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래서 나는 탈옥했다-171화 (171/237)

# 171

결착

로브로 숨겨두었던 녀석의 팔이 들어올려진다. 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로브가 찢어졌다.

"하, 저건 팔이라고 할 수도 없겠는데."

그냥, 검은 진흙덩어리가 대충 팔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을 뿐이다. 유치원생이 찰흙가지고 장난치면 만들어 질 법한 너절한 모양. 그리고, 그 진흙이 혼자 꿈틀거리더니, 그대로 거대한 칼의 형태가 된다.

퍼석,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이 딛고 있던 땅이 푹 꺼졌다. 바람을 가르는 매서운 소리와 함께 녀석이 내 쪽으로 달려든다. 아니, 정신을 차려보니 코 앞에 있다.

"젠장..."

내뱉은 문장을 끝낼 엄두가 나지 않는다. 녀석의 팔과 내 검이 격돌했다. 수확자의 칼날이, 녀석의 손이었던 무언가에 약간의 상처를 남긴다. 녀석의 상처에서 흐르는 건 피가 아니었다.

"크으."

- 으아아아아아! 죽어라 이 새끼! 네 녀석 때문에, 네 놈 떄문에 다 끝났다. 모든게 끝났어!

녀석은 그렇게 외치면서 팔에 힘을 넣고, 내 몸이 허공으로 확 튕겨져 나갔다. 이대로면, 나는 주먹을 두 번 쥐어서 보호막을 만들어냈다.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건물의 콘크리트에 내 몸이 처박힌다. 금이 간 콘크리트가 무너져 내린다. 녀석이 쉬익 쉬익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린다.

"쿨럭."

기침과 함께 입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 아, 으아아아아!

쑤욱, 하고 녀석의 몸에 팔 세 개가 더 솟아나온다. 하나같이 시커멓고, 하나같이 사람의 팔이 할 만한 형태가 아니다. 사실, 정말 팔이 맞는지도 확신 할 수 없다. 솟아난 팔 중, 석궁의 형태를 하고 있는 팔이 건물 벽에 처박힌 나를 겨눈다.

투웅, 하는 소리와 함께 나를 향해 석궁의 볼트가 날아온다. 말이 볼트지, 사실 상 집 대들보라고 해도 놀라지 않을 정도의 굵기. 심지어 끝도 뾰족하지 않고 뭉툭하다.

"이건 안되겠는데."

마르골리스라고 했나. 도대체 저 녀석에게 뭘 한 거야. 나는 황급하게 몸을 옆으로 피했다. 나를 노리고 날아간 거대한 검은 기둥이 건물에 처박힌다. 구구궁,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충격을 버티지 못한 건물이 먼지를 푹푹 뿜어내며 무너지기 시작한다.

몸뚱아리에 아다만티움이라도 주입한 건지, 검게 물들어 있는 녀석의 팔은 더럽게 딱딱해서 기껏해야 생체기 정도 말고는 낼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녀석의 몸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고, 기스가 났다는 것도 변함이 없지.

절혼은 발동할 것이다.

12대. 방금 전에 살짝이나마 상처를 입히는데 성공했으니 이제 11대 남았다.

그런 생각과 함께 자세를 바로잡는 와중, 서지현의 몸에 녀석의 팔이 변형되어 만들어진 망치가 때려박히는게 눈에 들어온다. 죽지는 않았다. 찌징,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그녀가 항상 착용하고 있던 케이프가 작살나버린다.

- 흐흐, 흐흐흫. 별 것도 아닌 새끼들이.

녀석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나와 서지현을 바라본다.

- 뇌를 휘저어 주지. 정신은 유지한 채, 몸의 자유만을 빼앗겠어. 저 계집년의 똥구멍에 오물을 한 가득 채워넣고, 국기봉 꼭대기에 가랑이를 박아넣어주지, 돼지새끼처럼 꽥꽥 거리며 똥을 부리는 꼴이 볼만하겠군. 네 놈은 그 앞에서 엉딩이에 구두를 쑤셔넣은 채 암컷 돼지와 교미하며 울부짖어라.

상상력 한 번 추잡하기 그지 없네.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으려는 것 같은데. 눈, 코, 귀, 입이 저렇게 자유 분방하게 붙어 있어서는 도저히 표정을 읽을 길이 없다.

- 기대되는군, 네 녀석들에게 하고 싶은 일이 참 많으니!

녀석은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충혈된 눈으로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정면에서 싸우면 조진다. 입가에 흘러내리는 피를 훔친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했다.

"뭐어, 언제부터 쉽게 싸웠다고."

생각해보면 이 정도의 전력 차이는 이전에도 몇 번 있었다. 신중해야 한다. 내가 알던 최현우가 아니다. 괄목상대라는 고사성어는 이럴 때 써야겠지.

- 아하하하하, 너절한 자식들. 열등한 버러지 같은 녀석들이 깝치고 나댈 때 부터 이런 최후를 각오했었어야지! 죽지 말라고, 아니... 죽이진 않으마 살려둬야 가지고 놀 수 있을테니까! 내가 그 동안 받은 고통의, 십분의 일이라도 느껴봐!

