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
결착
공격과 방어가 이어지는 중이었다.
녀석의 공격은 이제, 솔직히 말해서 어느정도는 장난 같은 수준이었다. 여기에 맞춰서 놀아주는게 더 힘들 정도로.
내 몸 위로 녀석이 몸에서 줄기줄기 뽑아낸 검은 팔들의 난타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허리를 숙인채로 그 공격을 버티던 나는, 적당히 시간이 지나고 나자 그대로 퍽하고 엎드려서 그 공격을 받아내기 시작했다.
- 으하하하하하하! 죽지 말아라. 죽게 두지 않을테니!
얼마나 좋으면 입에서 침까지 팍팍 튀겨가며 쪼개고 있을까. 녀석의 팔 끝에 달려 있는 작은 곤봉들이 내 몸을 두들기는 감각 속에서 나는 고개를 숙인채 웃었다.
[짐승의 시간 발동]
해보자고. 나는 바닥에 엎드린채 별 모양 장식의 모서리 중 하나를 접었다. 그래도 계속해서 몸을 두들기는 저 구타는 어쨌든 몸에 통증을 전달하니까. 일단은 촉감부터 무력화하자. 이내, 내 몸에서 느껴지던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며 나머지 감각이 고양되기 시작한다.
이전과는 다르다. 짐승의 시간을 훨씬 더 오래, 내가 통제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유지 할 수 있다. 목걸이의 착용만으로도 감각이 훨씬 민감해졌고, 하나 접을 때 마다 그 나머지 감각들은 점점 더 고조되니까.
- 저 년도 슬슬 한계인 모양이군.
보호막으로 몸을 보호한 채 최현우가 쏟아내는 공격을 버텨내던 서지현의 입에서 주륵, 하고 피가 흘러내린다. 나는 절망어린 표정을 짓고 서지현을 바라보다 외쳤다.
"제발, 지현이는 그냥 놔 줘!"
내 말에 녀석이 미친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 사람이 하는 말을 뭘로 들은 거냐! 이제와서 항복한다고 해도 변하는 건 없다. 최종 결정이라고, 최종 결정!
울어야지, 이쯤 되었으면 한 번 울어줘야지. 나는 쉬지 않고 속으로 되뇌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억지로 고개를 들고 녀석을 바라봤다. 여길 좀 봐 주세요, 나 지금 울고 있어요. 불쌍하지 않아?
"제발, 부탁이야. 제발..."
내 말에 녀석은 광소를 터뜨릴 뿐 이제는 대답조차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를 향해 휘둘러지는 공격의 힘은 조금 더 약해졌다. 그리고 보호막을 두른 채로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던 서지현이 나를 바라보고는 울상을 지었다.
"그만해, 뭐든 할테니까. 나는 괜찮으니까, 저 사람만큼은 그만 괴롭혀! 내가, 내가 다 할 테니까. 뭘 원하는 거야. 옷이라도 벗을까? 시키는 건 다 할테니. 더 이상 저 사람은 괴롭히지마... 괴롭히지 말란 말이야!"
- 그거 참 듣고 있기 눈물나는 소리군. 하지만 굳이 들어주고 싶지는 않은데.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데.
녀석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우리를 보며 발악하듯이 호령했다.
- 어차피 네 녀석들은 내 명령에 복종하게 될 거다!
최현우는 서지현의 말을 듣고 비꼬는 것 같은 말을 한 마디 한 다음 내 머리통을 몇 대 후려쳤다. 서지현은 나를 봤다. 목걸이를 접은 것도 확인했겠지.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
- 그럼, 슬슬 시작해볼까. 대가리 안쪽부터 서서히, 의식은 유지한 채 네 몸이 네 몸이 아니게 되는 기분을 만끽해라.
파직, 하고 스파크가 튀는 가느다란 촉수가 녀석의 몸에서 뻗어나왔다.
