 민혁의 말에 픽 웃었다.

"바로 방아쇠 당기지 않은게 어디에요. 물론 그랬으면 꼼짝없이 싸워야 했겠지만."

장담하는데, 피해는 이 군부대에 주둔 중이던 병력과 민간인들이 훨씬 더 많이 입게 되었을거다. 대화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보니, 여기 저기 만들어져 있는 드럼통 안에, 주변 건물들에서 뜯어내 온 것이 분명한 온갖 장작들이 타오르고 있다.

"온도가 올라가기는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늘하네요."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던 서지현이 중얼거린다.

"구체적인 수치는?"

내 말에 서지현이 대답했다.

"영하 8.32319도네요. 그 아래는 말하기 귀찮아서 반올림 했어요."

나도 모르게 서지현을 바라봤다. 서지현이 태연한 표정으로 한 마디 했다.

"뻥이에요. 그 정도로 정확하게는 몰라요. 영하 8.32도."

글쎄다, 그것도 굉장히 정확한 것 같은데. 온도계가 따로 필요 없을 정도잖아. 서지현이 그런 나를 보다가 묘한 웃음을 지었다.

"배란주기관찰법을 통한 피임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기초 체온 측정이 중요하거든요. 제가 온도계도 없이 어떻게 제 체온을 측정하고 있었을까요?"

이야, 그거 참 다양한 의미로 굉장히 쓸모있네. 그냥 걸어다니는 체온계가 아니었구나. 우리의 생활과 이렇게나 밀접하게 관련이 있었다니.

"그러고 보니. 우리가 함께 보낸게 한달 정도는 한참 전에 지났잖아."

갑자기 궁금증이 생기네. 그 뭐냐, 원래 일반적으로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컨디션이 급격하게 나빠지는 날이 있지 않나? 차마 내가 입으로 단어를 꺼내지는 않았지만, 서지현이 대충 알아들은 모양이다.

"아, 저 그날 아프거나 하지는 않아요. 원래 영양 실조 걸리면 더 심해지는 걸로 알고 있는데, 한창 배 곯아서 죽을 것 같을 때도 괜찮았거든요. 체질이 그런 걸 걸요."

굉장히 건강하구나.

"과연 서큐버스 여왕이 탐낼 만한 몸."

어쩐지 함께 잠자리를 할 때마다 범상치 않다고 생각했지. 내 말에 서지현이 내 정강이를 향해 힘껏 발길질을 했다. 그래, 맞을 만한 소리를 했으니 맞아야지.

하지만 정작 그 엄청났던 기세에 비해 정강이에 닿은 신발코는 별로 아프지 않았다. 사실, 아프고 뭐고를 떠나서 그냥 톡 하고 건드리는 정도였다. 조인트 까다가 힘을 뺀 모양이다.

"다음에 또 그런 소리 하면 진짜 아프게 찰 거에요."

물론 머무를 장소는 제공해주겠다고 민혁이 약속했지만, 기본적으로 군대의 생활관이라는게 단체 생활을 위해서 마련된 곳이라 잠자리에 사생활이 없다. 때문에 우리는 그냥 생활관 건물 근처의 공터에 텐트를 하나 치고, 거기에 머무르기로 했다.

물론 사람이 딱딱한 천장이 있는 곳에서 자야 한다고는 하지만 고작 천장 때문에 포기하기에는 함께 있을 시간이 너무 아깝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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