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
끝은 끝이 아니다
배를 타야 하나. 염소가 짠 걸 좋아한다고 했지. 그래서 바다 한복판에 자리를 잡은건가. 언제부터 염소가 해양동물이 된 거지.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건 그런,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생각이었다. 서지현도 뭐라고 말을 해야 할 지 난감한 표정이었다.
"인천에 가면, 아마 항구에 배가 있을거에요."
"배 몰 줄 알아?'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저었다.
"제 모자란 머리로는 간호학 지식을 쑤셔넣는 것도 힘들었어요. 그러는 당신은?"
"안타깝게도, 교도소에서 직업교육을 못 받았어."
물론 직업교육을 한다고 해도 선박을 조종하는 법을 가르쳐 주지는 않았겠지만. 우리는 침묵한 상태로 지도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인천에 배 몰 줄 아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이전에 안동에서 원주로 향할 떄도 헬리콥터 조종사의 도움을 받았었잖아. 이번에도 어떻게든 그 비슷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좋을텐데.
"위치를 알고 나니 이젠 또 가는 길이 문제네."
인천에 도착하는 건 어려울게 없다. 최현우의 손에 들어갔었다고 해도 어차피 최현우가 없어지고 녀석이 부리던 괴물들까지 싹 사라진 이상 인천에 머무르는 생존자들이 적대적이고, 그 숫자가 성남에 모인 생존자 급으로 많다고 해도 충분히 극복 할 수 있다.
바다라. 멀미약도 챙겨야 하려나. 그러고 보니 여기까지 오면서 바다를 제대로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일단, 여기에서 볼 일은 다 본 것 같은데."
인천으로 가야 하나. 그럼 경인 고속도로를 타야겠지. 어차피 차를 타지 않아도 인천까지 가는 건 오래 걸리지 않을거다. 하지만,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중인지 확인을 해야 한다. 파악을 하기 위해서는 살펴 볼 시간이 필요하다. 게다가, 솔직히 몸 상태가 좋지는 않으니까. 근처에 도착해서 하루는 쉬어야 한다.
"하루 정도는 쉬는 편이 좋겠지."
"네. 어차피 도착해서 바로 배를 타고 나가는 것도 조금 걱정이 되거든요."
랜드 마크는 익숙해졌다, 하지만 월드 앵커는 이번이 처음이다. 게다가, 성공하면 이후 한국에서는 괴물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게 된다. 월드 앵커를 끝장내는 건 이번이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이겠지. 실수가 없도록 해야 한다. 지금와서 죽어버리면 난 억울해서 눈도 못 감을거다.
남산을 나온 우리는 곧바로 양천구를 거쳐 경인 고속도로 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부천시에는 다행히도 랜드 마크 같은 건 없는 모양이었다.
"차라리 있는 편이 좋은데."
물론 랜드 마크와 싸우려 들면 당연하다는 듯이 월드 앵커인 검은 염소가 랜드 마크를 강화시키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사용 할 수 있는 포인트와 좋은 장비가 필요했다. 그리고, 강화된 랜드마크들이 뱉어내는 장비는 굉장히 강력하다.
수원의 해골을 때려잡고 얻은 문서는 아직 사용해보지는 않았지만 강력하지 않을 리가 없는 설명이었고, 서울의 랜드 마크를 때려잡고 얻게 된 목걸이는 실제로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다소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검은 염소를 잡으러 가는 길에 랜드 마크 한 번을 더 잡을 수 있다는 건 굉장한 도움이 된다.
"어쩔 수 없죠."
그래, 없는 걸 만들어 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이쯤에서 하루 쉬자."
부천시에 도착한 우리는 하루 머무를 곳을 찾기 시작했다. 근처에 하루 정도 머무를 수 있을 법한 오피스텔이나 아파트 같은 건 제법 있었다. 그 중에서 그럭저럭 내부에서 피비린내가 나지 않는 오피스텔을 찾아내, 문고리를 잡았다.
"저녁에는, 그냥 간단하게 먹자."
"역시, 간단한 식사 하면 또 컵라면이죠."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문고리를 돌렸는데.
"..."
열린 문 너머를 확인한 우리는 곧바로 무기를 꺼내들었다.
