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
결착
최현우의 죽음은, 싸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최현우가 만들어낸 괴물들은 최현우가 죽자 함께 사라져 가기 시작한다. 아마, 서울 주변의 인공 도시에 자리잡고 있는 사랑의 집인지 뭔지 하는 것도 함께 사라지겠지. 괴물의 숫자를 믿고 있던 최현우의 졸개들은 최현우의 죽음과 함께 시작된 괴물들의 소멸에 눈에 띄게 당황하기 시작한다.
"후퇴, 도망쳐!"
몇몇 녀석들이 전의를 잃고 도망치는게 보인다. 괴물들이 사라지고 나면, 절대적인 머릿수는 최현우 편에 붙었던 녀석들이 압도적으로 적다.
"뒤쫓아, 남김없이 다 죽여버려!"
이시은의 외침, 지친채로 난간에 기대어 있던 나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항복하면 살려둘 줄 알았는데."
"그, 사랑의 집이라는 물건에 꽤 화가 나 있었던 걸로 알아요."
그래서 남김없이 죽여버리겠다는 건가.
"기분이 어때요? 시원섭섭하다던가."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시원섭섭은 무슨. 그럴리가 있겠어?"
꼭 해야만 했던 일들은 이제 전부 끝났다. 몇 년이나 나를 괴롭히고 있던 그 케케묵은 증오와 분노의 원인을 내 손으로 작살내는데 성공했다. 우리를 상대하던 녀석들은 도망치는 중이고, 우리와 함께 하던 사람들은 그들을 추적한다.
근데, 나는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최현우, 원래 배신을 할 생각이었다죠."
"그러게."
결론적으로 실패했다. 녀석은 녹아내린 건물에 가둬진 채, 마빡에 박아넣은 검으로 목숨이 끊어졌다.
"어쩌면, N 타워 쪽을 뒤져보면 쓸만한 정보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요. 검은 염소에 관련 된 정보같은 것들."
다음으로 이행해야 한다. 지독하게 나를 묶어놓고 있던 과거의 원한은 끝났다. 최현우는 죽었고, 참령으로 죽인 이상 설사 살아난다고 해도 죽은 것과 마찬가지다. 이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졌으니까. 마르골리스가 제 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가 있다고 해도 참령에 죽은 녀석을 살려 낼 수는 없다. 이 점은 다른 녀석도 아니고 제르멩에게 확답을 받았으니 믿어도 되겠지.
"다음인가."
서지현이 내 말에 대답했다.
"지금은, 불안하니까요."
여전히 한국에는 괴물들이 돌아다니는 중이다. 그리고, 이 괴물들의 목표는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우리를 싹 지워내고, 여기에 자신들이 자리잡고 싶다.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의 목표인 안정되고 밝은 미래와는 정면으로 대치된다.
"지금 한국에 위협이라고 할 만한 존재는 우리 둘 말고 없죠."
한국의 월드 앵커인 검은 염소 입장에서는 분명히, 참령을 가지고 있는 나와 서지현이 최대의 위협일 것이다.
"참령을 다른 녀석에게 넘겨주는 건 어떨까."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은 아니다. 내 말에 서지현이 내 손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불가능한 일인거, 알잖아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참령이 더 안전해 질 수 있는 길이 있을거라고 생각해요?"
없지. 참령은 월드 앵커인 검은 염소는 물론이고, 제르멩의 친구이자 이 세상에 온갖 괴물들을 떄려넣은 마르골리스에게도 위협이 되는 물건이다. 우리가 보관하지 않는다면 우리보다 강한 한국의 누군가에게 이걸 넘겨줘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이후에 일어날 일은 뻔하다. 녀석들이 유일하게 걱정하는 장비가 바로 우리가 가진 트리거 기어니까. 우리보다 약한 녀석에게 대뜸 넘겨주면, 검은 염소는 어렵지 않게 참령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자신들을 위협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사라지고 나면, 녀석들이 뭘 할까요?"
"고생했다고 맥주 한 잔 하고 퇴근하지는 않겠지."
당연히 자신들이 목적한 일을 마저 끝내려 들 것이다. 이제는 자신들을 위협하는 트리거 기어조차 없으니, 더욱 더 적극적으로. 그리고, 결국 그 피해는 다른 사람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돌아온다. 그리고, 그 순간이 닥쳐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거다. 참령을 다른 녀석에게 넘겨주고, 그 녀석이 참령을 빼앗긴 이상, 그 괴물들에게 대항 할 수 있는 장비를 소지하고 있지 않을테니까.
