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래서 나는 탈옥했다-176화 (176/237)

# 176

Time Limit

"돈이라도 내고 먹는게 어때."

내 말에 녀석이 하하하, 하고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초콜릿 조각을 입으로 던져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은 염소가 있는 곳을 알게 된 걸 축하하네."

"바로 처들어 갈 생각은 없어."

천천히 해도 문제가 될 건 없다. 애초에 내 최종 목적은 최현우의 죽음이었으니까. 내 말에 제르멩이 미소를 띈 채로 와인병의 라벨을 확인하며 말했다.

"아, 물론 그것도 좋은 방법 중 하나겠지만 말이야. 세상 만사가 다 경쟁 아니겠나."

나는 그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야?"

내 말에 녀석이 자기 손목을 반대쪽 손의 검지로 툭툭 치며 말했다.

"시간이 부족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지. 멕시코 쪽에도 내가 마크를 남겨놓은 친구가 하나 있어. 이름은 비밀이고, 자네들 다음으로 우수한 친구지."

녀석의 말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말 돌리지 말고 제르멩."

내 말에 녀석이 어깨를 으쓱했다.

"필요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니 보채지 말라고. 보자... 멕시코의 트리거 기어는 손목시계의 형태야. 시침과 분침이 빠져 있지. 녀석은 3일 전에 시계를 찾아냈고, 이제 빠져있는 시침과 분침을 찾으러 향할거야."

"저런, 그 친구 개고생하겠네. 불쌍하기도 해라."

우리는 파백과 절혼 두 개를 찾아서 완성했는데, 녀석은 그럼 세 개를 찾아내야 한다는 거잖아. 하긴, 그걸 생각하지 않아도 우리가 유별날 정도로 빠르게 일을 진행했다는 건 알 것 같다. 이제야 트리거 기어를 이루는 파편 하나를 찾아냈다니.

"근데 그게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이유를 모르겠는데."

내 말에 녀석이 뒷머리를 긁었다.

"이야기가 좀 길어지겠지만 잘 듣게나. 랜드 마크와 월드 앵커. 마크는 찍힌 표식이라는 뜻이고, 앵커는 닻이라는 뜻이지."

"그래서?"

"닻이 내려와 쾅 하고 이 세상에 표식을 찍은거라고. 뭔가를 이 세상에 붙들어 두기 위해서. 잘 생각해봐. 닻이 있다면, 그 닻줄을 타고 올라갔을 때 뭐가 있을까?"

배. 나는 녀석의 말을 듣고는 한숨을 쉬었다.

"마르골리스를 말하는 건가."

내 말에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친구가 지키고 있는게 바로 배라고 할 수 있지. 우리가 타고 온 유일한 하나. 이 사태의 근원. 자네들의 유명한 종교 서적으로 치면 방주라 칭할 수 있겠군 그래. 다만, 그 목적이 생존에 있는게 아니라 정복에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나는 그 말에 허, 하는 소리를 냈다. 미친 새끼야. 유람선이랑 전함이 둘 다 물에 떠 있다고 해서 같은 물건이냐?

어쨌든, 말하고자 하는 건 알았다. 우리가 한국의 월드 앵커인 검은 염소를 죽이는데 성공하면 마르골리스가 머무르고 있는 그 방주인지 뭔지 하는 곳으로 향하는 길이 열린다는 거지?

이해는 했지만, 우리가 물어 본 건 그게 아니잖아.

"여전히, 시간이 부족하다는 말에 대한 대답이 될 수는 없는 것 같은데요."

서지현의 말에 제르멩이 한숨을 쉬고 지팡이로 바닥을 한 번 툭 쳤다.

"그래, 그래. 좀 기다려보게."

녀석이 말을 마치고 나서 머리를 긁었다.

"멕시코에 있는 친구는 이미 멕시코의 트리거 기어를 찾아냈지, 그리고 인도에 있는 친구는 조만간 해당 지역의 트리거 기어를 찾아낼 것 같아."

"당연한 일이잖아. 시간이 꽤 지났으니까."

내 말에 제르멩이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휘휘 저었다.

"웃기려고 한 말은 아니겠지만, 농담 잘 들었네. 옆나라로 예를 들어볼까? 일본의 생존자들은 트리거 기어를 찾아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구역 안의 안전지대 중 85%가 랜드마크의 손에 넘어간 상황이야."

저런, 그 정도면 망했다고 해도 될 것 같은데. 어쩌다가 그 섬나라는 그 꼴이 된 거야.