"언니, 그리고 오빠. 안녕."
그건 어린 소녀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머리 위에 돋아나 있는 작은 염소 뿔. 칠흑같이 검은 드레스, 구불구불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새하얀 피부. 왼쪽 눈에는 동공을 대신해 검은 오각형이, 오른 눈에는 별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코를 간지럽히는 장미 향기.
소녀의 형태를 한 괴물은 가시덩굴이 휘감긴 커다란 왕좌에 앉아 있었다. 가시덩굴 위에는 두개골이 달려 있는데, 눈과 입은 새까만 흑장미로 장식되어 있었다.
녀석이 장난스럽게 메에, 하는 소리를 내고는 키들거린다.
그래 안녕.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녀석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본다. 가짜다. 이렇게 쉬울리가 없다. 그리고, 내가 잘라낸 녀석의 모습이 그대로 스르륵, 흩어진 다음 약간 뒤쪽에 다시금 모습이 생겨난다.
"있지, 마르골리스의 애완동물이 죽어버렸다? 두 사람이 한 일이지?"
소녀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작게 하품을 한 다음에 우리를 보며 웃었다.
"날 깨운 것도 오빠랑 언니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참 여러가지 일을 했구나. 나, 성실한 존재들은 좋아하는 편이야."
소녀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자기 배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녀가 입고 있는 긴 드레스의 치맛자락 아래에서 뭔가가 희미하고, 무수한 속삭임 같은 것이 들린다. 소녀가 배를 쓰다듬으며 우리를 보다가 눈을 크게 뜬채 입을 가리고 카랑카랑한 웃음을 터뜨린다.
"까하핫, 표정들이 왜 그래. 혹시, 무서워?"
그럼 이 상황이 웃길 것 같냐.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긴장한 표정으로 녀석을 바라봤다. 어디까지나 분신일 뿐이다. 분신조차도 바라보면 괴로울 정도의 존재감을 뿜어내던 마르골리스와는 달리 이 괴물의 분신은 존재감은 뿜어내지 않고 있었다.
"뭐하러 찾아온거야."
"인사."
소녀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살짝 오른손을 흔들어 보인다. 나와 서지현은 거기에 반응하지 않았다.
"인사는 무슨."
내 말에 녀석이 놀란 표정을 짓고 나를 바라봤다.
"오빠, 인사는 소중한거야. 만남의 시작은 언제나 인사잖아? 관계의 발전 또한 인사로 시작하고. 처음 뵙겠습니다, 에서 또 보네요. 또 보네요, 에서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에서 안녕으로."
소녀는 노래하듯이 말을 읊은 다음에 우리를 보며 활짝 웃었다.
"나는 카피라. 그것 말고도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어. 시기하는 검은 염소. 원한의 사슬을 거두고 펼치는 손. 저주를 잉태하는 검은 자궁. 저기, 두 사람은 이름이 뭐야, 알려줄래?"
공격해도 허상이라 죽일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게 꼭 저 질문에 대답해줘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침묵하고 있자 카피라가 뺨을 살짝 부풀리고는 말했다.
"그 정도는 말해줘도 괜찮을텐데."
귀여운 척 하지마. 괴물 자식. 애새끼 면상을 하고 있어도 니가 우리한테 오빠 언니 할 정도로 젊지 않다는 건 충분히 짐작 할 수 있어. 카피라가 우리를 보고 쿡쿡거리며 웃었다.
"있지, 죽고 나서는 후회해도 늦어. 자신의 이름을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긴다는 건 의외로 중요한 일이라고, 무슨 뜻인지 알려나."
카피라는 말을 마치고 몸을 한 바퀴 빙글 돌린 다음 우리를 바라봤다. 동공을 대신하고 있던 오각형과 별모양은 이제 붉은색으로 물든채 섬뜩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입에 걸린 웃음은 일견 순수해보이지만, 다시 살펴보면 불쾌하고 불경하기 짝이 없다.
"기억해준다는 거잖아. 시간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영원의 자리에서 굽어 살피는 바로 이 내가. 오빠랑 언니가 죽어서 살점이 썩어 문드러지고, 뼈 속의 골수가 말라 부서져 가루가 되어도.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이 지난다고 해도. 두 사람은 그럴 가치가 있거든."
