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
눈먼 자들의 도시
야뱜에 성남을 나와 서울을 뒤진지 약 3시간이 지났다. 마침내 나는 최현우가 어디에다가 생존자들을 몰아넣고 가두었는지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살아있네."
내 말을 들은 서지현이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표정 지을 필요 없어."
이건 좋아할 일도 아니고, 슬퍼할 일도 아니다. 살아있다. 김용천에게 내가 전해줘야 할 사실은 그것 뿐이다. 방금 전에 꽤나 감정적으로 김용천에게 말을 쏟아넣어서 그런지, 그 동안 차 있던 여러가지의 가벼운 마음가짐들이 확 하고 덜어져 나간 기분이다.
물론 살아있다는 사실과 위치만을 말해주는 대신, 거기에 더해서 몇 가지 더 알려준다면 성공할 가능성이 높겠지. 김용천이 실패한다면 녀석은 죽는 걸로 끝이지만, 나는 최현우를 눈 앞에 두고 다시 또 오랜 시간을 들여야 한다. 그건 좋지 않아. 나는 목걸이를 통한 감각의 초월로 아파트를 계속 살펴봤다.
"고층 아파트라."
그냥 고층 아파트가 아니다. 자그마치 60층 이상의 층수를 자랑하는 초고층 아파트다.
"저기에 몰아넣은 이유는 깊게 생각해보지 않아도 알 것 같네요."
저 아파트에서 탈출하고 싶다면, 뛰어내려야 한다. 일반적으로, 저기에서 뛰어내리면 십중 팔구 죽을테고, 살아남는다고 해도 금방 잡힐 것이다.
게다가, 좁은 공간 안에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지어진게 아파트다. 게다가 저 정도 높이의 아파트라고 한다면 안에 사람들을 구겨넣었을 때 굉장한 숫자를 밀어넣을 수 있다. 지켜야 하는 구역이 좁으니, 가둬놓은 곳 주변을 지키는 병력들의 숫자가 많지 않아도, 충분히 효율적으로 관리 할 수 있다.
다수를 붙여놓을 필요가 없다는 장점.
"우리를 의식하고 있는거야."
마음 같아서는 생존자들을 가둬놓은 저 고층 아파트 주변에다가 아예 새 살람을 차려버리고 싶겠지만, 어차피 그런다고 해도 우리가 고치를 부수기 시작하면 결국 대응을 하기 위해서 괴물들과 함께 우리 쪽으로 올 수 밖에 없다. 그러니, 하다못해 이런 식으로 감시 병력이라도 효율적으로 배치를 해둔 것이다.
김용천이 우리에게 부탁한 것도 그거다. 거기에서 그냥 도망치는게 아니라, 최현우를 최대한 잡아달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향해 몰려왔던 괴물들은 김용천 쪽으로 몰려가겠지만. 최현우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크다.
"끝. 볼 건 다 봤어."
여기에 더 머무를 필요는 없다. 우리는 그 길로 서울을 떠나 다시 성남으로 돌아왔다.
"..."
우리가 나간 사이에 김용천이 뭘 했는지, 성남 시는 소란스럽지 않지만 착실하게 뭔가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아, 돌아오셨습니까."
경계를 서던 녀석들 몇 명이 나와 서지현을 보고 반가운 표정을 짓고 인사를 한다. 나는 무표정으로 녀석을 지나쳤다. 자연스럽게, 서지현도 녀석을 스치고 지나간다. 이전과는 약간 다른 분위기에 녀석이 잠깐 고개를 갸웃한다.
김용천은 아직 잠들지 않은 상황이었다. 나는 곧바로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에는 이시은과 이경석 오누이, 그리고 우석진이 앉아서 김용천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회의라도 하는 모양이지?
"다녀오셨습니까."
김용천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동 하이페리온. 지키고 있는 괴물 160마리, 최현우의 졸개로 보이는 녀석 약 80명. 안에 수용된 생존자들은 2457명."
내가 전해줘야 할 말은 다 전해줬다.
"잠깐."
이시은이 나가려고 하는 나와 서지현을 제지했다.
"이야기 들었어. 분명히 김용천 씨가 길을 돌아가려고 하는 건 맞아."
"하고 싶은 말이?"
