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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탈옥했다-181화 (181/237)

# 181

혹한기

다음날 아침 일찍, 인천을 벗어나 서지현을 안아올린 나는 곧바로 도로 위를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확실히, 체력을 아끼며 이동하는 데에는 이게 최고라니까. 파주로 향하는 길은 다양한 경로가 있지만, 우리는 고양시를 거쳐서 파주에 도착했다.

"아, 보기만 해도 춥다."

내 말에 서지현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시릴 지경이네요."

특정 지역을 경계로 하늘 높이 쌓아올려진 얼음벽, 그리고 그 위에 쌓여있는 하얀 눈. 서지현의 말대로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눈이 시릴 지경으로 추운 풍경이었다. 저 벽을 보고 있으면, 대충 파주가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는 알 수 있다.

더럽게 춥겠지. 뭔데 도대체, 파주의 랜드 마크는 코카 콜라를 퍼먹는 북극곰 같은 거라도 되는 거냐. 저 안에서 추운 날씨에 고통받고 있을 국군 장병들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눈물이 앞을 가린다. 약간 더 앞으로 나아가지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를 반겨주는 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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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 : 랜드 클리어 - 파주

목표 : 안전지대로 설정된 금촌 3789 부대를 제외한 파주의 나머지 지역은 '영구동토'라는 현상에 시달리고 있다. 이 현상을 끝내기 위해서는, 파주 시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는 '랜드 마크'를 제거해야 한다.

※ 미션을 수락하지 않으면 파주로 진입 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 해당 미션을 클리어 하기 전까지는 파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미션은 일회성입니다.

보상 : 4800pt, 장비(랜드마크 제거 참가자 한정), 완전 종료. 설정된 구역 밖으로의 이동 제한 해제(구역 내부의 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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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간단하게 말하자면 엄청나게 춥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그냥 추위 때문에 아직까지도 랜드 클리어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건 이상한데."

내 말에 서지현이 어깨를 으쓱하고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얼음벽과 이어져 있는 꽤 커다란 이글루가 하나 자리잡고 있었다.

"들어가보면 알게 되지 않을까요?"

그래, 들어가보면 알겠지. 여기에서 고민하고 있어봤자 알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우리는 벽과 이어져 있는 이글루 쪽으로 접근했다. 통과하기 위한 미션이 떠오른다. 통과시 주는 포인트는 1200pt. 많다고 생각하면 많고, 적다고 생각하면 적은 애매한 양이다.

기어들어간 이글루 안은 어두웠다. 나는 손전등을 꺼내들어 불을 켰다.

"통로라."

얼음으로 된 계단이 이글루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꽤 미끄러워 보이네요."

상관없다. 어차피 프릭션 컨트롤을 사용하면 평지를 걷는 것과 그렇게 다르지 않을거다. 나는 서지현의 손을 잡은 채 계단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계단을 다 내려가자 보이는 건 눈이 쌓여있는 거대한 공동이었다.

"눈사람이라."

전형적이군. 털모자를 쓰고 있는 눈사람들이 눈이 한 가득 쌓인 설원 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발을 앞으로 내딛자, 푹 하고 발이 눈 아래로 파묻힌다. 하지만, 춥지는 않다. 서지현이 알아서 온도를 조정하고 있는 중인 모양이니까.

서 있던 눈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우리 쪽으로 향한다.

"안녕. 니들 상성이 별로 좋지는 않아 보이는데. 내 옆에 있는 아가씨가 굉장히 뜨거운 여자거든."

내 말에 서지현이 옆구리를 쿡 하고 찌르며 대답했다.

"어머, 사람들 오해하게.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에요."

서지현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눈사람들을 보며 웃었다.

"춥지 않니 올라프 친구들? 누나가 따뜻하게 해줄까?"

그리고, 갑자기 공동이 통째로 후끈하게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물론, 내가 그 열기를 느끼는 건 아니고. 그냥 눈으로 보고 있을 뿐이었다. 바닥에 쌓여있던 눈과, 우리를 응시하는 눈사람들이 스물스물 녹아내리는 모습을. 마치 이 거대한 공동 안이 통째로 오븐으로 변한 것 같은 현상.

절절 끓어오르는 열기 속에서 녹아내리던 눈사람들이 서지현을 노리고 입에서 뭔가를 토해내기 시작한다. 한 눈에 봐도 날카롭게 깍여진 얼음창이다. 하지만 서지현은 그걸 보고 있다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날아오던 얼음창이 그대로 녹아내려 물로 변하고, 순식간에 증발해 형체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나는, 그저 구경만 하고 있으면 충분했다. 내가 나설 필요도 없이, 공동 안의 눈사람들은 서지현 선에서 정리되었다. 마지막에는 녀석들이 나름대로 발악을 해보겠다고 서로 뭉쳐서 거대해지기는 했는데,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이 정도면, 혼자 와도 괜찮았겠는데."