"뭐, 망한 장소는 알 바 아니지. 중요한 건 어차피 하나라도 성공하면 된다는 거야. 그리고, 느긋하게 하다간 방주에 도달하는게 자네들이 아니게 될 거야."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더 좋잖아. 손도 안 대고 코를 푸는 격인데."

내 말에 녀석이 대답했다.

"마르골리스를 죽이는데 성공하면... 세상의 월드 앵커와 랜드 마크를 붙들어 두고 있던 방주의 힘과 트리거 기어를 통해 딱 한 번, 기적같은 일을 이룰 수 있어. 전부 인류를 괴물에서 해방시켜주지."

"필요 없어. 나는 지금으로 만족하니까."

내 말에 녀석이 웃었다.

"그래? 멕시코의 친구가 트리거 기어를 완성시키고, 방주를 부순 다음에 그 시계를 활용한다면, 원하는 결과 몇 가지를 제외한 채로 시간이 되감기는데."

나는 그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잠깐만. 되감는다니, 무슨 뜻이야."

내 말에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이 사태가 벌어지가 바로 전 날로 돌아가는 거야. 물론, 녀석이 제외하게 되는 결과 중에는 마르골리스의 죽음도 포함되어 있겠지."

그걸로 지구는 안전해진다. 인류는 다시 이전과 같은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나는? 아니, 우리는?"

내 말에 옆에 있던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르멩이 어깨를 으쓱했다.

"예전에 뭐 하고 살았는지, 굳이 나에게 물어봐서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나?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 것 같은데."

등에 소름이 돋는다. 과거로 돌아가면, 나는 다시 감방에 있게 된다.

"최현우는? 참령에 당한 거잖아."

내 말에 제르멩이 으음, 하는 소리를 냈다.

"그 친구는 돌아오지 못해. 참령이 내리는 죽음은 그런 힘이 있으니."

최현우가 죽은 상태라는 건 다행이지만. 나는 시선을 돌려 서지현을 바라봤다. 그녀는 몸을 떨고 있었다.

"다 없던 일이 된다고요? 기억은?"

서지현의 질문에 제르멩이 대답했다.

"대답은 이미 알고 있지 않나."

제르멩의 말이 망치처럼 내 뒤통수를 내려 찍는다.

나는 30년 선고를 받은 감방의 죄수로, 서지현은 안동 인근의 보건지소 간호사로. 서로 만날수도 없고, 서로를 기억하지도 못할거다. 그냥, 전부 없던 일이 되는거다. 서지현은 다시 자신이 간호사가 되기 위해서 짊어졌던 빚을 갚으며 살아야 하고, 나는 감방에서 형기를 채워야겠지.

다른 사람들은 그걸로 만족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멕시코에서 트리거 기어를 모으는 녀석도 그걸로 만족하겠지.

"평화는 여러가지 방식으로 달성 할 수 있지 않나?"

제르멩이 설명을 이어갔다.

방주가 가진 힘을 참령을 통해 사용한다면, 몇 개의 예외를 선정한 이후, 예외에 해당하지 않는 괴물들을 모두 죽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모든 트리거 기어가 참령과 같은 방식으로 작용하는 건 아니다.

한국의 트리거 기어는 괴물들의 죽음으로 평화라는 목표를 달성하지만, 멕시코의 트리거 기어는 세상의 시간을 전부 되감아버리면서 평화를 달성한다.

다른 트리거 기어도 마찬가지다. 각 트리거 기어는 각자의 방식으로 괴물의 위협으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키는데 성공한다. 문제는, 우리 다음으로 월드 앵커를 박살내고 방주라는 곳에 도달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게 하필이면 그 망할 놈의 멕시코라는 거다.

우리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멕시코가 성공 할 가능성이 제일 높다. 그리고, 멕시코가 성공해서 지구의 시간이 되감기면 우리는 끝장이다.

"의욕이 좀 생기나?"

나는 이마를 짚은 채 한숨을 쉬었다.

"말해줘서 고맙군. 멕시코의 녀석도 이걸 아나?"

내 말에 제르멩이 고개를 저었다.

"1등과 2등 사이에는 특별 대접이라는 이름의 차별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마르골리스를 죽이고 방주의 힘을 사용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제일 높은 우리에게는 이 정보를 제공해 준 모양이다. 정보를 알려준 목적도 알 것 같다. 여기에서 멈추지 못하게 하려고. 한국의 월드 앵커를 파괴하는 걸로는 만족 하지 못하게 하려고.

