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
끝은 끝이 아니다
머리가 복잡하다. 최현우에게 협력해 인천을 지배하고 있던 이강현은 현 상황에 대해서 무수히 많은 고민을 거듭하는 중이다. 그의 손등에 새겨져 있던 표식은 사라졌다. 마음대로 해도 괜찮은 자유를 얻기는 했지만, 애초에 필요하지도 않던 자유다. 그는 이 안에서는 왕처럼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사람들이 그의 통제를 거부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최현우의 죽음은 숨길려고 해도 숨길 수 있는게 아니었다. 당장 길거리를 돌아다니던 괴물들부터 흔적도 없이 모습을 감췄으니까. 최현우의 죽음으로 생존자들은 잠깐 동요했지만, 이내 그 남자가 죽었다면 더 이상 자신들이 이강현의 통제를 따를 이유가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지금은, 일단은 얌전히 지시에 복종하고 있지만 아주 작은 기폭제 한 번으로도 녀석들은 언제든지 이강현을 배신할 거다. 이미, 최현우의 지시에 따라 사랑의 집 재료로 가족이 희생된 자들은 이강현에게 지독한 원한을 품고 있을 테니까.
"이강현 씨."
왜! 라고 말하려고 입을 벌렸던 이강현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어, 그래 무슨 일이야."
이전처럼 행동하면 안된다. 이 이상으로 사람들에게 반감을 심어주면 안된다.
"그 녀석들입니다."
이강현이 응? 하는 소리를 냈다.
"그 녀석들이라니."
"최현우를 죽인 남자와 여자가 찾아왔습니다."
그 말에 이강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당장 협조해. 무기는 내려놓고, 싸울 의지가 없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최대한 정중하게 모시고 와."
"하지만, 무기 정도는 압수해야..."
멍청한 새끼. 이강현이 얼굴을 구긴채 녀석을 보다가 깊게 숨을 내쉰 다음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대답을 돌려주었다.
"무기가 없다고 해도, 우리가 상대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야. 쓸데없이 마찰을 일으킬 필요는 없어. 알아듣겠지?"
이강현의 말을 들은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고 인사와 함꼐 문을 나섰다. 털썩, 의자에 앉은 이강현이 테이블을 검지로 톡톡 두들기기 시작했다.
"상황이 변했어."
상황이 변했으면, 그도 변해야 한다. 뒤진 최현우는 그의 인생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오히려, 그의 아래로 들어가서 저질렀던 일들이 지금에서야 부메랑이 되어 그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한 발짝 한 발짝이 얇게 얼어붙은 호수 위를 걸어가는 것처럼 위태로운 상황이다.
대처를 잘 해야 한다. 그는 고민하다가 찬장에서 위스키를 꺼내 손님을 맞을 준비를 했다.
"이강현 씨, 두 분이 찾아왔습니다."
문 너머의 목소리에 이강현은 튀어나가듯이 문 쪽으로 다가가, 직접 문을 열었다. 거기에는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이 서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강현입니다."
그의 목숨줄은, 이 둘이 가지고 있다. 조금이라도 기분을 상하게 하면 죽는다. 그런 생각이 이강현의 머리 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
대뜸 문이 열리더니 우리를 향해 인사를 하는 녀석이 눈에 들어왔다. 인사를 마친 녀석이 우리를 안으로 들여보내주고, 술잔에 양주를 따라주었다.
"이런 대접을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니들 보스 죽인 녀석이잖아."
내 말에 이강현이 하하하,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지요. 최현우. 이젠 죽은 놈 아닙니까."
죽은 놈이라. 이강현의 말에 나는 양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래도 자기 상사였던 녀석에게 못 하는 말이 없군."
내 말이 이강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저는 죽은 사람에게는 예의 안 차립니다. 시체에 신경 쓸 여유가 있다면, 지금 눈 앞에서 제 목숨줄을 잡고 있는 두 분에게 신경을 더 쓰는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살아야 한다, 라고 하는 일념이 느껴지는 대답이었다.
"왜요, 대놓고 죽이지 말아달라고 애원을 하지."
서지현의 말에 이강현이 곧바로 허리를 숙인채 대답했다.
"제발 죽이지 말아주세요,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뭐든지 하겠습니다."
