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래서 나는 탈옥했다-169화 (169/237)

# 169

결투

우선은 위치를 파악한 것으로 만족하자. 이 이상을 노리는 건 안될 말이니까.

"어때요?"

"남산 제 2호 터널 500m 즈음에 N 타워로 향하는 통로가 있어. 그리고, 그 안에는 최현우와 함께 마르골리스의 분신이 있었고."

내 말에 서지현이 눈을 감고 자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골치 아프게 되었네요. 그 안에서 뭘 하고 있는 걸까요."

나는 서지현의 말에 대답했다.

"최현우의 몸이 재구성 되고 있는 것 같았어. 이미 몸의 30% 정도는 인간이 아니야."

내 말에 서지현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르멩은 어디에서 뭐 하고 있나. 우리도 그런 거 좀 해주지."

글쎄다.

"그렇게 즐거운 경험은 아닌 것 같던데. 애가 아주 아파서 죽으려고 하더군."

내 말에 서지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귀한 집에서 하고 싶은거 다 하면서 살던 또라이 재벌 3세잖아요. 책 페이지 넘기다가 종이에 손가락 베이면 어린애처럼 징징거릴걸요."

그것도 맞는 말이다. 원래 남 아픈 거 모르고 멋대로 구는 녀석들이 자기가 아프면 죽으려고 하니까.

"부작용이 없어 보이지는 않던데. 뭔가가 녀석의 몸을 갉아먹고, 사라진 살점과 피, 내장 같은 것이 다른 걸로 갈아끼워지고 있었어."

제르멩은 우리에게 우호적인 걸로 판명났다. 당당하게 자기와 계약한 최현우를 노예로 칭하는 마르골리스와는 달랐으니까. 제르멩이 우리의 몸을 뜯어고치려 들지 않았다면, 분명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최소한, 지금까지 녀석의 행보를 보면 우리에게 해가 될 만한 일을 하지는 않았으니.

"고치 부수고, 돌아가자."

청각을 확장시키면서 파악한 것은 남산 뿐이 아니었다. 나는 서지현과 함께 주변을 돌아다니며 찾아낸 고치들을 파괴했다. 파악해 두었던 고치들 중에 마지막 녀석을 박살낸 나는 흘러내리는 체액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이 상황에서는, 최현우에게 뭔가를 하기는 힘들 것 같아."

꼼짝없이 마르골리스가 최현우를 다 뜯어고칠 때까지 손가락을 빨고 있어야 한다. 지금 당장 마르골리스와 싸워서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는 없으니. 그리고, 다 뜯어고치고 난 최현우는... 모르겠다, 프리저도 몸의 일부를 기계로 바꾼 다음에는 더 강해졌잖아.

"강해진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 기다려야 한다니."

서지현이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말이다. 강해지는 걸 알면서도 그냥 있어야 한다는 것도 또 고역이다.

"저 녀석이 계속 남아있으면 어떡하죠."

마르골리스? 나는 서지현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남아있다과 해도 상관없어."

우리가 서울에 있다는 사실을 알면 최현우가 알아서 기어나올 것이다. 뭘 하고 있는지 모를 때는 N타워로 향하는 통로가 있는 남산 터널을 끼고 다른 생존자들이 버티는 사이 안에 들어가서 끝장을 낼 생각이었지만, 자의건 타의건 지독한 고통을 이겨내고 강해진 최현우가 우리가 서울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두지는 않을거다.

"녀석이 우리를 먼저 찾아온다면 마르골리스가 끼어들 수는 없을거야."

눈 앞에 있는 제르멩을 씹어먹을 듯이 굴면서도 어쩌지 못했었다. 녀석들 사이에 있었던 나름의 협약이라는 건 그 정도의 구속력이 있는 모양이다. 우리가 먼저 최현우에게 시비를 걸어도 마르골리스가 딱히 할 일이 없을텐데, 심지어 최현우가 직접 찾아와서 우리에게 시비를 건다면 마르골리스가 간섭 할 수는 없다.

그때처럼 직접 나서는 건 한 번이 끝이라고 제르멩이 말했으니까. 서지현이 머리를 벅벅 긁다가 땅을 신발코로 툭 차고 말했다.

"다 좋은데. 문득 든 생각이 있어요. 저 녀석들이 여기로 넘어올 때 나름의 협약을 맺었다고 했죠."