이야, 누군가에게 인정받았는데 기쁘지 않기도 힘든데.
"뭐, 말해주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카피라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갑자기 카피라의 모습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카피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역시, 제르멩은 일부러 기회를 준 거였구나. 그럴 것 같았어."
무슨 소리를 하는거지?
생각해보면, 이제서야 카피리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건, 우리가 어디있는지 알고 있다는 뜻이다. 찾아오려고 하면 얼마든지 찾아올 수 있었을텐데. 아니지, 찾아올 필요도 없었지. 그냥 최현우에게 우리가 있는 위치를 실시간으로 읊어주는 것만으로도 서울에서 우리는 굉장히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을 것이다.
"간접적인 도움이라."
제르멩이 주고 있던 간접적인 도움이라는게 뭔지 드디어 알았다. 스텔스라니. 자식 알고보니 좋은 녀석이었잖아.
어쨌든, 무슨 생각에서인지 제르멩은 그 동안 우리를 가려주고 있던 스텔스를 잠깐 걷어냈었고, 덕분에 카피라가 우리를 찾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여기까지인 모양이다. 카피라의 모습이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 녀석의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에게로 오는 중이라면, 말리지는 않겠어. 그야... 어차피 오빠랑 언니가 찾아오지 않는다면 찾아낼 생각이었거든. 찾아내서..."
말을 마친 카피라가 검지를 입가에 둔 채로 윙크를 했다.
"굳이 말하지는 않을게. 어린아이는 착한 말만 해야 하잖아? 음, 이제와서 도망쳐도 소용없어. 하지만, 맞선다고 해도 승리를 쟁취하지는 못할거야. 대신, 한계를 자각하겠지. 그래서, 이름 안 알려줄거야?"
"세 번이나 질문했는데 원하는 답을 못 얻었으면 포기하는게 어때."
이렇게까지 이름에 집착한다는 건 분명히 수상하다. 내 말에 카피라가 쯔, 하는 소리를 끝으로 사라졌다. 카피라의 모습이 사라짐과 함께, 서서히 오피스텔 내부의 형태가 원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한다.
"후우."
벽에 등을 기댄 서지현이 그대로 주르르 미끄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말했다.
"지현아, 피곤한 건 알겠지만."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여기에 머무르면 안되겠죠."
카피라가 사라지기 전까지 우리는 여기에 머무르고 있었다. 여기에 계속 머무르는 건 바보같은 일이다. 쉬더라도 다른 곳에서 쉬어야 한다. 서지현이 끄응 하는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곤하면 말해, 업어줄게."
"아직 걸을 수 있는데 그럴 수는 없죠. 당신도 피곤하잖아요?"
걸음걸이에 약간 힘이 없긴 하지만, 그렇다고 못 걷는 건 아니다. 우리는 원래 머무르기로 결정했던 오피스텔을 나와, 약 5km 정도를 더 걸어간 다음 다시 머무를 곳을 정했다. 혹시나 녀석이 우리의 위치를 짐작해서 괴물을 보낼까봐 일부러 인천으로 향하는 길로는 가지 않았다.
다시 새로 머무를 곳을 찾아낸 우리는 방 안의 상태를 보고 허허허 하고 웃었다. 여기도 곰팡이, 저기도 곰팡이.
"소독할까요?"
서지현은 그렇게 말하고는 화염을 확 하고 피워올렸다. 다 구워버리면 깨끗해지긴 하겠지. 게다가 생각해보면 서지현은 태우는 물건을 고를 수 있잖아.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곧바로 화악 하고 아지랑이가 일어나기 시작하고, 시커멓게 곰팡이가 달라붙어있던 벽지와 바닥이 싹 화염에 붍타버린다. 창문을 열고, 탄내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린 다음 다시 문을 닫았다.
"조금 딱딱하고 살풍경하긴 하지만."
"곰팡이 핀 곳에서 자는 것보다는 훨씬 좋잖아."
그렇다고 다른 곳을 또 찾기도 피곤하다. 비닐을 꺼내 바닥을 덮고, 그 위에 이불과 침낭을 준비해 잠자리를 만든 우리는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