"아무리 그래도, 죽인다는 식의 이야기는 조금... 물론, 진짜로 그러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이시은의 말에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건가 했더니만. 진짜로 그러지는 않을 거라니. 고개를 돌린 나는 이시은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일에서 실패하면 김용천은 서울에서 뒤진다. 실패했는데도 불구하고 살아서 돌아오면 내 손에 죽어. 농담도 아니고, 협박도 아니야. 실패하면, 김용천의 죽음은 확정이다."
이시은이 뭔가 더 말을 하려고 하다가 내 표정을 보고 하려던 말을 삼켰다. 그런 이시은과 눈을 마주친 나는 무심한 목소리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백마 탄 왕자님 모가지가 길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는 꼴 보기 싫으면, 준비 열심히 하라고."
그 장면을 보고 있던 이경석이 서지현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서지현 양, 오현석 씨를 좀 말려주세요."
"내가 왜요?"
이경석은 서지현의 이런 반응을 예상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왜요, 라니..."
서지현은 머리를 쓸어넘기며 이경석의 중얼거림을 무시했다. 그 사이에 나는 나가는 문 쪽으로 걸어가면서 한 마디 했다.
"하이페리온에 생존자를 몰아넣은 이유는 짐작할 거라고 생각한다."
이상 전달 끝. 우리는 다시 녀석들이 앉아있는 장소를 나섰다.
"잘 쌓아왔던 인상이 여기에서 이렇게 무너지네요."
"왜, 잘 보여야 하는 이유라도 있어?"
서지현이 고개를 저었다. 원래부터 그럴 필요는 딱히 없었다. 그냥 어쩌다 보니 서로에 대한 인상이 좋아졌을 뿐이고, 지금은 딱히 이전과 같은 착한 이웃으로 남아있어야 할 이유를 모르겠으니까.
"김용천은 자기 목숨을 담보로 걸었고, 일이 잘못되면 당신이 죽일 거잖아요? 이전처럼 친하게 지낼 이유는 없죠."
"그렇지."
그리고, 우리는 기다리기 시작했다. 아침에 떠오른 태양 위에 시침과 분침이 차곡차곡 쌓였다.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한 해가 가라앉고, 그 자리를 대신하기 위해 달이 떠올랐다.
해가 저물고 달이 뜰때까지, 나와 서지현은 숙소에서 나오지 않았다. 숙소 안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씻었다. 그렇게 하루를 보냈다.
우리가 그렇게 정적인 하루를 보내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격동적으로 움직여 준비를 서둘렀다.
"오현석 씨."
그리고, 오후 즈음 해서 김용천이 찾아았다.
"뭐야."
"저희는 경계를 위한 소수의 사람들만을 두고 안양으로 갈 예정입니다."
뭐, 성남에서 목동으로 향하는 것 보다 안양에서 목동으로 향하는 편이 훨씬 가까우니,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굳이 김용천이 여기에 찾아온 이유는 그 말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아니겠지.
"정확히 밤 여덟시에 고치를 부수기 시작할 거다."
녀석들이 안양으로 가면 우리와 합을 맞출 방법이 없으니까, 우리가 언제 일을 시작할지 시간을 물어볼 생각이었던 거겠지.
"그럼,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김용천이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서려고 한다.
"행여나, 도망칠 생각은 하지 않는게 좋을거다."
숨은 사람을 찾아내서 목을 따는 건 이미 여러번 해봤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할 때는 지금처럼 강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아내서 하나씩 녀석들의 숨통을 끊었다. 김용천이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도망치려고 들었다가는 괜히 괘씸죄만 더 얹어진다.
"다시 말하지만, 이미 각오한 일입니다."
무기를 정비하고, 인원을 확인하고, 필요한 것들을 챙겼다.
스윽, 스윽 하는 소리가 들려서 창문에서 시선을 돌렸다. 서지현이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 채 에노테르를 수건으로 닦고 있었다.
"시간 되었어."
내 말을 들은 서지현이 곧바로 에노테르를 등에 둘렀다.
"그럼, 가볼까요."
숙소를 나오자, 해가 저물고 선선한 바람이 몸을 스치고 지나간다. 날씨는 선선하지만 비가 올 모양인지, 하늘에는 먹구름이 한 가득이다.
성남에 머무르고 있던 대부분의 생존자들은 성남을 떠나 안양으로 향했기에, 여기는 썰렁하기 그지 없다. 뭐,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이 정도로 성남이 썰렁해졌다면, 최현우가 눈치를 챘을텐데."
"아무래도 그렇겠죠."