- 이걸로 귀를 쑤셔주면 아마 좋아서 미칠 걸. 저 년이고 네 놈이고, 똥오줌을 지리며 울부짖어라.
에헤이, 그건 아니지. 받아줄 만한 공격과, 그렇지 않은 공격이 있는데 이건 당해 줄 수 없는 공격이다. 이 점은 서지현도 아마 동의할거다. 다른 굵은 팔들이 구속구로 변한 채 나를 붙들기 위해 달려들었다.
"으아아아아!"
나는 지금 억지로 힘을 쥐어짜내는 중이다. 라는 식의 어필을 충분히 하며 나를 향해 휘둘러진 구속구를 검으로 튕겨냈다.
- 하, 아직 힘이 남아있었나.
나는 검을 바닥에 박고 허억거리며 호흡을 가다듬는 시늉을 한다. 서서히 감각이 밀리는 느낌이다. 하나 더 접어야겠군, 지금 상황에서 미각은 필요없겠지. 나는 모서리를 하나 더 접고 나서 시간을 더 끌기 위해 외쳤다.
"참령, 참령이 필요한 거잖아. 주면 될 거 아니야!"
내 말에 녀석이 으흐흐흑, 하는 소리를 내고 자기 얼굴을 가리고 어깨를 들썩거렸다. 그 상태로 얼마나 있었을까. 녀석이 얼굴을 가리던 팔을 내리고 말했다.
- 이 씨팔 새끼야. 이젠 필요 없어졌어.
녀석의 턱주가리에 달리 눈이 시뻘겋게 충혈한 채 나를 노려본다.
- 필요 없어졌단 말이다! 이 몸이 된 이상, 이제 장비는 사용 할 수 없어!
아하, 절혼의 옵션을 알고 있으면서도 왜 자기 몸을 방어 할 만한 무기 하나 가져오지 않았다 궁금했는데. 안 가져온게 아니라 못 가져온거였냐.
- 네 녀석이 나를 망쳤다. 내 계획, 내 야망, 내가 원하던 자리와 지위. 그 모든 것이, 너로 인해 물거품이 되었어. 세상이 망하기 전에 아무것도 모르며 바닥을 기어다니고, 월급이라는 이름으로 남들에게 자기 몸을 팔아 벌어들인 돈푼으로 오늘 하루 살아갈 걱정 따위나 하던 너 같은 하찮은 새끼가. 내가 그려낸 모든 계획 위에 먹물을 뿌렸단 말이다.
저 몰골로는 참령을 사용 할 수 없는 모양이다.
- 나라고, 언제까지고 그 흉측하기 짝이 없는 눈깔을 섬길 생각이었는 줄 아냐. 난 위대해질 수 있었다. 모두의 위에 군림해 마땅한 자이니. 태어날 때부터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래왔어야 했어.
아하, 배신이라. 저 녀석, 그냥 참령을 챙겨서 자기 주인님에게 바칠 생각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퍼억, 하고 땅에서 솟구친 팔이 내 배를 후려쳤다. 나는 박자에 맞게 몸을 크게 한 번 들썩하고, 그대로 헛구역질을 몇 번 한 다음에 입가를 닦았다.
슬슬, 주변이 흐려지기 시작한다. 짐승의 시간을 발동하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더라.
이제 하나 더 접어야겠는데. 다음은 후각. 나는 다시 한 번 별의 모서리 중 하나를 접었다.
- 너희가 날 망쳤으니, 나 또한 너희를 망치겠다. 나에게 남은 거라고는 이거 말고 없으니까. 네 남은 인생에 목표라고는, 내 미래를 망쳐버린 네 년놈들의 비명소리를 듣는 거 말고는 없으니까!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속으로 웃었다. 남은게 이거 말고 없다라. 내가 그 기분 참 잘 아는데. 너 같은 녀석들이 입에 담을만한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감각 하나 더. 이걸로 네 번째인가. 시각이냐 청각이냐.
