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
결투
거기에는 제르멩이 공중에 떠 있는 끔직한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화 나누는 건 또 간만이군."
- 배신자 녀석. 나는 너를 믿었다. 하지만, 결국 너는 이런 상황에서 이런 모습으로 나와 대치하는군. 한때나마 너를 친구라고 생각했던 내가 어리석었지.
분노에 찬 목소리와 함께 대기가 덜덜 떨린다. 서지현을 공격하던 괴물들은 모든 행동을 멈추고, 괴로움에 몸부림치기 시작한다. 저 목소리 안에는 도대체, 얼마나 강대한 힘이 담겨있는 걸까. 방금 전 경험했던 찰나의 시간 만으로도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눈을 뽑아버려 들게 만들 정도의 공포.
"뭐, 자네는 항상 어리석은 판단을 하는 편이었지. 하지만 괜찮아, 그런 점이 또 귀엽잖아. 백치미라고 하던가. 약간 띨빵해서 귀여운 매력?"
- 닥쳐라!
나와 서지현은 보호 받고 있었다. 하지만, 주변의 괴물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녀석들이 괴성을 지르며 몸을 떨다, 그대로 자해를 하기 시작했다. 괴물들의 표정을 읽는 건 본디 불가능했어야 하지만, 지금만큼은 녀석들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명확히 이해 할 수 있었다.
불가해한 공포. 귀신을 보고 느끼는 공포도 아니고, 살인마를 보고 느끼는 공포도 아니다. 순수한 공포 그 자체. 눈 앞의 눈동자는 그런 힘을 가지고 있었다.
"본론만 말하지, 친구."
모자로 가려진 제르멩의 눈이 음산한 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녀석의 시선이 최현우에게로 향하자, 그대로 최현우가 비명을 지르며 자기 머리를 감싸쥐고 덜덜다가, 이내 비명소리를 멈추고 숨을 몰아쉰다.
"저 녀석이 자네가 새로 뽑은 노예인 모양이지?"
- 그리고 저 녀석들은 자네의 노예이겠고.
제르멩이 으음, 하는 소리를 낸다.
"난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해서 말이야. 후견인이라는 표현이 어떨까?"
제르멩이 말을 마치고 지팡이로 땅을 한 번 강하게 찍었다.
"어쩄든, 내 피후견인들이 자네에게 직접적으로 시비를 건 상황이 아니지.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건, 자네는 내 피후견인들을 공격할 의도가 잇었다는 뜻이군. 그렇다면, 표식을 찍어준 나로서는 해당 행위는 인정 할 수 없겠는데. 넘어오면서 서로 맺었던 협의 사항을 잊지는 않았겠지?"
- 약아 빠진 새끼, 그런 식으로 악용하라고 합의한 사항이 아니었거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협의는 협의라네."
- ...
"뭐 하는 겁니까, 저 녀석과 그 뒤에 숨어 있는 년놈들을!"
- 닥쳐라. 네가 지금까지 숨을 쉬고 있는 것이 누구 덕분인 줄 알고.
그리고, 다시금 최현우가 자기 머리를 거머쥐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머리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눈의 실핏줄은 전부 터지고, 코에서는 코피가 줄줄 흘러내린다. 그 뒤에, 희미한 기운이 녀석의 몸을 감쌌다. 그제서야 최현우가 다시 숨을 몰아쉬며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래서, 이제 계속 싸우면 되는 건가?'
내 말에 제르멩이 아하, 하는 소리를 냈다.
"그게 말이지. 약간은 복잡하다네."
- 나는 너희들의 제르멩과 계약한 사실을 몰랐다. 상대의 계약을 인지하지 못한 상황에서 계약한 노예를 보호하기 위해서 온 경우, 녀석이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받는 가장 가까운 장소까지 이동 시킬 권리가 있지.
그게 뭐야. 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제르멩을 바라봤다.
"사실이야. 그렇게 정해놓았으니까. 원래 이 세상으로 넘어온 우리는 서로서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거라고 가정했으니까. 만약에 계약자들 사이에 분쟁이 생겼을 때를 대비한 일종의 구제책이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저 새끼가 우리가 표식을 받았다는 사실을 몰랐을리가 없잖아.
내 말에 제르멩이 한숨을 쉬었다.
"원래 계약이라는게 다 그런 거 아닌가. 몰랐다고 주장하고, 그를 반박할 만한 증거가 없다면 어쩔 수 없는거야. 그래도 너무 화내지는 말라고. 이걸로 확실하게 내 친구는 자네와 저 친구의 계약자 사이의 싸움에 끼어들 명분이 없어졌으니."