"운이 좋았을 뿐이죠. 이걸로 끝."

철벅거리는 물웅덩이가 가득한 공동이, 서지현의 말과 함께 다시 순식간에 얼어붙기 시작한다. 바닥에 고여있던 물이 순식간에 꽝꽝 얼어붙는다. 그 장면을 바라보던 서지현이 몸을 약간 굳힌다.

"이럴수가."

우리는 당황한 표정으로 멍하니 주변을 살펴봤다.

"열이, 그냥 없어져버렸어요. 마력 공급을 끊자마자."

서지현의 말에 나는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열이 없어진다니. 너 처럼 열을 어디론가 빼돌린다는 거야?"

내 말에 서지현이 이마를 쓸어올렸다.

"그게 아니에요. 제가 마력을 통해 발생시켰던 열이 마력 공급이 멈추자마자 그대로 싹 사라졌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서지현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잠깐 뭔가 고민하는 듯 하다가 주머니에서 일회용 라이터를 꺼내들었다.

"봐요."

서지현이 그렇게 말하고 라이터의 부싯돌을 돌렸다. 차륵, 하는 소리와 함께 부싯돌이 돌아가지만, 불꽃이 피어오르지는 않는다. 가스가 다 된건가 싶어서 살펴봤지만, 새것처럼 빵빵하다.

"불이 안 붙어요. 0.1의 오차도 없이, 이 세상은 영하 35도로 고정되어있어요. 마력을 제외한다면 어떤 수단을 동원해도 그 이상으로 온도를 올릴 수가 없어. 생물의 체온은 법칙에서 예외인 모양이지만."

서지현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를 바라봤다.

"온도 통제를 그만둝테니 손을 한 번 비벼보세요."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기 속에서 양 손을 마주 잡고 마구 비볐다.

"어때요?"

아무리 양 손을 비벼도 손이 전혀 따뜻해지지 않는다.

몸을 한 번 크게 부르르 떨자 서지현이 곧바로 다시 마력을 이용해 온기를 뿜어내고, 유지하기 시작한다.

"이러니 군부대가 안전지대라고 해도 의미가 없지."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적인 수단으로는 한 톨의 열도 발생하지 않는다니. 답답하네요."

그 말은, 방아쇠를 당겨도 총알이 발사되지 않는다는 소리다. 공이치기로 총알의 똥구멍을 퍽 하고 쑤시면 그 충격에 놀란 발사장약이 급격한 연소를 시작하고, 거기에서 발생하는 가스의 추진력으로 날아가는게 총알이다. 하지만, 공이치기로 총알의 똥구멍을 쑤셔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게 지금의 파주다. 발사장약이 연소하지 않는다.

총알만 그런 건 아니겠지. 결국 모든 종류의 화기는 이 거대한 영하 15도로 고정된 냉동고 안에서는 의미가 없다.

"놀리는 것도 아니고."

그럴 거면 뭐하러 군부대를 안전지대로 설정해 준 거야. 군부대가 가지고 있는 장점이 싹 사라졌는데. 총을 쏘지 못하는 현대 군인이 괴물들과 싸운다니. 궁녀 임신시키겠다고 달려드는 내시와 다를게 없다.

"안전지대 밖으로 나가게 되면 네 도움이 필요하겠네."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또는, 영하 35도에 방치되도 오래 견딜 수 있는 튼튼한 육체가 있으면 되겠죠."

그래, 나는 어느정도 버틸 수 있을거다. 서지현이 손 위에 불꽃 하나를 만들어 보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영하 35도 이하로 떨어뜨리는 건 가능한 모양이네요. 그리고, 영하 35도까지는 주변 온도도 자연스럽게 올라가요."

이야, 영하 35도까지는 온도가 올라간다는게 유의미한 차이를 만들 수 있기는 한 걸까. 얼어 뒤지기 딱 좋은 온도라는 건 똑같은데. 어쨌든, 파주를 지배하고 있는 법칙은 이해했다. 무조건 온도는 영하 35도 이하로 유지된다. 다만, 생물이 만들어내는 체온까지 강제로 떨어뜨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영하 35도에 방치된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죽음은 막을 수 없다. 옷을 두껍게 입는다면 어떻게든 체온의 상실을 줄일 수 있겠지만... 영하 35도라니. 그거 한국에서 볼 수 있는 기온이 아니잖아.

"일단, 서두르죠."

안전지대로 들어가야 한다.

"얼마나 유지 할 수 있겠어?"

내 말에 서지현이 대답했다.