대놓고 바글거리던 도시가 텅 비었다. 그리고, 안양이라고 하면 최현우가 충분히 괴물이나 사람을 보내서 몰래 확인 할 수 있는 정도의 거리에 있다. 무장한 채로 성남을 떠난 생존자들이 안양에 도착했다면, 그 다음에 무슨 일을 벌일지 짐작하지 못하는 건 바보다.
"그렇다고 해도 별 수 없을 걸."
성남을 떠나 안양에 도착한 녀석들을 신경쓰기에는 우리의 위협이 너무 크다. 고치로 만들 생존자들을 지키기 위해 한강 북쪽에 있는 고치들이 부서지는 걸 그냥 구경한다는 것은 본말전도다. 우리가 고치를 부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최현우 본인이 와야 할 것이다.
"대신, 서울의 다른 마물들은 대부분 목동을 지킨다고 봐야겠죠."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뚫고 들어가서 사람들을 구하겠다고 자기 목숨을 건 새끼가 있는데, 내가 거기를 걱정할 이유는 없지."
우린 분명 경고했다. 쉬운 일도 아닐테고, 그냥 우리가 주는 떡이나 받아먹을 생각으로 얌전히 있다가 지시에 따라서 공격하면 어렵지 않게 서울을 손에 넣을 수 있을거라고.
"우린 우리 할 일 하면 되는거야."
대화를 나누는 사이, 우리는 그 사이에 제법 익숙해진 경로를 따라 서울에 도착하는데 성공했다.
"괴물도 안 보이고, 사람도 안 보이고."
이건 완전히 유령 도시가 따로 없군 그래. 괴물들이 모두 어디로 향했을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해주기로 한 건 성실하게 해야지. 우리는 이전처럼 성수 대교를 건너 성동구에 도착했다. 곧바로 목걸이를 이용해 감각을 접고 주변을 살피며 고치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이 근방은 한 번 날뛴 기억이 있어서 그런지 그렇게 많은 고치가 남아있지 않아."
대신, 조금 더 위로 올라가면 또 고치 한 무더기가 몰려있다. 우리는 거기로 방향을 잡고 이동했다.
"젠장, 더럽게 징그럽군. 여기에서 괴물이 나오는 거야?"
도착한 고치 주변에는 괴물들 대신 사람들이 자리잡고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나도 처음 보는 거다. 소문으로만 들었지, 애초에 여기로 올 일이 우리가 있을리 없잖아."
그래, 보통은 사람들을 여기로 보내지는 않을거다. 별로 보기 좋은 풍경은 아니니까. 원래는 이 주변을 배회하는 괴물들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까지 싹 다 끌어모아서 목동으로 향한 모양이다. 이 고치들의 방어는 자기 부하들에게 맞겨놓은 모양이고.
"최현우는 우리도 안양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 그게 아니라면 있는 괴물 없는 괴물 죄다 끌어모아서 목동으로 향했을리는 없으니까. 녀석들이 잡담을 하는 동안, 나는
"거기, 누구...!"
말이 끝나기 전에, 내가 던진 단검이 먼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녀석의 이마빡에 박혀들었다. 방금 전까지 대화를 나누던 녀석이 마빡에 단검을 맞고 절명하는 꼴을 본 녀석이 으아아아! 하는 소리를 지르면서 무전기를 꺼내들었다.
그래, 보고해. 어차피 보고하라고 벌이는 일이니까. 콰쾅, 하는 폭음과 함께 쏘아져 나간 서지현이 고치에 에노테르를 박아넣고 터뜨렸다. 폭음과 함께 고치가 통째로 박살나며, 안에 있던 액체와 건더기를 줄줄 쏟아낸다.
그 사이에, 녀석은 당황한 표정으로 어떻게든 보고를 마친 모양이다. 녀석이 해줘야 하는 일은 다 해줬다. 도로 위를 쭉 미끄러져 녀석에게 달려든다.
"오지마, 오지마 이 개새끼들아!"
그게 녀석의 유언이었다. 떨어져 나간 모가지가 바닥을 구른다. 그리고, 쿠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물방울이 투툭이는 소리를 내며 쏟아지기 시작한다.
"비 내린다. 괜찮겠어?"
내 말에 서지현이 픽 웃고는 내리는 비 속에서 한 손으로 화염을 피워올렸다.
"이런 물방울 따위에 약해질 정도로 대충 살아오지는 않았어요."
다행이네. 나와 서지현은 부지런히 주변의 고치들을 박살내기 시작했다.