이건 서지현도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인지,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일단, 이 친구가 우리에게 협조할 생각이 한 가득이라는 건 잘 알았다. 그리고, 두려워 하고 있기도 하다.
"최현우한테도 이렇게 빌었나?"
"네. 살고 싶으니까요."
저런, 질문에 진실로 대답해버리니 더 할 말이 없는걸.
"인천에 무엇 떄문에 오신지는 모르겠지만, 머무르시는 동안에는 불편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서지현이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성남의 생존자들을 통제하는 건 우리가 아니에요, 그 사실은 알고 이러는 건가요?"
서지현의 말에 이강현이 대답했다.
"그렇습니까? 상관없습니다. 사실, 성남의 생존자들에게서는 제 한 몸 정도는 건사할 자신이 있거든요. 하지만 지금 앞에 계신 두 분은 다르죠. 그럴 자신 없습니다."
그는 말을 마치고 나서 나와 서지현의 빈 잔에 다시 술을 채워주었다. 나는 잔을 살펴보다가 말했다.
"배를 타야 할 것 같은데."
내 말에 이강현이 그렇습니까, 라고 대답했다.
"지금 제 통제 하에 있는 생존자들 중에서, 배를 몰 수 있는 사람이 있나. 바로 확인해보겠습니다. 있으면 바로 알려드리지요."
왜 배가 필요한지 같은 건 물어보지도 않는다. 어차피 물어봐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게 뻔하고, 괜히 물어봤다가 인상이 나빠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겠지. 이 녀석이 이렇게까지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생존자들이 네 지시를 순순히 듣지는 않을텐데."
내 말에 이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최현우가 뒤지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런지 별 다른 움직임이 없지만, 앞으로도 이렇게 조용할 거라고 생각하기는 힘들겠죠. 그 와중에 여러분이 방문해 주시다니, 참 운이 좋은 것 같습니다."
뭐, 우리랑 모종의 이야기가 된 것처럼 속여서 통제력을 확보할 생각인 모양이지.
"협조를 해주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최현우 아래에 붙어있으면서 해먹을 일이 꽤 많잖아?"
내 말에 녀석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사람들을 억지로 사랑의 집 재료로 사용하고, 할당된 보급품을 전달하기 위해서 뼈만 앙상하게 남은 사람들이 숨겨놓은 물자를 빼앗고, 저항하는 사람들은 본보기로 죽였습니다."
"참 솔직하기도 해라."
서지현의 말에 이강현이 대답했다.
"부인할 생각 없습니다. 세상 망하기 전에 이런 일을 벌였으면 사형으로도 부족했겠지요."
녀석은 약간 떨리는 눈으로 우리를 살펴본다.
"죽이실 겁니까."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딱히 떳떳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
이시은이나 김용천이라면 가만히 두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글쎄다. 잘 모르겠네. 일단 이 녀석이 협조해준다면 인천에서 필요한 것을 제공받을 수 있다. 머무를 만한 공간은 물론이고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물자, 거기에 더해서 배를 조종 할 수 있는 실력이 있는 사람까지.
"그럼 살았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서지현이 녀석을 보다가 대답했다.
"우리 목줄기에 칼만 겨누지 않으면 상관없어요. 다만, 성남... 아니지, 이제는 서울이 되려나. 그쪽의 생존자들과 생기게 되는 마찰은 당신이 알아서 해결하세요."
그래, 거기까지 우리가 신경써야 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필요한 것을 받는 대가로 녀석을 그냥 두고, 녀석이 인천을 통제할 때 우리 이름을 파는 것을 용인해주는 거니까.
"거기까지도 두 분의 이름을 팔고 싶은데. 상황이 변하면 아군도 변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나는 그 말에 하,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런다고 김용천을 위시한 서울 친구들이 이해를 해줄까.
"네 능력껏 해보던가."
내 말에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
녀석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나는 놈의 멱살을 잡아 그대로 책상 위에 가볍게 때려박았다. 둔중한 소리와 함께 비명을 지르던 책상이 그대로 무너지고, 녀석은 박살난 책상의 잔해 사이에 처박힌 채로 나에게 가슴이 눌려 있었다. 나는 녀석과 눈을 마주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어디에서 뭘 하던 녀석이고, 여기에서 무슨 일을 저질렀든지 신경쓰지 않아. 이유가 뭘까?"