"금촌이라. 영상 10도 정도로 유지한다면 거기까지 도착하는 건 충분히 가능해요. 하지만, 랜드 마크를 찾는 과정이 조금 걱정되네요."

그러게 말이다. 영구동토라고 하는 현상이 그냥 파주시를 엄청 춥게 만드는 정도로 끝인 줄 알았는데. 이 현상의 끔찍한 정체를 알게 된 이상에는 조금 걱정이 된다. 얼음벽을 넘은 우리는 운정역을 지나 금촌 쪽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날씨가 이렇게 추운데, 고드름 하나 달려있지 않다. 그럴 수 밖에 없지. 얼음이 녹아내릴 일이 없는데 고드름이 생길리가 없으니까. 얼어붙은 파주는 크게 두 가지 색깔로 구분 할 수 있었다.

새파란 하늘과, 쏟아진 눈으로 뒤덮힌 채 하얗게 질린 대지. 눈이 녹을 일이 없으니, 도대체 언제 내렸던 눈인지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

"바람까지 불어..."

서지현은 얼굴을 구긴 채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바람이 불어닥치면 서지현이 온도를 유지하는게 힘들어 질 수 밖에 없으니까. 우리는 서들러서 금촌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젠장, 도대체 사람이 어떻게 살아서 금촌까지 도착하라고 이런 미친 짓을 저지른 거야."

영하 35도에 방치된 사람들이 어떻게든 금촌까지 도착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뭐, 오랜 꿈이 남극 여행이라서 따로 방한복 같은 걸 집에 잘 차려두고 있다면야 또 모르겠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입는 겨울옷이라고 해봐야 오리털 파카 따위가 고작이잖아. 영하 35도의 추위를 이겨낼 정도의 복장이 한국에 필요할 이유는 전혀 없다.

내가 봤을때는 그냥 다 뒤지라고 하는 것 같은데. 너무 당연하겠지만, 파주에서는 자동차도 달릴 수 없다. 자동차를 굴리는 힘은 엔진의 피스톤 운동인데. 점화 플러그가 아무리 지랄발광을 해도 피스톤 안으로 들어간 혼합 가스에 불이 붙지 않으니까.

"이건 금촌까지 가다가 얼어죽은 녀석들이 제법 있겠는데."

실제로, 걸어가다보니 몇몇 사람들이 썩지도 않은 채 온 몸이 그대로 유지된 시체 무더기가 눈에 들어온다. 하나같이, 시체가 썩지도 않은채 깔끔하게 보존되고 있는 중이다. 이상한 점은, 하나같이 옷을 벗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얼어 죽기 직전인 상황이라면 살아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끌어안고 체온이라도 나눠 볼 만 한데. 하나같이 알몸에, 주변에 아무도 없이 대자로 뻗어서 쓰러져 있었다.

마치, 얼어죽게 해달라고 사정하는 것처럼.

"아."

보존 중인게 아니었구나. 시체들의 몸에서 으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녀석들이 고개를 들자, 시퍼런 안광이 일렁거리는게 눈에 들어온다.

- 더워...

"지랄한다."

시체가 내뱉은 한 마디를 듣고 곧바로 튀어나온 말은 저거였다. 지랄하고 있네. 덥다고? 죽고 나더니 마침내 맛이 간 건가. 바닥에 누워있던 시체들이 남녀를 가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를 바라본다.

- 아, 아아아! 더워, 벗어!

벗긴 뭘 벗어. 홀랑 벗은 나체의 여자가 나에게 달려들자, 서지현이 에노테르를 휘둘러 녀석의 목을 깔끔하게 날려버렸다. 이미 죽은 사람에게 이런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달려들던 여자 시체는 그대로 목이 날아가 바닥으로 풀썩 쓰러졌다.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다. 아마, 죽은 채로 방치되면서 피까지 얼어붙었기 때문 아닐까.

시체를 바라보던 서지현이 냉랭한 목소리로 한 마디 했다.

"시체라고 해도 감히 알몸으로 달려들어서 옷을 벗기려고 들다니."

서지현의 말에 나는 허어, 하는 소리를 내고 중얼거렸다.

"과연, 내 주변으로는 암컷이라면 벼룩 한 마리도 접근시키지 않을 기세구나."

좋아해야 하나 슬퍼해야 하나.

어쨌든, 관절까지 얼어붙었을게 분명한 시체들은 답지 않은 민첩한 움직임으로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검을 휘두르자, 사람 살을 베는 느낌이 아니라 무슨 얼음을 자르고 들어가는 것 같은 감촉이 느껴진다.

우리는, 우리에게 달려드는 얼어붙은 시체들을 하나하나 다시 시체로 되돌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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