자기가 겪은 고통의 십분의 일이라. 나는 고개를 숙인채 히죽 웃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병신 같은 새끼."

십분의 일 같은 소리 하네. 쉬익 하고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공격을 살펴본다. 결정적인 순간에 힘을 뺀다.

몸에 달린 석궁을 통해 날린 기둥, 휘두르는 망치와 몽둥이. 정작 한 손을 예리한 대검으로 바꾼 주제에 그걸로는 거의 공격을 하지 않고 있다. 생포라도 해보겠다는 건가. 설사 그런 생각이라고 해도 자기 입으로 나는 너희를 이 자리에서 죽이지 않겠다고 공언할 필요는 없었을텐데.

어쨌든 저 녀석이 사용하는 건 자신의 몸이다. 참령을 끼워넣은 수확자로 방어하게 된다면, 녀석의 몸을 참령으로 때린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12번의 공격을 막아내는데 성공하면 곧바로 절혼이 발동할거다. 나는 그냥 얌전히 저 녀석의 공격을 막는데 집중하면 된다.

한 번, 두 번...

공격이 이어지고, 그 공격을 막아낸다. 그렇게 횟수가 11번 채워진다. 그리고 다가오는 마지막 공격. 나는 속으로 웃으면서 녀석의 공격을 향해 검을 가져갔다.

"?!"

팔과 같은 무언가에 이어져 있던 거대한 몽둥이가 꿈틀거리며 휘어진다. 정확히, 내가 휘두른 수확자가 닿을 예정이었던 부위가 움푹하게 휘어진다. 수확자의 칼날이 허공을 가른다. 이건 못 막았다. 나는 급하게 한 손을 들어올렸고, 머리통을 노리고 있던 몽둥이가 팔뚝 위에 때려박힌다.

팔에 지끈거리는 통증이 달리고 몸에 옆으로 쭉 밀려난다.

- 눈치채지 못할거라 생각했냐. 머저리 같은 놈.

아, 절혼에 대해서 알고 있었냐. 그럼 미리 말이라도 해주지 그래. 사람 기대하게 만들고 있어. 알고 있다면 어쩔 수 없지. 12번을 전부 때려맞추는 건 힘들다. 분명히 이 녀석은 나보다 빠르고, 힘도 강하니까. 가지고 있는 단점이라면 우리를 이 자리에서 죽일 생각이 없다는 것 정도.

- 이 년, 이 년! 으하하하하핫!

그 사이에도 등줄기에서 돋아난 거대한 촉수가 서지현을 향해 마구 휘둘러지고 있다. 방어막과 에노테르를 이용해 그 공격을 막아내는 서지현의 모습이 상당히 위태롭다.

"지현아!"

내 외침을 들은 서지현이 휘둘러지는 촉수를 피해가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 하, 모여주면 나야 편하지.

녀석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바닥으로 손을 내려찍었다. 드드등, 하는 소리와 함께 땅이 진동하며 녀석의 손이 땅 아래로 들어간다. 나는 그걸 확인하고 곧장 땅을 향해 있는 힘껏 주먹질을 했다. 도로가 박살나며 먼지가 일어났다. 이제... 할 말을 해야지.

"딱 목숨 보전할 정도로만 싸우자. 적당히 당해주면서, 지친 척 연기를 하는거야."

내 말을 들은 서지현이 질문을 던졌다.

"이유가?"

"어차피 따지고 보면 한 방 승부야. 저 녀석은 우리를 생포할 생각이고."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면, 거기 맞춰 조절하기 시작할 거다. 어차피 지금 저 녀석은 자신이 우리를 압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렇게까지 틀린 생각도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어차피 참령을 딱 한 번, 제대로 꽂으면 그걸로 끝이다. 녀석이 우리보다 강하고 약하고는 중요하지 않다.

"대충 이해했어요. 어디 한 군데 날아가는 식의 커다란 피해만 입지 않고, 일부러 현재 상태보다 더 지친 태도를 보이면."

녀석이 알아서 힘을 조절하기 시작할거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갑자기 확 하고 힘을 끌어올려 제대로 한 방 먹이는데 성공하면 된다.

"적당한 상황이 되면 짐승의 시간을 쓸 거야. 내 목걸이를 잘 살펴봐. 짐승의 시간을 사용하면 목걸이를 접기 시작할거야. 그리고, 모서리 네 개를 다 접으면 바로 시작하자."

어차피 한 방으로 끝내야 한다. 그리고 크게 한 방을 준비하는 건 역시 짐승의 시간 만한게 없지.

"좋아요, 상황이 된다면 제가 최대한 구속할게요."

대화가 끝나고, 퍼퍼벅 하는 소리와 함께 우리 주변의 땅 아래에서 짙은 광택을 뿌리는 촉수들이 솟구치기 시작한다.

- 죽기 전에 유언이라도 하는 중이었나? 그럴 필요 없어. 네 년놈들은 아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테니.