그걸로 끝이다. 최선을 다해 과거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얻게 된 지금과 앞으로의 미래는 그 순간 끝장난다.
"검은 염소라.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이겨야죠."
서지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우선 N 타워 조사부터 시작하자."
최현우 녀석이 남겨둔 것이 좀 있을지도 모르니까.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이라면 좋을텐데.
"더 싸우기는 힘들겠지?"
서지현이 척 하고 손을 들어 최현우의 시체를 가리켰다.
"저기 보이는 녹은 아이스크림 같은 거. 누가 한 일이게요? 한 번에 이렇게 많이 마력을 때려박아 본 건 처음이에요. 더는 싸울 생각 없어요. 당신도 마찬가지야. 뒷정리까지 우리가 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래, 우리가 아니라도 뒷정리를 할 사람들은 많다. 건물에서 내려온 나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김용천에게 다가갔다.
"아,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결코 잊지 못할 도움을 받았어요. 그리고, 축하드립니다."
축하는 고맙게 받지. 고개를 끄덕인 나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바로 N 타워로 향할 생각이다. 그리고, 아마 이후로는 우리가 너희와 접촉하는 일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거야."
꼭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접촉할 이유는 없으니까. 우리의 공조는 사실 상 여기까지다. 어차피 이 조직의 리더는 김용천이다. 그리고 나와 서지현은 김용천이 시키는 일을 할 생각은 없다. 조직의 리더 입장에서도 리더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은 필요없고, 우리도 딱히 김용천의 입지를 뒤흔들면서까지 남아있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렇습니까, 그렇군요. 하지만,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하다면 찾아와주세요. 두 분은, 제가 해드릴 수 있는 한 최고의 대우를 보장하겠습니다."
"그래,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 전해줘."
이 길로 바로 남산으로 향할거다. 서지현이 김용천 쪽으로 뭔가를 휙 하고 던져줬다.
"이시은 양에게 전해주려고 했는데, 굳이 찾아가서 전해주는 것도 좀 그렇네요. 그냥 당신이 받아서 보관하고 있다가, 유용하게 쓰세요."
김용천이 서지현으로부터 받아든 내용물을 확인하기도 전에, 나와 서지현은 녀석들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뭘 준거야?"
내 말에 서지현이 대답했다.
"책임 질 수 있고, 통제 할 수 있는 쾌락을 위한 마법의 얇은 고무?"
저런, 선물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 녀석들이 성남을 정리하는 동안, 우리는 남산에 도착했다.
"그 거대한 돔도 사라졌네."
N 타워를 감싸고 있던 겅은 돔이 사라지고, 마침내 우리는 굳이 통로를 통하지 않고 남산을 올라 타워에 도착 할 수 있었다. 다른 건물들은 대부분 무너져 있고, 온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지 못했지만 여기는 최현우가 머무르던 곳이라 그런지 아주 깨끗했다.
"엄청 모아두었네요. 이거 봐요."
타워 주변에는 온갖 물자가 한 가득 놓여 있었다. 서울에 있던 물자들이 어디로 갔나 했더니, 좀 괜찮아 보이는 것들은 죄다 여기에 보관 중이었던 모양이다.
"잘 되었네."
안 그래도 이것저것 조금 더 채워넣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게다가, 그냥 물자들만 있는게 아니었다. 장비 같은 것도 보관 중이었다. 지금 장비하고 있는 장비를 바꿔 끼울 정도의 성능이 보장된 건 없었지만, 소모품 중에서는 유용한 것들이 꽤 보였다.
"배낭과 포션이라."
원래 우리가 사용하던 배낭은 하나 뿐이었지만, 이번 기회에 두 개로 늘리는 것도 좋겠지. 거기에 더해서 굳이 포인트를 사용하지 않고도 얻게 된 포션은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다 챙길까요? 아니면 조금 남겨둘까요?"
남겨두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김용천, 포인트 부족해서 눈알도 못 고치고 있던데."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포션이 30개 있으니까. 깔끔하게 10개만 가져가죠."