제르멩이 그런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있다. 그 때문에 그냥 하늘에서 슝슝 떨어져서 지구별을 싹 쓸어버리는 대신 랜드 마크가 생기고, 구역이 생기고,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상점을 활용하고 레벨업을 해서 능력치를 강화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서지현이 하려고 하는 말도 알 것 같다.

"그 누군지 모를 지구별의 수호자는 도대체 뭘 하고 있냐?"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 도리가 없지."

나중에 또 제르멩을 볼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아니, 분명히 몇 번 더 보게 될 거다. 아마, 그때 녀석에게 물어보면 대충이나마 대답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마르골리스가 협약을 맺어야 했다는 건 분명히 그 협약을 맺은 상대도 마르골리스만큼 강하다는 소리인데. 정작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건 제르멩이지, 마르골리스와 협약을 맺은 것으로 추측되는 지구별의 수호자가 아니다.

일단, 그런 의문은 조금 뒤로 미루어 두고.

"근처를 싹 뒤져봐야겠어."

성남, 안양, 서울. 여기 저기를 싹 뒤져보면 분명히 아직 남아있는 던전 따위가 있을거다. 상대가 몸을 뜯어고쳐가면서 강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아무것도 안하고 있을 수는 없잖아. 최현우를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려면, 레벨업과 함께 포인트로 스킬을 강화하거나 새로 구매하는 방법 말고는 없다.

"레벨업은 충분히 가능할 거에요. 어차피 수도권 연합에 붙어있던 도시는 남아있을테고, 각 도시에는 지부장이 남아있을테니까."

사람을 죽여도 레벨업 할 수 있다. 실제로, 수원에서 서울에 이르기까지 전투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최현우가 만들어낸 괴물에게서는 경험치를 뜯어낼 수 없었지만, 맞서 싸운 최현우의 졸개들을 죽이면서 경험치를 얻을 수 있었으니까.

안양, 성남, 안산의 지부장은 우리가 죽인게 아니라 경험치를 받을 수 없었지만... 다른 도시의 지부장들은 우리가 직접 잡아 죽였을 때 상당한 양의 경험치를 확보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서, 근처에 있는 던젼 따위도 찾아낸다면 클리어 하면서 포인트를 얻을 수 있고.

"며칠이나 시간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시도는 해봐야 한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진행해야 한다. 레벨업 하겠다고 돌아다니다가 너무 지쳐버리면 갑작스럽게 깨어난 최현우를 상대하기 힘들테니.

"어쨌든, 굳이 성남의 생존자들이 남산 터널을 끼고 있을 필요는 없겠네요."

그래. 최현우가 하고 있는 일이 뭔지 알았으니까. 우리가 녀석을 찾아가지 않아도 지가 올 거다.

"우린 우리가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하면 되는거야."

이후 방향을 잡은 나와 서지현은 다시 성남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

- 나약한 녀석.

마르골리스는 분신을 통해 전신이 뜯어고쳐지고 있는 최현우를 바라봤다. 최현우의 눈에서 빛이 많이 흐려져 있었다. 그 전까지 그렇게 울부짖었건만, 이제는 제대로 신음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초점 잃은 눈으로 힘겨운 숨을 내쉴 뿐이다. 그렇다고 몸을 타고 흐르는 고통이 약해진 건 아니라서, 여전히 몸은 쉬지 않고 경련하는 중이다.

한계에 달했다.

육체가 아니라 정신이. 육체는 무한히 뜯어 고칠 수 있지만, 정신은 그렇지 못하다. 최현우가 감당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가 한계다. 더 이상 했다가는 몸은 성해도 정신이 망가진다.

- 한계라. 남들이 한계에 달하는 모습을 그렇게 보고 즐기던 녀석의 한계가 정작 이렇게 낮다니.

웃기지도 않는 일이다. 그렇게 남들을 한계까지 몰아붙였던 사람이, 정작 자신의 한계치가 이렇게 낮다니.

"커... 허... #$^^[email protected]##"

허공에 붙들린채 온몸에 먹혀 들어가고, 그 빈 자리에 새로운 살점이 차오르고 있던 최현우의 입에서는 사람의 언어라고 생각 할 수 없는 단어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한다. 문장도 아니고, 단어도 아니고. 더 나아가 애초에 언어라고 할 수도 없는 절규와도 같은 형언 할 수 없는 무언가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다른 말로는, 한계에 도달했다는 뜻이다.

