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
Time Limit
상황은 분명히 변했다. 느긋하게 해도 괜찮을 줄 알았던 일이, 느긋하게 하다가는 심각한 상황을 초래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다음 나와 서지현의 움직임은 굉장히 부지런했다.
"일단, 지금 당장 구할 수 있는 건 이 정도가 한계입니다."
이강현은 나름대로 노력을 했다. 그 점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말로만 협조적으로 나온다고 큰소리를 친게 아니었다. 레스큐 보트, 사람들이 흔히 군인들이 타고 다니는 고무보트, 라고 하면 떠올릴 수 있는 외양을 하고 있는 보트가 준비되어 있었다.
"물론, 이것만 가지고 이동하는 건 무리가 있다고 판단해서, 이 보트를 실은 채 목적지 인근까지 이동할 어선도 한 척 확보해두었습니다."
기타 등등 어선에 올리는 장비를 빼서 공간을 넓게 확보하면 충분히 보트 하나 정도는 올릴 수 있는 공간이 나오는 모양이다. 거기에 더해서, 배를 조종 할 줄 안다고 하는 사람도 한 명 우리 앞에 서 있었다.
"배가 그렇게 크지는 않을 것 같은데. 이걸로 도착 할 수 있을까?"
내 질문에, 앞에 서 있던 친구가 선선히 대답을 돌려주었다.
"충분히 가능 합니다. 보트 같은 경우에는, 조종이 크게 어렵지는 않으니.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한 4시간 정도 배우고 나면 충분히 조종하실 수 있을 겁니다."
물론, 그래봤자 이제 막 운전면허증 딴 사람의 운전 실력 정도겠지만. 운전실력이 부족했을 때 문제가 되는 건 주변에 다른 차들이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지금 세상은 대충 한 번 망한 상황이고, 이 상황에 배를 타고 밖으로 나가 낚시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주변에 다른 배가 없다면야 보트를 움직여 원하는 곳으로 향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정 못하겠다 싶으면 그때는 서지현의 도움을 빌려야지. 인천에서 검은 염소가 머무르는 곳까지 바다를 전부 얼리는 건 말도 안되는 소리지만, 배를 타고 근처에 도착한 다음, 남아있는 짧은 거리를 얼리는 거라면 서지현이 지나치게 무리를 해야 할 필요는 없을테니까.
"일단, 목적지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 오고 싶은데."
겸사 겸사, 이 녀석 진짜로 배를 몰 줄 아는 게 맞는지 아닌지 확인도 해봐야 하니까. 내 말에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작은 통통배를 타고 바다로 향했다.
"바다는 여전하네요."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배의 난간에 팔을 올리고 주변 풍경을 감상하던 서지현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게, 땅 위는 아주 개작살이 났는데 바다는 자기랑 관련 없다는 것처럼 고요하기 그지 없다. 사실, 괴물 같은 게 튀어나오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의외로 바다에서는 별 다른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는 그렇게 고요하게 목적지로 향하기 시작했다.
다만, 우리의 예상과는 많이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월드 앵커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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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 : 앵커 브레이크 - 한국
목표 : 황해에 자리잡고 있는 정체 불명의 장벽. 그 너머에서 형언할 수 없는 공포와도 같은 무언가가 넘실거리는 것을 느낀다. 그 벽 너머에서 끓어오르는 질투와 시기, 보복의 회오리를 느끼자 당신의 등에 소름이 타고 올라온다. 이전까지 경험해봤던 그 어떤 것도 이와 같지는 않으리.
보상 : ???
진행도 : 0%
※ 능력이 되지 않는다면 돌아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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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는 멈췄다. 우리가 멈추라고 한 건 아니고 배를 몰던 녀석이 알아서 멈춘거다. 그리고, 우리도 녀석이 배를 멈춘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이건 멈춰야 하는 상황이다. 서지현은 별 다른 말을 하지 않고 배낭에서 지도를 꺼내 살펴봤다.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어야 하는데요."
그러니까 말이다. 원래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어야 하는데 뭐냐 저건.
