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
결투
전달된 보고를 들은 최현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기에 머무르고 있다가는 죽도 밥도 안된다. 녀석들은 지금 동대문구에 만들어 놓은 고치들을 파괴하는 중이다.
"안양으로 동행한게 아니었던 모양이군."
양동이라. 인정하기 싫지만, 지금 동대문구에서 날뒤고 있는 녀석 중 남자 놈의 실력은 자신과 비등하다.
거기에 더해서 계집까지 더해지면, 최현우 혼자 가서는 승산이 낮다. 어쩔 수 없이 목동을 지키고 있는 괴물들 중 일부를 동원해서 함께 가야 한다.
자신의 손 등에 새겨져 있는 하얀 고리 모양의 표식을 바라봤다. 표식이 꿈틀거리며 자신의 통제 하에 있는 괴물들에게 지시가 내려지고, 부하 간부들에게 새롭게 괴물들을 지휘할 권한이 양도된다.
"안양으로 이동한 녀석들은 여기를 노릴거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켜!"
목동에 모여있는 간부들에게 그렇게 지시를 내린 최현우는 괴물들을 대동하고 동대문구로 향했다. 거리가 꽤 되지만, 녀석들이 만들어낸 파괴의 흔적은 불빛 하나 없는 어두운 서울의 풍경 아래에서 희미하게 빛을 뿌리고 있었다. 저 아래에는 박살난 채 불타오르는 고치들이 가득하겠지.
생각만 해도 열불이 치솟는 기분이다.
그리고, 최현우가 이를 갈면서 동대문구로 향하는 동안 안양에서 출발한 성남시의 생존자들도 서울에 진입한 상황이었다. 온 몸을 검은 천과 옷으로 감싸고 목동에서 3km 정도 거리를 남겨두고, 그들은 미리 이야기가 끝난 시간을 기다리며 쏟아지는 비를 묵묵히 맞고 있었다.
"후우."
김용천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시간을 확인했다. 정각 여덟시. 시작해야 할 시간이다. 그는 입에 호루라기를 물고, 그대로 힘껏 불었다.
삐이이이이익,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서울의 밤하늘을 찢고 울려퍼진다. 그리고, 거기에 호응하는 것처럼 사방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들린다. 공격 신호다. 김용천은 양 손에 강철로 된 장갑을 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갑시다!"
해내야 한다. 단순히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다. 지금 최현우를 유인하고 있는 두 사람이, 자신의 어거지 같은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서 어떤 것을 판 위에 올렸는지는 짐작이 된다. 그 사람들이 양보해준 일이, 무가치한 일이 아니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옳은 선택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싸움이 시작되었고, 김용천을 비롯한 성남의 생존자들이 밤을 달려 목동의 고층 아파트로 돌격했다.
"왔군, 막아라!"
목동을 지키고 있던 괴물들과 최현우의 졸개들이 횃불 따위로 조명을 밝히고, 방어를 시작한다. 예상했던 일이다. 이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성남에서 안양으로 이동했는데, 모를 수는 없다. 상관없다.
성공해야 한다.
***
최현우는 혼자 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혼자서 나와 서지현 둘을 한 번에 상대할 자신은 없었던 모양이다.
"네 녀석들."
최현우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괴물들과 함께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별 다른 말 없이 녀석을 노려보다가 수확자를 뽑아들었다.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의 단검과 내 검이 서로 부딪쳤다. 쏟아지는 피가 그 충돌로 인해 뻗어나오는 충격에 쫙 밀려난다.
"양동이라. 네 녀석들이 안양으로 병력을 보낸 것 정도는 알고 있어. 그리고 그 녀석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죽게 될 것이다."
그래? 열심히 해봐라. 순간적으로 무수한 공격과 방어가 오간다. 분명히 하늘에서 비는 쏟아지고 있는 것 같지만, 나와 최현우의 몸에 닿는 빗방울은 하나도 없었다. 떨어지는 빗방울이 만들어지는 총격을 이기지 못하고 계속해서 밀려나서, 나와 최현우의 격전지를 감싸는 무형의 돔 같은 형태가 만들어진다.
"결국은, 내가 이길거다."
최현우는 스스로에게 최면을 거는 것처럼 눈을 번들거리며 나와 서지현을 번갈아 본다. 최현우가 몰고 온 괴물들 사이에서, 서지현은 부지런히 움직이며 폭발을 일으키고, 에노테르를 휘두른다.
"그래, 떠들어라."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무기가 맞닿은 채로 어깨로 단검을 발사하며, 녀석의 정강이를 노리고 발차기를 했다. 맞닿아 있던 무기에 힘을 주어 나에게서 멀어지며, 내 발차기를 피한다. 그리고 내가 날린 단검은 최현우가 휘두른 단검에 맞아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 틈에, 나는 슬쩍 서지현 쪽을 확인했다.