그래, 지금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다음번에 또다시 우리로 인해 최현우가 궁지에 몰리면 그때는 저 끔찍한 눈알로서도 방법이 없을거다.
어쩔 수 없이, 이번 경우에는 강제휴전이라는 건가. 그렇다고 제르멩에게 뭐라고 하는 것도 웃기다. 제르멩이 오지 않았으면 나는 분명히 스스로 눈깔을 뽑아낸 다음에 자살했을거다. 나는 물론이고, 서지현도 마찬가지겠지. 이 상황에서 고집을 부리는 건 물에 빠진 사람을 가까스로 구해놓고 인공호흡 시켜서 살려놨더니, 성추행이라고 고소하는 것 만큼이나 양심없는 일이다.
"최소의 안전 보장을 위한 가장 가까운 장소라고 했지."
저 공포의 눈알이 최현우를 옮기는 장소는 최현우가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있는 장소다. 그렇다면 분명히 남산이리라.
멀리 가는 건 아니다. 그리고,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 최현우가 도망치게 된다면 우리도 곧장 목동으로 향할 수 있다.
"처망할. 어차피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지금 최현우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다. 눈의 실핏줄은 다 터지고, 현기증이라도 오는 건지 몸을 비틀비틀 흘리며 코피와 침을 줄줄 흘리고 있으니까. 죽일 수 있다면 지금이 기회일텐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냥 보내줘야 한다니.
"아... 으아..."
최현우의 신음소리다 저거 아무래도 맛이 간 것 같은데. 정상이 아니잖아. 저 입에서 침 질질 흘리는 거 보라지. 최현우의 몸이 늪으로 변한 그림자 속으로 가라앉아 사라진다. 그 장면을 보던 제르멩이 입을 열었다.
"만나서 반가웠네, 마르골리스. 또 볼 수 있으면 좋겠군."
- 닥쳐라. 계획한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네 녀석을 찾아내서 직접 결판을 낼 테니. 마련된 파티장의 명단에 더 이상 네 이름은 없음을 알아라.
그걸로 끝이었다. 순간적으로 뻥 뚫려있던 맑은 하늘에 다시 먹구름이 밀려들고, 비가 쏟아진다. 제르멩은 어디에선가 우산을 꺼내서 쏟아지는 비를 막았다.
"그래서, 내 친구를 본 첫 인상은?"
"공포."
그것도 소름끼치는 공포였다. 나는 두려운게 없다 하하하! 따위의 자기 최면으로 이겨 낼 수 있을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내 말에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월드 앵커인 검은 염소를 상대하게 된다면, 저 정도는 아니겠지만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될 걸세. 압도적으로 억눌리는 감각. 물론, 저 정도로 강하지는 않겠지만."
제르멩의 말을 들은 서지현이 몸을 살짝 떨었다.
"이길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확 떨어지는데요."
"그런 말하지 말라고. 결국 압박감이라는 건 최초 한 번의 극복이 중요하니. 한 번 성공하면 더 이상 압박감 만으로 자네들을 어떻게 할 수는 없어."
그래, 하지만 그것 뿐이잖아.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오줌을 지리지 않게 되었다고, 호랑이랑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냥, 최소한 선 채로 오줌은 싸지 않은채 한 끼 밥이 되었다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는거지.
어쨌든, 그 검은 염소라는 걸 신처럼 모시는 이유는 방금 전에 그걸로 확실하게 알았다. 그런 경험을 하게 된다면 어지간해서는 복종하기 마련이지.
문제는 우리는 녀석에게 알랑방구를 뀌는게 아니라, 죽여야 하는 입장이라는 거다.
"우리가 만약에, 검은 염소를 죽이러 가면 네가 도움을 줄 수 있나?"
내 말에 고개를 저었다.
"계약자들끼리 서로를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의 싸움이라면 모를까, 애초에 랜드 마크나 월드 앵커를 공격할 요량으로 접근한 경우에는 도울 수 없지. 괘씸하지 않나."
그래, 괘씸죄라 그거지.
"그럼 방금 전에 본 그 눈알도..."
내 말에 제르멩이 고개를 끄덕였다.
"찾아가서 싸우려 든다면, 내 도움은 기대 할 수 없을거야."
그렇군, 뭐 어때 어차피 제르멩이 우리를 직접적으로 도와준 적은 거의 없다. 주로 자기가 할 말이 있어서 찾아오는 것 뿐이지.