고민을 하던 나는 시각을 접었다. 어차피 뭘 접는지는 더 이상 중요한게 아니다. 어떤 걸 접어도 남아있는 하나의 감각을 통해 모든 것들을 파악 할 수 있다.
"지현아, 다 접는다!"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각이 사라진다. 그리고, 남아있는 단 하나의 감각인 청각이 그 이상의 영역으로 발을 딛는다. 서지현의 몸 상태가 들린다. 멀쩡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싸울 여력이 남아있다.
다행이다. 연기 맞았구나.
"끝이야!"
서지현의 외침과 함께 그녀의 손이 바닥에 닿았다. 뜨거운 소리가 들린다. 도로의 아스팔트가 녹아내린다. 거기에서 끝이 아니다. 주변에서 붉은 화염으로 이루어진 사슬이 최현우의 몸을 옭아메는 소리가 들린다.
서지현은 막대한 마력을 쏟아넣어 근처 건물을 폭발시켜, 통째로 무너뜨린다. 건물이 옆으로 기울어져, 최현우에게 쏟아진다.
"으아아아아아!"
그리고, 건물을 구성하고 있던 철근과 콘크리트, 외장재 따위가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고열로 시뻘겋게 녹아내린 건물이 최현우에게 쏟아지는 소리가 들린다.
방심하고 있던 최현우가 비명과 함께 그 녹아내린 덩어리를 뒤집어 썼다.
- 아, 으아아아아! 네 녀석들이!
나는 달리고 있었다. 뇌의 형태와 위치가 청각을 통해 들린다. 머리 안에 들어있다.
바로 앞에 시뻘겋게 녹아내린 콘크리트의 색깔과 뜨거움이 들린다. 하지만 괜찮아.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 녹아내린 액체로 발을 내딛었다. 서지현이 기다렸다는 듯이 내 발이 닿을 예정인 콘크리트를 단단하게 굳힌다.
나는 그 발판을 지지대 삼아 최현우에게 돌진했다. 짐승의 시간을 통해 한도 끝도 없이 강해진 육체는 미친듯이 가속된다. 달리는 몸이 음속을 뛰어넘으려 하고, 곧바로 소리의 벽에 부딪친다. 원래, 이 이상 속력을 내기 위해서는 공기의 벽을 박살내는 항력을 견뎌야 하지만.
프릭션 컨트롤 - 제로.
소리의 벽을 뚫으며 만들어져야 하는 충격파와, 몸이 견뎌내야 하는 항력 같은 건 없었다. 몸에 닿는 마찰이 없어진 내 몸은 저항 없이 현재 낼 수 있는 한계까지 가속한다. 그 사이, 검을 들지 않은 손이 순식간에 지정된 손묘양을 통해 수확자에 쇼크를 휘감는다.
녀석의 심장과 뇌가 뛰는 소리. 코 앞에 있다. 하반신이 녹아내린 건물 속에 잠긴 채, 나를 노려보는 시선이 들린다.
나에게 주어진 공격의 기회.
몸통이냐, 아니면 뇌가 들어있는 머리통이냐.
둘 다 가능하다. 몸을 공격한다면 녀석이 최후를 맞이하기 전까지 약간의 시간이 있겠지. 그러면 아마, 내가 누군지 밝히고 이 녀석의 표정이 구겨지는 모습을 즐길 수 있을거다. 그제서야, 녀석은 이만큼 지독하게 자신을 방해했던 나란 녀석의 정체를 알게 되겠지.
"죽어."
하지만 내 검은 녀석의 머리통을 꿰뚫었다. 그리고, 공기는 빠르게 차가워지는 소리가 들린다. 참령이 박힌 수확자는, 녀석의 머리통을 뚫고 반대편으로 튀어나왔다. 정확하게 뇌의 중심을 꽤뚫는 일격.
- 끄... 어...