거대한 섬이 하나 보인다. 아니, 섬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벽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100m는 될 것 같은 거대한 녹색의 벽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쳐, 그 벽 너머의 풍경을 감추고 있었다. 그 성벽 위에는 온갖 형태의 수많은 조각상들이 각자의 모습을 자랑하며, 성벽 꼭대기에 서서 바다를 굽어보고 있다.
배를 멈춘 상태에서, 나는 목걸이의 감각을 모두 접어서 눈에 보이는 바다의 벽 너머에 뭐가 있는지 살펴봤다.
"어때요. 그냥 섬인가요?'
서지현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벽 너머에는, 시커먼 구멍이 하나 있어."
아무리 적게 잡아도 여의도 만한 크기는 될 법한 구멍이다. 끝은 모른다. 거기까지 감각이 닿지를 않으니까. 서지현이 내 대답을 듣고는 입을 쩍 벌리고 있다 시선을 다시 벽으로 향한 채 말했다.
"저거, 문도 있네요."
그래. 도대체 바다 한 가운데에 떠 있는 주제에 뭘 기대하고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꼴에 성벽이랍시고 문도 달려 있었다.
"바로 들어가기 정말 주저되는 자태네."
"그러니까 말이에요."
바다는 고요하다. 아무것도 없고, 이전과 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여기만 빼고. 그리고, 그 점에서 비롯된 질문들이 어쩐지 모르게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저 안에는 뭐가 기다리고 있을까. 저 안에 들어간다고 해서 바로 검은 염소를 마주 할 수 있는 걸까. 그렇지 않다면 그 녀석을 만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저 안에서 버텨야 하는 걸까.
"하루 안에 끝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네요."
"그렇겠지. 진행도라고 하는 게 그냥 뜬 건 아닐테니까."
이전까지는 미션에 따로 친절하게 진행도를 표시해 주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미션에서는 친절하게 몇 %나 미션을 진행했는지 알려준다. 거기에 더불어서 들어가서 견딜 수 있는 깜냥이 없으면 포기하라는 친절한 경고까지. 이전의 미션들과는 다르다.
우리는 다시 배를 돌렸다. 오늘 바로 저기에 들어가기 위해서 여기로 온 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성벽 위를 장식하고 있는 수많은 동상들도 마음에 걸린다. 저 녀석들, 겉보기와는 다르게 그냥 조각상이 아니다.
"목걸이를 통해서 확인했을 때는 결코 그냥 석상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말이지."
저 석상들, 살아있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근처로 접근하게 된다면 저 성벽을 장식하고 있는 동상들이 움직이기 시작할 거다. 일단, 그걸 뚫어내는 것부터 사실 상 싸움이 시작된다고 생각해야겠지.
"보트가 멀쩡할 수 있을까요."
그러게 말이다. 저 벽에 도착하는 것 까지는 문제가 없다고 해도, 그 이후에 저 석상들과 싸우고, 성벽을 넘어 구멍 아래로 내려가 보내는 시간 동안에도 보트가 안전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상황이 안 좋으면, 헤엄이라도 쳐서 돌아가야겠지."
내 말에 서지현이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만해도 끔찍하네요."
능력치는 된다. 애초에 나랑 서지현은 인간 이상의 육체를 가지게 되었으니 헤엄쳐서 여기에서 인천까지 간다는 말이 꼭 불가능한 개소리는 아니다. 물론, 끝나고 나면 아무것도 하기 싫을 정도로 지쳐 있을테지만 성공할 자신은 있다. 아마, 밥도 헤엄치면서 먹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배는 선수를 돌려 인천에 도착했다. 다시 육지로 올라온 나와 서지현은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짐부터 정리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릴지 모르고, 며칠이나 필요할지도 모르고."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들락날락 할 수 있는 구조처럼 보이지도 않았죠."
그래, 어차피 저쪽에서도 우리가 도착했다는 걸 확인한 이상 곱게 보내주지도 않을테고, 설사 빠져나가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그 이후에 다시 진입했을 때 어떻게 변해있을지도 알 도리가 없다. 들어가게 되면, 두 번 시도하는 일을 만들지 않고 한 합에 끝내야 한다.
