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
Time Limit
당당하게 우리에게 덤벼들었던 염소는 흠씬 쥐어 터졌다. 온 몸에 상처를 입은 녀석이 나와 서지현을 바라보며 숨을 몰아쉬고 잇다.
- 이건... 이럴 리가!
녀석은 그렇게 외치며 억지로 몸을 일으킨다. 아무래도, 이게 전부였던 모양이다. 다소 실망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녀석 다섯 마리를 끌고 와도 카피라가 직접 강화시켰던 랜드마크 한 마리도 못 잡을 것 같은데. 아니, 그걸 넘어서 이 정도 실력이라면 평범한 랜드 마크 이하잖아.
"더 보여줄거 없으면 죽어."
이 정도까지 구석탱이에 몰렸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변화가 없다는 건, 이게 이 녀석이 사용 할 수 있는 수단의 전부라는 뜻이다. 일어나 미늘창을 꼬나잡고 노려보는 녀석의 미간에 수확자가 박혀들어간다.
"아.. 어윽..."
구슬픈 소리와 함께 녀석의 눈이 헤까닥 돌아가버린다. 게거품을 물고 몸을 부르르 떠는 녀석을 보고 있으니 한편으로는 안쓰럽다. 녀석을 죽이고 나서 한 동안 그 시체를 주시하며 뭔가 이상한 일이 생기지는 않나 살펴봤는데, 그렇지는 않다.
"버리는 카드였던 모양이네."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런 일을 저지른 거지. 덕분에 경험치를 받게 된 건 좋지만.
갑자기, 죽은 녀석의 몸에서 줄줄 흘러내리던 피가 그대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역시 그럴 것 같았지. 이대로 끝나는 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 안녕?
카피라. 바닥에 쏟아진채 부글거리던 핏물이 서서히 형체를 갖추기 시작한다. 그 모습은, 이전에 봤었던 카피라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 이 말을 듣고 있다면, 내가 보낸 녀석은 죽은 거겠지. 그렇게 되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어. 너희들에게 사소하게나마 감사의 인사를 할게.
우리를 보고 하는 말이 아니다. 저 핏물로 빚어진 형체는 양방향 통신을 하고 있는게 아니다. 그냥,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중이다. 녹음기를 틀어놓은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지. 시뻘건 카피라의 형상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를 한 다음 웃음을 흘렸다.
- 아, 저기 내가 머무르고 있는 곳 본 적 있어? 꽤 근사해. 준비도 많이 하고 있으니까. 와서 심심할 일은 없을거야.
아니, 가능하면 심심했으면 좋겠는데. 그냥 안이 들어갔더니 네가 코 골면서 자고 있고, 살금살금 다가가서 마빡에 칼 꽂으면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사라져버렸으면 좋겠어. 하지만 이 형상이 말하는 꼴을 보아하니 그러기는 글러먹은 모양이다.
그 이외에도 녀석은 우리에게 이런 저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했다. 뭐야 이거 도대체 친구 없는 찐따 깥은 건가.
- 그럼, 나중에 또 기회가 되면 이야기 나누자.
그 말을 끝으로 핏빛의 형상이 우르르 무너져 내려 다시금 피웅덩이로 돌아간다.
"도대체 뭐 하자는 걸까요. 이게 놀이로 보이나."
서지현은 다소 불쾌한 표정으로 그 피웅덩이를 바라봤다.
"그 녀석 입장에서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
내 말에 서지현이 끄응, 하는 소리를 냈다.
"확실한 건, 카피라의 저주에 대항할 만한 수단을 확보하는 거에요. 이대로는 절대 못 들어가."
내가 싸우면서 했던 생각은, 서지현도 똑같이 한 모양이다. 지금 보내진 이 염소는 사실 상 장난이라도 칠 생각으로 보낸 너절이다. 하지만 우리가 다시금 배를 타고 카피라가 머무르는 바다 한 복판으로 접근해, 그 검은 아가리 속으로 들어간다면 방금 전과는 다르겠지.