녹아내렸던 건물은 다시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녀석은 그 굳어버린 잔해에 하반신을 묻은 채, 머리통이 꿰뚫려 짤막한 신음 한 마디만을 내는데 성공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입가에 미소가 절로 피어난다.
"끝났다."
내 입에서 흘러나온 그 말 한 마디가 내 가슴을 쿵, 하고 떄리는 것 같다. 이걸로 끝이다. 정말로 다 끝났다. 최현우는 죽었다. 녀석의 세포 하나하나에 깃들어 있던 생명이 꺼지는 소리가 들린다. 박살난 뇌가 죽어가며 지르는 비명, 그 여파로 인해 체내의 장기들이 멈추는 소리.
뛰고 있던 심장이 멈추는 소리. 녀석의 몸 안을 흘러다니던 액체가 서서히 느려지다, 이내 완전히 멈추는 소리.
오감으로 느낄 필요 없이, 나는 감각을 초월한 청각을 통해 녀석이 생명이 꺼져가는 순간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조리 느낄 수 있었다.
만족스럽다. 웃음이 흘러 나온다. 서지현과 함께 있을 때를 제외하면, 이처럼 달콤한 소리를 느껴 본 적은 없다. 박아넣은 검을 휘젓는다. 머리 속에 남아있을지 모르는, 아주 약간일지 모를 생존의 씨앗마저 검이 머리 속을 휘젓는 소리와 함께 끝장난다.
"허억, 허억..."
녀석의 가슴에 발을 올리고, 그대로 밀어 머리에 박힌 검을 뽑아냈다. 쑤욱, 하고 뽑혀나온 검. 모든게 죽었다. 녀석의 몸을 이루고 있던 모든 것이. 그제서야 나는 다시 접어놓았던 목걸이의 모서리를 모두 펼쳤다.
닫혀있던 네 가지 감각이 다시 돌아오고, 한없이 고양되었던 청각은 다시 원래의 수준까지 끌어내려진다.
"지현아, 지켜줘."
[짐승의 시간 종료.]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짐승의 시간을 종료했고, 서지현이 곧장 나를 끌어안고, 근처의 건물 위로 대피했다.
"살아날 기미는 없어요."
"그럼, 당한 무기가 그냥 무기가 아닌데."
당하면 살아날 방법이 없는 무기다. 그리고, 그 무기가 어중간하게 몸통 이딴 곳에 처박힌 것도 아니고, 제대로 뇌를 휘저어놓았다. 다시 살아날 수는 없다.
"깔끔하게 보내버렸네요."
나는 서지현의 부축을 받으며 대답했다.
"너한테 말했잖아."
막상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다가왔을때는, 약간 욕심이 생겼었다. 지금 당장 죽이는게 아니라,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내 안에 쌓여있던 울분을 전부 토해내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서지현과 했던 이야기가 있다. 서지현은 그걸 약속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약속이었다.
"잘했어요.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겠답시고 어설프게 공격하는 건 바보같은 일이잖아요."
그래, 바보 같은 일이다. 최현우도 그냥 우리를 떄려 죽이겠다는 일념 하에 싸웠으면 우리가 이기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결국 녀석은 쉬운 길 대신 어려운 길을 택했고, 결과는 저거다.
"엄청나네, 괜찮은거 맞아?"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저으며 힘없이 웃었다.
"사실, 지금 기절 할 것 같아요."
그렇겠지. 건물 한 채가 통째로 녹아내려 쏟아진 광경은 흉악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그 녹아내린 건물을 뒤집어 쓰고 죽은 최현우의 시체 또한 끔찍하기 그지 없었고. 그런 결과를 낼 정도라고 하면 서지현의 몸에도 굉장한 부담이 가해졌을테니.
[레벨업 하셨습니다.]
주르르르륵, 떠오르는 메시지. 최현우는 강했고, 나와 서지현은 최현우를 죽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대가는 깔끔했다. 한 번에 13개의 레벨 업. 그리고, 이 문자가 떠오르고 나서야 비로소 최현우의 죽음을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