"할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숙소를 보니 처음 보는 작은 상자 하나가 놓여있었다. 이건 뭐지. 이런 걸 가지고 다닌 기억은 없는데. 옆에는 작은 쪽지 하나가 놓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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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을 두고 간다는 걸 깜박했군.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 초콜릿 잘 먹겠네.
- JR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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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깜짝이야. 난 또 무슨 경고장인줄 알았네. JRM이 누군지는 굳이 궁금해하지 않아도 괜찮아. 제르멩이겠지 뭐. 그리고 그 망할 놈의 자식이 결국 우리는 한 조각 밖에 못 먹은 초콜릿을 아주 상자째 들고 가 버린 모양이다.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네. 이강현에게 한 박스 더 달라고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상자를 살펴봤다.
[통제된 혼돈. 지구 서력 20xx. 10.11. 도움이 되길 바라네.]
작품명 같은 건가. 게다가 연도명을 보니 지구의 달력을 쓰는 데다가, 만든 날짜도 최근이다. 따로 우리를 위해서 준비한 물건인 모양이다. 조금 감동적인데. 초콜릿 한 상자 더 훔쳐가도 눈감아줘야겠어.
"... 보석?"
안에 들어있는 건 의외로 별개 없었다. 그저, 꽤 고급스러워 보이는 쿠션 위에 올려져 있는 작은 보석이었다. 다만, 보석을 꺼내기 위해서 손을 가져가자 순간적으로 따끔, 하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서지현이 그 보석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꺼내서 사용하는게 아닌 것 같아요. 못 꺼내게 되어있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보석을 꺼내는 걸 포기한 나는 상자 옆에는 작은 손잡이 두 개가 설치되어 있었다. 상자를 살펴보던 서지현이 작게 감탄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굉장히 복잡하네요. 무슨 기능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어요. 한 두 가지가 아니야."
하나의 옆에는 시간이라는 단어가, 다른 하나의 옆에는 위력이라는 단어와 함께 강중약이라는 글씨가 써져 있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약한 걸로 해볼까."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손잡이를 돌리자 딸각, 하는 소리와 함께 손잡이가 약, 이라는 단어에 맞물렸다. 그리고 다른 손잡이를 돌려 시간을 맞춘 나는 상자를 연 채로 가만히 그걸 바라봤다.
보석이 검게 물들기 시작한다. 상자에서 음산한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하고, 서서히 등골에 소름이 돋아오른다. 그래, 이건 남산에서 최현우를 개조 중이던 마르골리스의 분신을 봤을 때와 비슷한 느낌. 나는 살짝 호흡을 가다듬은채로 눈을 크게 뜨고 그 상자를 바라봤다. 이거 뭐야, 나를 죽이려고 보낸 건 아닌 것 같은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했잖아.
적응이라도 해보라는 건가. 견디면 되는 건가. 확실히, 당장 검은 염소를 마주치게 된다면 가장 고민되었던 점이 제르멩이 말했던 그 존재감인지 뭔지 하는 거였으니까. 싸우기도 전에 지고 들어간다니, 부담이 엄청나잖아. 나보다 약한 녀석이 비겁한 수단을 쓰는 건 별로 안 무서워도, 나보다 강한 녀석이 그런 비겁한 수단을 쓰면 엄청나게 위험하다.
나는 몸을 한 번 부르르 떨고 가만히 그 보석을 노려보며 밀려오는 공포와 두통을 견뎌내기 시작했다. 돌아버리겠네. 도움이 되라고 보내 준 건 알겠는데.
"정신과 시간의 방도 아니고."
15분이 지나고 나서, 나는 벽에 기대어 후우, 하고 숨을 내쉬었다. 큰일 날 뻔했네. 하지만 이걸로 계속해서 적응하기 시작한다면 검은 염소의 존재감 정도까지는 어떻게든 이겨 낼 수 있지 않을까.
"이거 적응을 끝내고 난 다음에 가자."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편이 좋겠죠. 마음 급하다고 들어갔다가 죽어버리면 말짱 꽝이잖아요."
그래, 안 죽자고 싸우는 건데 싸우다가 죽어버리면 본말전도다. 빚 갚으려고 빚내서 강원랜드 가는 거랑 틀릴게 하나도 없는 행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