그렇게 쓸만해 보이는 일용품들을 적당히 확보하고, 새로 얻은 배낭에도 물자를 채운 다음 우리는 타워 안으로 들어섰다.
"조용하고, 깨끗하네요."
그러게, 좋은 곳에 살고 있었구만. 우리는 곧바로 건물을 싹 뒤져보기 시작했다. 장장 5시간에 걸친 작업이었다. 마침내, 제일 꼭대기 층에 마련되어있던, 최현우가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었던 곳으로 사용되는 장소까지 다 뒤지는데 성공했다.
"... 없네요."
약간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은 서지현이 한숨을 쉬었다.
"아니면 뭔가 놓친게 있겠지."
그렇게 당당하게 우리가 자기 계획을 다 망쳤다고 외친 주제에 관련된 메모 하나 없을리가 없잖아. 나는 손거울을 켜놓고 귀를 기울인채 다시 한 번 이 방 안을 뒤져보기 시작했다.
"이중 서랍이라."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책상을 살피다가 그대로 주먹을 휘둘러 책상을 박살냈다. 부서진 책상 안에서 작은 수첩 하나와 둘둘 말린 비접착성 아스테이지가 굴러나왔다.
"뭐하러 숨겨 둔 걸까."
수첩을 펼친 나는 그 내용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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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1. 이 상황은 인류를 끝장내기 위한 일인가?
대답 : X
질문 2. 현 상황을 인류가 스스로 종결지을 수 있는가?
대답 : O
질문 3. 이 상황을 끝내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찾아야 하는가?
대답 : X
질문 4. 이 상황을 끝내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찾아야 하는가?
대답 : O
질문 5. 이 상황을 끝내기 위해 찾아야 하는 물건이, 서울 반경 50km 이내에 있는가?
대답 : O
...
///
그렇게, 무수하게 이어지는 질문과 거기에 대한 대답들. 누구에게 한 질문이고, 왜 대답이 항상 OX 형식인지는 굳이 죽은 최현우를 붙잡고 물어보지 않아도 짐작 할 수 있었다.
"상점의 질문기능."
거기에 이 녀석이 도대체 얼마만큼의 포인트를 쏟아넣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확실한건, 녀석은 상점의 질문 기능을 통해서 서울 주변 50km 안에 현재의 상황을 끝낼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수도권 연합이라는 조직을 만들 생각을 한 건 그 대답을 듣고 난 다음인 것 같다.
거기에는 꽤 많은 질문들이 적혀 있었다. 자기의 포인트만 사용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상점의 질문 기능을 활용한 스무고개를 통해, 녀석은 인류를 배신 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그것 이외에도 이런 저런 정보들을 확보하는데 성공했었다.
"그래서 우리가 망쳤다고 하는 건가.'
조금 억울해 했던 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뭐 빠지게 고생해서 가까스로 이것저것 알아내고 배신의 칼날을 날카롭게 갈고 있었는데, 대뜸 나와 서지현이 와서 이 난장판을 벌여놓았으니까.
"내 알 바는 아니고."
우리에게는 월드 앵커의 위치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다른 건 아무래도 좋다. 이 아스테이지는... 말려 있는 투명한 두루마리를 펼친 나는 픽 웃었다.
"이건 어떻게 써야 하는 건지 대충 알 것 같은데."
나는 근처를 살펴보다가 벽에 걸린 지도를 찾아냈다. 보자... 지도의 왼쪽 구석에 검은색 동그라미 하나가 보인다. 그리고 말려있던 아스테이지의 왼쪽 끝에도 똑같은 동그라미가 하나 그려져 있다. 지도와 아스테이지의 동그라미를 서로 맞춘 상태로 지도를 바라보자, 아스테이지 위에 그려져 있던 정체 모를 선들이 마침내 의미를 가지기 시작한다.
"황해?"
뭐야 이건 갑자기. 여태동안 랜드 마크가 있던 곳은 다 도시였는데 왜 갑자기 바다 한 복판이 튀어나와. 나는 얼굴을 팍 구겼다. 월드 앵커께서는 머무르는 곳도 너절한 랜드마크 따위와는 다르다 뭐 이런 건가.
정확한 위치라고 할 건 없다. 구체적으로 따지면 황해에서도 37.3에 125.2 지점. 그 일대 어딘가에 검은 염소가 머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