녀석은 나와 눈을 마주친 채로 이마에서 식은땀을, 입에서는 피를 흘렸다.
"..."
"우리에게 해가 되지는 않았기 때문이지. 반대로 말하면..."
"해를 끼치지 않겠다고 약속드리기는 곤란합니다. 상황이 바뀐다면 한 말도 주워 담아야 하는 법이지만, 자주 그러면 말에 힘이 없어지니까요."
녀석은 입가에 흘러내리는 피를 소매로 훔친 다음에 말했다.
"두 분에게 협조하는게 협조하지 않는 것 보다 득이 된다는 전제 하에서는,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항상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썩 만족스럽지는 못한 답인데요."
서지현의 말에 이강현이 시선을 그녀에게 던지며 말했다.
"솔직하게, 제가 절대로 배신하지 않겠다고 말했으면 믿으셨을겁니까?"
서지현이 고개를 저었다.
"거봐요. 변하는게 없지요."
녀석은 그렇게 말하고 잠깐 잔기침을 하고는 다시 나를 바라봤다.
"어지간해서는 지킬 수 없는 약속은 하지 말자는 주의입니다. 저 같은 사람을 보고, 신용이 높다고들 하던데."
나는 녀석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뭐 좋아. 어차피 복숭아 동산에서 술 나누며 의형제 맺을 생각은 없었으니까."
내 말에 이강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끄응, 하는 소리를 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삼고초려를 더 좋아하는 편입니다."
니가 선호하는게 뭔지 내가 알 게 뭐야. 녀석은 구겨진 옷을 탁탁 턴 다음에 문 쪽으로 향하며 말했다.
"우선은 머무르실 곳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숙소를 안내받은 우리는 하, 하는 소리를 냇다.
"호텔이라."
내 말에 이강현이 인사와 함께 대답했다.
"전기도 들어옵니다. 싹 뜯어 고쳤거든요. 원래는 최현우가 올 일이 있으면 쓰려고 마련해 둔 장소입니다."
전기만 들어오는게 아니다. 수도에는 물펌프를 연결시켜 두었고, 쓰고 빠져나가는 물은 따로 버려지기 떄문에 문제가 없다.
나는 그 말에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녀석이 내 표정을 보고 대답했다.
"뭐, 정작 당사자는 찾아온 적이 없이 깨꼬닥 해버렸지만요. 어쨌든 제 명줄 잡아쥐고 있는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준비한 거니, 제대로 용도에 맞게 쓰게 되는군요."
녀석은 말을 마치고 나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남자 한 녀석이 초콜릿과 와인을 챙겨서 들어왔고, 녀석이 그걸 테이블 위에 둔 다음 말했다.
"그럼, 푹 쉬시며 여독을 풀고 계세요. 아, 배를 몰 줄 아는 사람 말인데 보트 같은 것도 괜찮은 겁니까?"
"보트도 괜찮아요."
서지현의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알고 준비를 해두겠습니다."
녀석은 말을 마치고 인사와 함께 문을 닫았다. 침대에 걸터앉은 서지현이 입을 열었다.
"저 녀석, 어떻게 생각해요?"
"애매하네."
뭐라고 말을 해야 할 지 모르겠다.
"식당에서 손놈이 진상질 하려고 하는데 대뜸 눈 앞에서 큰절하며 '잘못했습니다!' 하고 외치는 직원을 보는 느낌이야."
자기 쪽에서 먼저 저렇게 나와버리니 오히려 상대방이 좀 당황스러울 지경이다.
"적대할 생각은 없는 것 같으니까요. 그냥 두어도 괜찮겠죠. 이 정도로 협조해준다면. 아, 기왕에 받은 거니 초콜릿이나 먹..."
서지현이 갑자기 하던 말을 멈췄다. 수상함을 느낀 나도 고개를 돌려 초콜릿이 올려져 있던 테이블을 바라봤다.
"맛이 기가 막힌데."
상자는 열려 있었고, 펠트 모자를 푹 눌러 쓴 양아치 한 놈이 우리 먹으라고 둔 초콜릿을 꺼내먹고 있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