"그래, 고맙다. 덕분에 의욕이 샘솟는군."

이건 제르멩이 알려주지 않았어도 일어날 일이었다. 오히려, 차라리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서 다행이다.

느긋하게 진행할 여유가 없었다.

"되감지 않을 가능성은?"

내 말에 제르멩이 고개를 저었다.

"그 아가씨는 남편과 함께 허니문을 떠나던 중이었지. 이 사태가 벌어지고 나서 남편이 자기 대신 죽은 모양이야. 아직도 그떄 생각만 하면 펑펑 우는 모양이던데."

젠장, 안 되감을리가 없겠군. 사정은 딱하지만, 그렇다고 멕시코에 사는 갑순이가 소원을 이루도록 방치했다가는 우리 사정이 딱해지게 생겼다. 무조건 우리가 먼저 도달해야 한다. 제르멩이 다시 돌아갈 모양이다. 그 전에.

"도대체 너희와 협약을 맺었다고 하는 지구의 높으신 분은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거야. 지금 창조물들이 죄다 이 꼴이 났는데."

내 말에 녀석이 픽 웃었다.

"생각해보게. 우리는 자네들을 점령하기 위해서 이 세상으로 넘어왔던거야. 상점에서 판매하는 물건이나 질문 기능과 레벨업, 주어지는 포인트나 보상 같은 건 어디에 사는 누가 준비했다고 생각하나. 설마 우리가 준비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거기에 얼마나 많은 힘이 들어간다고 생각하나."

그래, 시스템 운영 중이라 바쁘다 그거지? 그렇다면야 할 말이 없지. 나름대로 바쁘게 살고 있는 모양인네.

"질문이 끝났으면, 나는 돌아가보겠네. 고생들 하라고."

제르멩은 그 말을 끝으로 사라졌다.

"미치겠네."

서지현이 몸을 부르르 떨고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절대 싫어요. 우리가 뒤쳐진다 싶으면 차라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멕시코로 가서, 그 여자를 죽여버릴거야."

나는 그 말에 한숨을 쉬었다.

"지현아, 우리는 한국에 있고 그 여자는 멕시코에 있어. 태평양을 건너자는 거야?"

게다가, 제르멩도 우리가 그럴 걸 알고 있을거다. 멕시코에서 트리거 기어를 모으는 여자가 어디까지 일을 진행했는지, 우리에게 알려 줄 이유가 없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그 여자가 벌서 일을 저질러놓을 가능성이 더 크기도 하고.

"우리가 먼저 하자."

내 말에 서지현이 굳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절대 그냥 두지 않겠어. 어떻게 알게 된 사람인데, 어떻게 얻게 된 인연인데. 다른 사람이 부수도록 두지는 않을거에요. 절대로."

그 여자도 사정이 딱하기는 하지만, 원래 사람이라는게 내 군생활이 세상에서 제일 힘들기 마련인 족속들이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가 먼저 마르골리스를 제거하고 방주로 향할거다. 그리고, 참령을 통해 지구 상의 괴물을 싹 지워버리는 식으로 모든 일을 끝낼거다. 물론, 제르멩은 남겨둬야겠지. 그걸 원해서 우리에게 협조하는 중인데.

"아, 술 땅겨."

서지현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커다란 컵을 꺼내서 그 안에 와인을 콸콸콸 따른 다음 그대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호탕하게도 마신다. 어지간히 속이 타는 모양이네. 사실, 나도 그렇다.

이 모든게, 그냥 없던 일이 되어버린다니. 서지현이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저도 이런 말 하긴 싫지만. 과거로 돌아간다니. 당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보건지소에서 받는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그 동안 쌓여있던 돈이나 갚으며 평생을 살라니. 저는 싫어요."

서지현은 그렇게 말하고 떨리는 눈으로 참령을 끼워넣은 수확자를 바라봤다.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가정이지만... 우리보다 멕시코에 있다는 그 계집이 더 빨리 방주에 도착하면."

나는 서지현의 말에 대답했다.

"그래, 저걸로 같이 죽자."

시간을 되감는다고 해도 참령에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나와 서지현이 저 검에 의해 죽는다면 우리는 되감긴 시간 속에서 살지 않아도 된다.

서지현이 나를 모르고, 나도 서지현을 모르게 된다면. 거기에 더해서 서로 만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을게 뻔하다면.

더 이상 살아있을 이유가 없잖아. 서지현을 만나지 않았다면 최현우를 죽이고 나도 죽을 생각이었는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