"상점에서 장비나 스킬을 구매해야 할 필요가 있어."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포인트를 벌어야 한다. 서지현이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강현에게 상담해보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녀석은 이전까지 최현우에게 붙어 먹고 있었던 녀석이다. 서울 인근에 최현우가 점령하지 않은 장소가 있다면, 그 장소는 아직 랜드 클리어가 끝나지 않은 상태라는 뜻이다. 그럼 우리가 그 안에 들어가서 랜드 마크를 두들겨 패고, 포인트를 끌어모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카피라가 랜드 마크를 강화한다면 랜드 마크를 제거하면서 얻게 되는 장비의 질도 높아지겠지.
재수가 좋아서 저주 관련된 아이템을 떨어뜨린다면 잭팟이 터지는 거다. 의견을 대충 정리한 우리는 이강현에게로 돌아갔다.
"저주 말씀이십니까."
우리의 이야기를 들은 이강현이 눈썹을 살짝 찌푸리고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랜드 클리어가 되지 않은 장소라면 알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파주가 있겠네요."
파주라.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거리가 꽤 되기는 하지만, 오가지 못할 정도로 먼 거리는 아니다.
"그리고, 최현우가 서울에 긁어모아놓은 장비가 꽤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살펴보면 저주를 막는 데 쓸 수 있는 장비들도 있지 않을까요?"
저 말도 일리가 있네. 그 녀석이 끌어모아놓은 장비는 우리도 직접 육안으로 봤었으니까.
"김용천에게 신세를 한 번 져야 할 것 같은데."
"거절하지는 않을 거에요. 거절한다면 빼앗으면 될 일이고."
그건 그렇지. 양심이 있으면 거절하지는 않을테고, 거절한다고 해도 못 빼앗는 건 아니다.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강현이 웃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서울을 새로 점령한 생존자들 쪽으로 사절을 보낼 생각이었는데. 그 사절들을 통해서 이야기를 전해드릴까요?"
나는 그 말에 이강현을 위아래로 슥 훑어봤다.
"그래, 괜히 그런 제안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
공짜로 해주는 건 아니다. 인천에서 보낸 사람들이 우리 요청을 전달해준다는 것 만으로도 이강현에게 떨어지는 콩고물은 충분하다. 최현우에게 붙어먹던 녀석이 대뜸 서울에 사람들을 보낸다면 당연히 그 대접이 차가울 수 밖에 없겠지만, 우리의 요청을 함께 전해준다면 그렇지는 않을테니까.
간단하게 말해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장비를 물어다 줄테니, 인천에서 서울로 보내는 사절에다가 당당하고 확실하게 우리 이름을 팔아먹고 싶다는 뜻이다.
"상황을 바꿀 수 없다면, 처한 상황에서 최대한 이득을 보려고 노력은 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말은 참 잘 한다.
"어떻게 생각해?"
의견을 물어보자, 서지현이 대답을 돌려주었다.
"우리가 손해 볼 만한 제안은 아닌 것 같아요. 시간을 조금이라도 아낄 수 있다면 나쁠 거 없죠."
원래대로라고 한다면 우리가 서울에 가서 장비들을 하나하나 점검한 다음에 쓸 만한 것들을 추려내야겠지만, 이 녀석들이 그걸 대신해준다면 우리는 바로 포인트 벌이에 집중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그렇게 알고 있어도 괜찮을까요."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개수작 부릴 생각은 하지 마. 이름을 팔아먹는 데에도 한계가 있는거야."
"알고 있습니다. 인천에서 보낸 사절은 두 분의 요청과는 엄연히 별개입니다. 그저, 사절이 향한다는 말을 듣고 두 분이 겸사겸사 부탁을 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할 겁니다. 나중에 확인해보셔도 괜찮습니다. 제가 명줄이 걸린 일은 깔끔하게 해결하는 편이니까요. 제 목표는 언제나 무병장수입니다."
"그 정도라면 팔아도 괜찮아."
그럼, 최현우가 뒤지면서 남겨놓은 장비에서 쓸만한 것들을 추려내는 건 이강현이 보낸 사절에 맡겨두고, 우리는 바로 파주로 출발할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필요한 것들이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상황이 되는 한 최대한 협조를 하겠습니다."
이 이상 뭔가를 요구 할 필요는 없다. 이 녀석이 나름대로 든든하던 빽을 잃어버리고 나서 여전히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사적이라는 건 잘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필요 이상으로 뜯어낼 생각은 없다.
"아, 그리고 하나 더."
이강현이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우리를 바라봤다.