- 머저리 같으니라고.

43%. 어중간하기 짝이 없는 수치가 최현우의 정신이 버틸 수 있는 고통과 공포의 한계였다. 이걸로 성공 할 수 있을까.

마르골리스가 생각했던 최고 수치를 성공한다면 최현우는 제르멩이 계약한 년놈들을 이길 확률이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지만 43%? 이건 어중간하기 그지 없는 수치다.

약 53%의 확률로 최현우가 두 년놈들을 이기지만, 47%의 확률로 패배하게 된다.

-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구나.

허공에 떠 있는 마르골리스의 분신,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눈동자가 불쾌하다는 듯이 동공의 축소와 확장을 반복한다. 차라리, 제르멩이 두 년놈을 찾아내기 전에 마르골리스가 먼저 찾아냈더라면. 그랬다면 지금과는 조금 다른 상황이 펼쳐질 수 있지 않았을까.

가정은 의미 없는 일이다. 이미 일어난 일을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은 마르골리스가 한참 과거에 깨달은 진리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만약이라는 가정을 지울 수 없었다.

이 녀석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약을 맺고, 최후의 최후까지 자신이 돌봐줘야 하는 녀석이다. 그 대가로 녀석이 바쳗야 하는 것은 무한한 충성. 그 계약의 굴레가 마르골리스를 얽메고 있었다.

- 제르멩의 선택은 틀렸다.

마르골리스는 자신의 선택을 옹호하는 것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군림한다. 그는 지배한다. 모든 추악한 집념과 음습한 욕구, 더럽고 사악한 의도를 바라보는 자. 만마의 군림자. 공포의 뿌리.

- 메마른 나무가지를 스치는 바람이 내는 스산한 소리, 드리워진 공포의 그늘 너머에서 지켜보는 자.

그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비록 최현우의 부족함이 보인다고 하지만,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선택을 부정하지 않는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승리하리라. 미덥지 않은 최현우를 바라보며, 마르골리스는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최현우가 머리를 마구 흔들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확인한 마르골리스는 곧바로 개조를 중단했다.

"커허.. 크흑..."

최현우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냥, 그렇게 신음 소리만 흘릴 뿐이었다. 그 정도로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불어놓은 것은 자신의 일부, 이겨내야 하는 상대가 제르멩의 졸개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 녀석은 너무 아는게 많아.

그의 지식은 자신을 앞선다.

제르멩은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했다. 가끔, 새로운 예술품을 가져왔을 때 평가를 해주면 녀석이 보이는 표정은 어쩔 수 없는 상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나마, 마르골리스가 그의 예술 세계를 이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자였으니까. 하지만, 여기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녀석은 변절했다.

지독한 배신자다. 괘씸한 반동분자다.

한 하늘 아래에 같이 설 수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 질퍽거리는 소리와 함께 눈을 뜬 최현우가 자신의 몸 상당 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검은 진흙을 멍하니 바라봤다. 지금 그가 바라보고 있는 손은 그의 손이 아니다. 질퍽거리는 검은 진흙이 가까스로 손의 형태를 구성하고, 다시 무너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문둥병자 같은 모습.

- 너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을 주었다.

최현우의 입에서 고맙다는 말이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 잠깐 사이에 겪어야 했던 고통은 영원같았고, 그로 인해 뜯어 고쳐진 모습은 추악하기 그지 없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이거면, 이길 수 있는 겁니까?"

반드시 이길 수 있다면, 몸의 형태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최현우의 말에 마르골리스가 대답했다.

- 확언 할 수는 없다. 네 녀석이 견뎌내지 못했기 때문이지. 하지만, 승산은 높아졌으리.

그럼 도대체 뭘 위해서. 승리가 확실시 되지 않는다는 건, 이전과 크게 달라진 점이 없다는 뜻이다. 절대적인 강함의 수치가 문제가 아니다. 세상은 언제나 상대적이다. 그 두 년놈보다 강해졌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마르골리스가 돌려준 대답은 실망스럽기 그지 없었다. 최현우는 눈을 꾹 감고 몸을 부르르 떤 다음 말했다.

"알겠... 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