사방에서 솟구친 촉수들이 그대로 우리를 덮쳐온다. 그대로 그물처럼 포박할 생각이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다소 유리한 점이 하나 더 있다. 밀려오는 촉수를 향해 검을 휘두르자, 재빠르게 최현우가 뻗어진 촉수의 형태를 변형해 참격을 피한다. 나는 그 틈을 노려 서지현과 함께 포위망을 피했다.

지금 한 방이라도 더 맞으면 최현우는 죽는다. 다시 절혼의 카운트다운이 초기화 되기 전까지는, 저 녀석은 무조건 수확자와의 접촉을 피해야 한다.

무슨 생각을 하며 맨 몸으로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참령의 효과를 대충이나마 알고 있으면 최소한 무기라도 챙겨오지 그랬냐. 포위에서 벗어난 우리는 다시 흩어졌다.

적당한 공격은 그냥 맞아준다. 그냥 맞아주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연기를 해야 한다. 이게 아파서 견딜 수 없고, 나는 지금 죽을 것 같은데 니가 무서워서 억지로 싸우면서 시간을 끌고 있다. 이대로 조금만 더 한다면 힘들어서 죽어버리고 말 것이다.

연기, 연기.

그냥 하면 안된다. 그래도 한 동안 적절하게 맞서 싸우는 시늉을 해줘야 한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최대한 힘을 아끼면서.

한 10분 정도 그렇게 싸움을 이어가던 나는 일부러 서서히 호흡을 거칠게 만들고 몸에서 힘을 약간 풀었다.

- 뭐하고 있나?

나를 향해 휘둘러진 거대한 몽둥이. 엄살을 부릴 기회라면 지금 이 순간이 딱 좋은데. 그렇다고 저걸 그냥 맞아 줄 수는 없지.

"젠자앙!"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보호막을 만들었다. 몽둥이가 보호막을 박살내고 나를 향해 덮쳐온다. 저 정도의 힘과 속도라면 그냥 맞아줘도 괜찮다. 큰 피해는 없다.

보호막이 부서지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현기증이라도 온 것처럼 몸을 비틀거렸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내 몸을 몽둥이가 후려친다.

몽둥이에 맞은 나는 신음소리와 함께 필요 이상으로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바닥을 구르던 나는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어나 입가를 훔치고 숨을 몰아쉬다가, 우욱 하고 구역질 하는 시늉을 했다.

- 뭐냐, 벌써 지쳤나? 재미없는 녀석.

나는 그 말에 후욱 후욱 하고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개소리 하지 마, 이제부터가 진짜야."

나는 대답을 하는 와중에도 빠르게 주변의 퇴로를 살피는 것 같은 행동을 보였다. 녀석이 그런 나를 보고 좋아 죽겠다는 듯이 음산한 웃음을 흘렸다.

- 그런 거 치고는 주변을 살피는 눈초리가 복날 개새끼가 도망칠 구석 찾는 것 같군.

그래 보이냐? 기뻐라.

"커흡, 우웨에..."

서지현이 그런 소리와 함께 석궁이 날려보던 거대한 나무기둥에 얻어맞은 다음 창백한 얼굴로 몸을 살짝 떨며 입을 막았다. 저거 연기 맞는 거지?

서지현이 배에 나무 기둥을 한 대 맞고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다시 몇 가닥의 촉수들이 서지현을 향해 휘둘러지고, 그 공격은 서지현이 위태롭게 피했다. 다행이다. 어떻게든 피할 걸 보니 연기가 맞긴 한 모양이다. 그리고, 최현우의 얼굴에 비치는 희열.

- 뭐 하고 있는거냐! 접근조차 못하고. 그때처럼, 내 앞에서 깝쳐 보란 말이다!

녀석이 근처 건물에 손을 뻗더니, 그대로 벽을 뜯어내 내 쪽으로 집어 던진다. 좋아, 잘 되어가고 있다. 직접 공격하지 않고, 대신에 콘크리트 덩어리를 집어 던졌다. 당연히, 그 힘과 파괴력은 월등이 떨어진다. 이걸 맞고 아까처럼 반응한다면 수상하게 생각할거다. 나는 보호막으로 몸을 보호한 채 인상을 팍 썼다.

그리고 약간 뒤로 밀려다는 편이 좋겠지. 프릭션 컨트롤로 발에 가해지는 마찰력도 약간 줄이고.

"으아아아!"

보호막에 콘크리트 덩어리가 떄려박히고, 마찰력이 약해진 몸이 뒤로 쭉 밀린다.

콘크리트는 보호막을 뚫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지친 표정으로 녀석을 바라봤다.

- 흐흫, 뭐야. 고작 이런 녀석들이었나. 이런 녀석들 때문에,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했단 말이지?

"지랄하지마 이 새끼야. 아직 승부 안 끝났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나는 한쪽 팔을 부여잡고 몸을 약간 숙인채 녀석을 노려봤다.

- 그런가? 나는 어쩐지 알 것 같은데.

아 그래? 참 신기하네, 사실 나도 승부가 어떻게 날 지 알 것 같거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