"파주에 설정된 안전지대는 금촌에 위치한 군부대입니다."
랜드 클리어가 끝나지 않았다고 해도 안전지대에 대한 정보는 충분히 알 수 있다. 파주로 진입하려고 하면 떠오르는 문자에는 반드시 안전지대가 어디에 있는지 표시해주니까. 확인한 다음 진입을 거절하면 된다.
군부대라. 솔직히, 그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잘 모르겠는데. 물론 여태동안 돌아다니면서 지나왔던 지역들도 당연히 군부대는 있었겠지.
하지만, 안전지대가 군부대였던 적은 한 번도 없다. 그 말인 즉슨, 해당 지역은 갑작스럽게 확 하고 튀어나온 괴물들에게 습격당해 급하게 도망치거나 막대한 피해를 입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당연히, 장비와 물자도 손상이 없겠지.
대부분의 군부대는 제대로 준비를 갖추는데 성공하기도 전에 쥐어 터졌겠지만. 파주에는 괴물의 손을 전혀 타지 않은채 남아있는 군부대가 있다. 습격한 시간을 생각해보면 주둔지 밖으로 나간 병력들도 제법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군인들이 그 안에 머무르고 있었을테고.
그 점이 신경쓰인다.
"군 주둔지가 안전지대로 설정되었는데 랜드 클리어가 아직까지도 성공하지 못했다니."
경험 상, 랜드 마크가 총질 한다고 죽는 괴물은 확실히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굉장한 장점을 가지고 있는거다. 최소한 총이 있으면 이런 저런 너절한 괴물들에게 당할 가능성은 확 떨어지니까. 심지어, 대항 할 수 있는 화기가 있다면 괴물을 죽여 경험치를 획득하는 것도 훨씬 수월하잖아.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랜드 클리어를 성공사키지 못했다니. 이유는 크게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랜드 마크가 불러일으키는 사태가 안동과 비슷한 수준으로 답도 없을 정도거나.
아니면 서울처럼 해당 안전지대의 지도자급이던 녀석이 배신을 때렸거나.
"총이라."
서지현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뺨을 긁었다.
"총 자체에는, 지금은 별로 메리트가 없네요."
서지현의 말에 나는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지현은 그냥 자기 몸에 보호막을 둘러버리면 된다. 장담하는데, 서지현이 만들어낸 보호막이라면 전차포를 때려박아도 괜찮지 않을까. 나는 아마 보고 피할 수 있을테고. 설사 보고 못 피한다고 해도 순식간에 손동작으로 만들어내는 보호막 정도라면 넉넉하게 방어하고도 남는다.
"파주라."
인천에서 출발해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하면 아마 1-2시간 이내에는 도착 할 수 있는 거리다. 물론 안에 들어가면 바로 나올 수야 없겠지만, 최대한 서두른다면 일주일 안에는 정리를 끝낼 수 있겠지.
"생존자들이 호의적이었으면 좋겠는데."
내 말에 서지현이 픽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런 기대 안해요. 이런 상황에 총을 든 무력집단이 있다면 그 이후에 일어날 일은 너무 뻔해서 말하기도 입 아프잖아요?"
그래, 쓸데없는 희망이기는 하다. 애초부터 안전지대로 설정된 부대 안에 주둔중이던 군인들이, 국가와 국민에 충성을 다하는 대한민국 육군으로 남아있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하염없이 낮을 것 같은데. 차라리 단체로 산적집단 비슷하게 변했다고 생각하는편이 더 설득력이 높다.
"머리로 생각하는게 무슨 소용이야."
"맞아요, 밥 먹고 푹 잔 다음에 내일 출발할 생각이나 하죠."
어차피 거기에 주둔해 있는 녀석들이 우리와 싸울 생각이라면 싸워야 하고, 그럴 생각이 없어보인다면 함께 어깨동무 하고 랜드 클리어를 진행하면 될 일이다.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배낭을 뒤적거리다 뭔가를 꺼내 흔들었다. 보아하니 봉지에 들어있는 가루다.
"곰탕?"
오늘 메뉴도 정해졌다. 우리는 곧바로 곰탕을 끓여서 밥과 함께 먹기 시작했다. 사실, 말이 곰탕이지 그냥 물에다가 허연 가루 풀어서 끓인 것 뿐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