몇 마리나 이리로 온 거지. 대충 봐도 300은 될 것 같은데. 서지현 혼자 괜찮을까.
"저 계집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지?"
그런 말과 함께 녀석이 내 앞으로 다가와 목줄기를 노리고 단검을 내지른다. 녀석의 손등에 박힌 표식이 하얗게 빛나고 있다. 프릭션 컨트롤을 활용해 옆으로 피하자, 단검이 내질러진 자리를 따라 길게 촤아악, 하는 소리를 내며 쏟아지는 빗물이 양 쪽으로 쫙 갈라진다.
빗물을 가르며 뻗어져 나가는 무형의 힘은 서지현을 노리고 있었다. 에노테르를 휘둘러 괴물의 팔을 잘라내고 있던 서지현이 자신에게 뻗어지는 충격파를 보고 그대로 왼손을 살짝 들어올렸다. 서지현이 만들어낸 푸른 방어막과, 녀석이 휘둘러 만들어낸 충격파가 서로 부딪친다.
그 사이에 녀석은 내가 휘두른 검을 뒤로 멀찍히 뛰어서 피한 다음 손에 들고 있는 단검을 이리저리 돌렸다. 싸우는 와중에 발생하는 충격으로 밀려나던 빗방울이, 다시 잠깐동안 내 몸을 때린다.
"좋은 여자군. 어떤 비명을 지를지 궁금해. 네 녀석 둘을 산채로 잡으면 재미있는 일들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다시 한 번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과 나는 서로 무기를 마주쳤다.
"그럴 순 없을 걸."
넌 쫄보니까. 주로 배우고, 강화한 스킬을 보면 알 수 있다. 자동으로 상대의 공격을 방어하는 기술, 거기에 더해서 무기에 쇼크를 감으면 몸에 알 수 없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며 마력을 무효화 한다. 단검을 통해서 뿜어내는 힘은 제법이지만, 어차피 그건 녀석이 배운 스킬이 아니다. 표식을 통해서 얻은 힘이다. 녀석이 상점에서 포인트를 주고 스스로 구매한 스킬들은 전부, 자기 몸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것들 뿐이다.
물론 방어는 중요하다.
하지만, 저 정도로 방어에만 치중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다.
서로 무기 들고 싸우는 와중에도 자기 몸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싶다는 쪼다 새끼들이나 저런 스킬에 한 가득 투자하는 거지.
"누군가에게 처맞아 본 적도 없을테고. 뭔가를 잃어 본 적도 없겠지."
우리는 서로 끊임없이 무기를 마주치고 있었다. 내가 공격하면, 최현우는 방어한다. 애초에, 배운 스킬이 방어 말고는 없다. 공격을 하려고 하면 저 녀석의 손등에 박힌 하얀 마크가 빛을 뿌리게 된다. 강한 공격을 하려고 든다면 모를 수가 없다. 텔레폰 펀치가 따로 없다.
"나 같은 사람들은 그럴 필요가 없거든."
녀석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금 손등의 하얀 표식을 빛냈다.
"그래, 항상 전부 다 가져왔을테니."
녀석의 하얀 마크가 빛나는 것을 확인한 나는 허공에 수확자를 마구 휘둘러 장밋빛 궤적으로 벽을 만들었다.
휘둘러진 최현우의 단검이 강력한 참격을 뿜어낸다. 일전에, 건물 한 채를 통재로 썰어버렸던 일격이, 내가 만들어낸 장밋빛 궤적의 벽과 부딪친다. 카가가가각, 하는 소리와 함꼐 궤적이 박살난다. 벽을 박살낸 참격이 밀려오는게 보인다. 참격이 지나가며 쏟아지는 물방울을 가르는 광경이 보인다.
주먹을 두번 쥔다. 만들어진 보호막이 다시 한 번 참격을 막아낸다. 보호막이 부서진다. 그리고, 나는 그 참격을 향해 수확자를 휘둘렀다. 몸이 뒤로 밀려나려고 하자, 나는 발의 마찰력을 높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이 뒤로 밀리면서, 신발에서 타는 냄새가 올라온다. 참격을 막아낸 수확자의 검신이 격하게 떨리고, 팔이 약간 얼얼하다. 웅웅 거리는 소리를 내며 떨리는 수확자의 검신을 손으로 꽉 잡자, 울음이 그쳤다.
참격은 나에게 피해를 주지 못했다.
"미친 새끼."
최현우가 약간 초조한 표정을 지은채 나를 바라본다. 저 표정은 좋은 표정이다. 목동에서 급한 일이라도 생긴 모양이지. 그게 아니라면 비등하게 싸우고 있는 지금 저 녀석이 초조할 이유는 없다. 바닥을 바라보니, 시커먼 역청 같은 액체들이 빗물에 한 가득 섞여있다.