"아, 방금 전에 마르골리스에게서 우선적으로 보호한 건 이 아가씨 쪽이야. 자네는 아마 후유증을 다소 각오해야 할 걸. 덕분에 약간 보호가 늦었거든."
저건 또 무슨 뜻일까. 질문을 하기도 전에, 자기 할 말을 다 끝낸 제르멩의 모습이 서서히 흩어진다.
"어떡할까요."
최현우는 도망쳐버렸다. 그리고 목동은 아직 서울 안에 남아있는 생존자들을 옮기는 중일 것이다.
"당연히 목동 가야지."
김용천에게 실패하면 죽여버리겠다고 경고 한 건, 찌질하게 내 명령 안 들었다고 삐져서 그런게 아니다. 성공할 가능성이 높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지. 우리가 입힌 부상은 아니지만, 최현우는 꽤나 큰 충격을 받고 도망쳤다. 아마 지금으로서는 당장 목동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을거다.
지금 우리가 가서 도우면 확실하게 성공시킬 수 있다.
"괜찮겠어? 피곤하면 가서 싸울 필요 없어."
나 하나만 가세하더라도 목동의 생존자들은 충분히 전부 구출 할 수 있다. 내 말에 서지현이 잠깐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저는 목동 쪽으로 합류할게요, 당신은 차라리 여기에 남아서."
아, 그러는 방법도 있군. 서지현이 목동을 돕고, 그 사이에 나는 이 근방의 고치들을 부수면 된다. 일거양득이지.
"그럼, 있다가 보자."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와 헤어졌다.
***
- 머저리 같은 녀석.
남산의 N 타워 안에서, 마르골리스가 최현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육체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을 것이다. 그의 존재가 바라보는 자로 하여금 형언 할 수 없고, 견딜 수 없는 공포를 느끼게 한다면, 제르멩의 존재는 바라보는 자의 머리에 이해 할 도리가 없고, 절대로 습득 할 수 없는 온갖 지식과 모순의 찌꺼기를 강제로 구겨 넣는다.
멍한 눈으로 침을 흘리며 허공을 바라보는 최현우. 마르골리스는 고민에 빠졌다. 그나마 괜찮게 써먹을 만한 녀석이라고 생각해 계약을 제안했더니. 이 모양 이 꼴이다. 서울은 그 망할 자식과 계약한 자식들이 먹어 치울 것이다. 최현우를 바라보는 마르골리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하지만, 계약은 계약이다. 백치가 되어버린 최현우의 코와 귀 속으로 시커먼 액체들이 밀어넣어진다.
"아, 아아아!"
최현우는 그런 신음소리를 흘리며 눈을 까뒤집고 몸을 덜덜 떨었다. 회복은 고통스러웠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최현우의 눈에 서서히 초점이 잡히기 시작한다.
"여긴, 젠장."
최현우는 주변을 둘러보고 나서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고 얼굴을 가렸다.
- 너는, 나를 몇번이나 실망시켰다.
최현우가 마르골리스의 말에 대답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젠장맞을 자식들이...!"
그는 그렇게 말하고 바닥을 향해 주먹을 한 번 휘둘렀다.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앉아있는 층 전체가 낮게 떨린다. 아직 후유증이 남은 모양인지, 최현우가 몸을 부르르 떨고는 자기 머리를 잠깐 감싸쥐고 신음한다. 제르멩의 존재감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최소 하루 정도는 저 두통에 고통받아야 벗어 날 수 있겠지.
- 변명일 뿐이지. 나는 더 이상 너를 믿을 수 없군.
마르골리스의 말에 최현우가 큭큭큭 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렇습니까, 그거 슬프군요. 하지만, 이렇든 저렇든 저는 당신과 계약을 했습니다. 저를 해칠 수는 없습니다."
- 그래, 그렇지. 나는 너를 해칠 생각이 없다.
그리고, 바닥의 그림자들이 끓어올라, 굵은 밧줄이 되어 최현우를 휘감는다.
"지금, 뭐 하는 거야!"
- 나와의 계약을 수행하기 위하기 더 좋은 상태로 만들려는 거지. 해치려는 생각은 없다.
물론,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고통은 일종의 징벌이기도 하다.
그림자가, 그의 몸을 야금야금 뜯어먹기 시작한다. 최현우는 그 끔찍한 고통 속에서 다시 한 번, 한 사람이 평생을 걸쳐서 겪어도 다 겪을 수 없을 고통을 겪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