"수가 많이 줄었네. 조금 더 보충하는게 어때?"
서지현의 분투로 괴물들의 시체가 쌓이고 있다. 빗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검은 액체는 괴물들의 시체에서 흘러나온 거다. 서지현이 괴물들을 다 죽이게 된다면 이 싸움에 합세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와 비등하게 싸우고 있는 최현우의 승산은 한도 끝도없이 추락한다.
그렇다고 목동을 지키는 병력에서 괴물들을 추가로 뺴돌려 여기로 보내면, 당연히 그만큼 목동을 지키는 괴물들의 숫자가 줄어들게 된다. 나는 낮게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쫄보 새끼."
차라리 자기 몸이 다칠 각오를 했어야지. 팔 하나 정도 날아가거나, 갈비뼈가 부서져서 폐를 찔리는 정도의 부상은 각오한 채로, 괴물과 함께 오는게 아니라 녀석 혼자서 왔어야 한다. 그럼 그 만큼 목동의 방어는 튼튼해졌을테고, 아마 김용천은 큰 피해를 입은 채 실패했을거다.
하지만 최현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상당한 숫자의 괴물을 뽑아서 자기와 함께 여기로 오게 했다.
한 여자를 몇 년이나 괴롭히고, 마침내 애까지 유산시키고. 그렇게 죽게 만든 주제에.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한 가정을 개작살냈으면서.
"지가 아픈 건 죽어도 싫다, 그거지."
역겨운 새끼. 하다못해 김용천조차도 지금 자기 목숨을 판돈으로 올리고 싸우는 중인데, 이 자식은 그럴 용기조차 없는 새끼다. 하긴, 그러니 괴물들 수장이 계약을 제안했을 때 대뜸 받아들이고 앞잡이 노릇을 했겠지.
"내가, 네 녀석들과 같은 위치에 있는 줄 아냐. 머저리 같은 새끼. 네 녀석들과 나는 태어나자마자 몸을 감싼 포대기부터 차이가 있었단 말이다."
그리고, 손등의 하얀 동그라미 마크가 새겨진 곳 언저리가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목동의 괴물 중 일정 숫자를 다시 이쪽으로 끌고 오려는 모양이다. 끝까지 저런다. 뭐, 이제와서 자기 혼자 우리를 막아보겠다고 해 봤자 변하는 건 없겠지만. 그래도 최소한, 목동의 생존자를 구하러 간 성남의 생존자들이 쉽게 목표를 성취하지는 못하게 할 수 있을텐데.
"계속 떠들어. 너는 특별하다고, 너는 남들과 다르다고."
그런다고 변하는 건 없어. 잘나신 재벌 3세 나으리. 너는 이전 세상이라면 감히 말도 붙여보지 못했을 너절한 연쇄살인범이랑, 거지같은 유년 시절을 보내고, 빚을 져가며 가까스로 간호사가 된 여자에게 죽는거야. 지금 이 순간 이 자리가 아니어도, 조만간.
녀석이 충혈된 눈으로 나에게 달려들어 무기를 휘둘렀다.
"아무나 이 표식을 받을 수 있는게 아니다. 나 정도 되니까 얻을 수 있었던 기회다! 너희 같은 녀석들은 기를 쓰고 노력해도 이 표식을 받을 기회조차 없었을거다! 알아 먹냐!"
"아, 주인님이 너를 인정해 주셔서 기쁜 모양이지?"
녀석은 내 목을 노리고 단검을 휘둘렀지만, 거기에 맞춰 내 검이 휘둘러지자, 즉각 공격을 중단하고 내 공격을 막아낸다.
몸에 피해가 생길 것 같으면, 하던 공격도 멈추고 즉각적으로 방어를 시도한다. 그게 녀석이 배운 스킬이다.
녀석의 공격은 나에게 닿지 않는다. 아니, 닿을 수가 없다. 어차피 후발 선타가 발동하는 순간, 녀석은 자신이 배운 스킬 때문에 자동으로 공격을 포기하고 수비를 선택하니까. 결과적으로, 나도 녀석의 몸에 상처를 남기지는 못했지만, 녀석도 내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
여태동안 시간은 최현우의 편이었을 것이다. 세상이 망하기 전에도, 망한 이후에도. 그저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가진 것을 잃지 않고 지키며 버티는 걸로 충분했겠지. 이미 남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들을 손에 넣은 상태였으니.
하지만 지금은 아니거든. 크게 검을 휘둘러 녀석을 뒤로 밀어내며 나는 웃었다.
버티면 승리하는 쪽은 네가 아니라, 우리야. 뭔가를 희생해 가면서라도 불리한 상황을 타개해야 하는 쪽은 이제 너지. 근데 네가 그럴 수 있을까. 아니지, 애초에 그럴 수 있었다면 이런 상황이 되지도 않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